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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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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7. 2020

EP 19) 반복되는 우연, 인연과 필연.

episode 19.


한편, 2시간여의 비행 끝에 일본에 도착한 정완은 입국절차를 마치고 수화물을 찾으러 이동했다. 함께 비행기에 타고 있던 그 남자 역시 정완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기다리면 짐이 나오나요?”

“네. 기다리다고 있으면 곧 보일 거예요.”

“네.., 혹시 일본 지하철 타보셨어요?”

“타봤죠.”

“제가 머물 숙소가 여기쯤인데, 노선이 너무 복잡해서요.”


정완은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받았다. 적혀있는 약도와 이동수단을 체크해놓은 것을 본 정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기하네요. 저도 오늘 여기서 묵는데.”

“와, 정말요?, 제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수월할 줄 알았는데,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봐요.”

“익스피디아에서 검색하셨어요?”

“네.”

제가 여기 예약할 때, 방이 두 개인가 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딱 하나 남아있길래, 놓칠까 봐 엄청 빨리 결제했어요.”

저는 비싼 호텔에 묵을 형편이 아니라, 최저가 위주로 검색하다가 여기 고른 거거든요.”

“저도요.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고들 하던데. 첫날부터 너무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네요.”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저는 박정완이라고 해요.”

“아, 네. 저는 송민수예요. 올해 스물다섯이고요. 실례가 아니라면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쩐지 앳돼 보이더라니.., 그럼 내가 형이니까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

“네 형. 덕분에 정말 수월했어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저기 짐 나온다. 저 기타 케이스 네 거 맞지?”

“여기서 보니까 눈에 확 띄네요.”


정완과 민수는 각자의 짐을 찾아들고 입국장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정완은 이미 한번 와보았던 경험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리무진 버스의 표를 구매하러 갔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민수도 정완의 뒤를 따라다니며 정완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했다.


“지하철 타고 가는 줄 알았더니, 버스도 있나 봐요?”

“이 버스가 배차시간이 조금 길어서 그렇지 한 번에 도쿄역까지 가니까 훨씬 편해.”

“역시 인생은 경험인가 봐요. 경험하지 못한 자와 경험해본 자의 차이는 천지차이네요.”

“근데 그 큰 기타는 왜 들고 왔어?”

“아, 이거요?”

“그거 설마 여행 가방은 아니지?, 케이스 열면 네 살림살이들 나오는 거 아니?”

“아니에요. 어쿠스틱 기타예요.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이라고요.”

“음악 해?”

“네. 아이돌 연습생이었어요.”

“어쩐지 곱상하게 생겼더라니.”

“형, 저 버스 아니에요?, 버스 오는 것 같은데.”


정완과 민수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도쿄역으로 향했다. 1박에 4만 원정도로 비교적 저렴한 호텔이었지만 누울 곳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같았다. 빼곡하게 들어선 빌딩 사이사이마다 낯선 언어로 아기자기하게 빛나는 간판들이 즐비했다. 기온은 한국과 비슷했으나 불어오는 바람의 무게감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피부에 닿은 바람은 뺨이 시릴 만큼 차가웠지만 소금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제법 밀착력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형은 며칠 정도 머물 계획이세요?”

“글쎄, 마음 내킬 때 돌아가려고. 그래서 티켓도 편도로 끊었어.”

“정말요?, 저는 일주일 정도 있다 가려고 왕복으로 끊었는데.”

“무비자로 90일까지는 체류가 가능하니까, 그전에만 돌아가면 돼.”

“호텔은요?, 저는 3박 4일 예약했는데..”

“나는 2박 3일. 도쿄에 있다가 치바에 살고 있는 친구도 좀 만나러 갈까 하고.”

“일본에 친구도 있어요?”

“응. 중학교 때 친구인데, 재작년인가부터 일본에 살기 시작했어. 안 본 지 오래돼서 겸사겸사  얼굴 좀 보러 가려고.”

“이따가 호텔 도착하면 뭐 하실 거예요?”

“모르겠다. 일단 짐 좀 풀고 생각해봐야지.”

“딱히 할 거 없으면 술 한 잔 하실래요?, 알아보니까 호텔 근처에 유명한 선술집이 있더라고요. 가보고 싶은데 혼자는 좀 창피해서..”

“그러자. 여행 첫날은 뭐니 뭐니 해도 술이지. 그래야 푹 자지.”

“그럼 도착해서 대충 짐 풀어놓고 1층에서 만나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무슨 소리야. 처음 만난 동생한테 얻어먹는 게 말이 돼?”

“형, 여기 일본이에요. 원래는 더치페이라고요. 오늘 감사한 것도 있으니까 말리지 마세요.”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한 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대충 던져놓은 정완은 휴대폰과 노트, 여행용 책자를 들고 호텔방을 나섰다. 1층 로비로 내려온 정완은 간이 테이블에 앉아 따듯한 녹차를 마시며 민수를 기다렸다. 민수도 곧 1층에 내려왔고 정완은 민수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나섰다.


“형, 여기에요. 사진이랑 정말 똑같네요.”

“평범하네. 수수하고.”

“저는 화려한 것보다 평범한 걸 좋아해요.”

“네 기타 케이스는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던데?”

“일단 들어가요.”


입구를 통해 선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일직선의 테이블에 듬성듬성 앉아있는 손님들이 보였다. 별도로 놓인 3개의 작은 테이블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정완은 입구에서 잠시 방황하는가 싶었지만 민수는 거리낌 없이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비좁은 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정완에게 빨리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왠지 어색한데, 이런 분위기는.”

“이런 게 선술집의 묘미 아니겠어요?, 주문은 제가 할게요.”

“나는 맥주 마실게. 술이 센 편이 아니라서.”


민수는 조금 더듬기는 했지만 그럴싸한 일본어로 주문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돌 연습생으로 있었어요.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아주 어렵게 오디션까지 합격했는데,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회사이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데뷔를 할 수가 없더라고요. 같이 연습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데뷔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고, 몇몇은 운 좋게 데뷔까지 했고요.”

“너는?, 오디션에 합격할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을 검증받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사실 그 문제 때문에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거예요. 꿈을 찾아야 하는 게 맞는 건지, 꿈을 쫓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엄청 헷갈려서요.”

“꿈이 뭔데?”

“노래하는 거요. 사실 저는 노래로 오디션에 합격한 거였는데, 춤이 따라가질 못했어요. 몸치는 아닌데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노래는 자신 있겠다. 기타도 들고 다닐 정도면 언제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많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서 언젠가는 꼭 노래하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돈이 문제죠. 돈이 없어서 매일 라면만 먹은 적도 있어요. 어떤 날은 빵 한 개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고요.”

“그 마음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눈물 젖은 빵..,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정완과 민수가 대화를 나누던 중 주문했던 안주와 생맥주가 비좁은 테이블 위에 얹어졌다. 안주로 나온 명란 계란말이와 타코 와사비를 보니 정완은 문득 선영이 생각났다. 선영과 일본으로 여행을 왔을 때 선영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던 음식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이 길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건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나도 몇 년 전에는 그런 생각 때문에 많이 괴로웠어. 근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까 꿈은 쫓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졌지. 어렵사리 찾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없을까 요즘은 그게 고민이야.”

“저도 몇 년 만 더 참고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볼까요?, 지금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 시간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남들이 보기에는 틀린 길 일지라도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면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게 인생 아니겠어?”

“그래서 형은 여전히 직진 중이세요?”

“응,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가 넘어지고 말았지만..”

“넘어지다니요?, 지금 정체기다 뭐 그런 뜻인가요?”

“뭐 그런 셈이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더니 내가 출발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내가 달려왔던 그 길의 주변이 어떤 풍경이었는지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고.”

“후유증이 심각한가 봐요?, 아무리 대가 없는 행위는 없다고 해도 열심히 달려온 사람한테 기억상실이라니..”

“그래서 요새 밤만 되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아주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 소중한 게 혹시 애인인가요?”

“예리하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결혼을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건데, 나는 뭐가 두려워서 아직도 벌벌 떨고만 있는지 모르겠다.”

“오래 만나셨어요?,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오래 만났지. 해가 바뀌면 8년이니까. 근데, 오래 만나고 짧게 만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

“왜요?”

“내 친구는 사귄 지 한 달 만에 결혼발표를 했어. 뭐, 알고 지낸지는 2년 정도 됐지만.”

“와.., 그런 일이 실제로 존재하나 봐요?”

“나도 듣기 전에는 믿지 않았지. 아니, 들어놓고도 몇 번을 의심을 했나 몰라.”

“형은 그래서 지금 이별 중이에요?”

“이별이면 이별이지, 이별 중은 뭐야?”

“형 표정을 보니까 깨끗하게 단념한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어떻게 한순간에 잊을 수 있겠냐..,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조용하면서도 깊은.., 그리고 진중하게 생각할 혼자만의 시간 말이야.”

“형. 혹시 노래 좋아하세요?, 형 얘기 듣고 있으니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생각나서요.”

“좋아하지. 하루에도 똑같은 노래를 수백 번씩 듣는데.”


민수는 가방에서 헤드폰과 DAP*를 꺼냈다. 생소해 보이는 휴대용 DAP라는 장비와 휴대용 AMP*를 보니 민수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민수는 들떠있는 표정으로 정완에게 헤드폰을 써보라는 시늉을 했고 정완이 헤드폰을 착용하자마자 민수는 DAP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DAP :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Digital Audio Player)의 약자.*AMP : 증폭기 (Amplifier).


*DAP :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Digital Audio Player)의 약자.

*AMP : 증폭기 (Amplifier).


그 순간, 어쿠스틱 기타의 가냘픈 선율이 정완의 머릿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도입부의 가사를 두 마디 정도 들었을 때, 정완은 동공이 확장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두 마디의 가사가 끝나자마자 정완은 쏜살같이 헤드폰을 벗고 민수에게 따지듯 물었다.


“네가 어떻게.., 민수야. 네가 어떻게 이 노래를..”

“저, 작곡도 해요. 이번에 처음으로 기획사랑 컨텍이 되어서 작곡료를 받고 이 곡을 넘겼거든요. 그 덕에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죠.”

“이거 네 목소리야?, 네가 부른 거냐고.”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까는 노래 잘할 것 같다고 칭찬해놓고 막상 들어보니까 별로예요?”


방금 정완이 들은 노래는 지난여름 정완에게 의뢰가 들어왔던 그 곡이었다. 걸그룹이 부르기로 정해져 있던 것을 무시하고 가이드보컬의 메시지에 응답하고 싶었던 염원을 가득 담아 가사를 적었던 그 곡이었다.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그 곡의 작곡가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정완은 민수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는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그동안 묻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막상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자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형, 왜 그래요?, 듣기 거북했어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아니, 미안. 다시 들을게. 다 듣고 나서 얘기하자.”


정완은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한 치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민수의 목소리와 기타 선율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노래를 다 듣고 난 정완이 헤드폰을 벗으며 민수에게 말했다.


“가사는 네가 쓴 거 아니지?”

“네. 저는 곡만 썼어요. 가이드보컬을 부탁하길래 그 정도까지는 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녹음실에서 가이드만 해준 것뿐이에요. 그 뒤로 기획사에서 다시 와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세 가지 버전으로 가사를 붙여서 편곡을 해놓은걸 들려주더라고요.”

“그걸 왜 너한테 들려줬을까?”

“모르죠. 일단은 원곡자니까 그랬던 게 아닐까 싶네요. 어차피 신인 걸그룹이 부를 노래라 첫 번째나 두 번째 노래가 선택될 것이 뻔했지만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만들었을 때 떠올렸던 느낌이 세 번째 곡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꼈어요. 마치 답례라도 받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 기획사 엔지니어한테 부탁해서 세 번째 곡으로 샘플링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녹음까지 했죠. 어디까지나 개인 소장용이지만.”

“그 가사, 내가 쓴 거라면 믿을 수 있겠어?”

“정말요?, 정말 형이 쓴 거예요?”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는 말, 그거 정말 부정할 수 없는 말 같네.”


정완은 가지고 나온 노트를 민수에게 보여주며 그 곡을 작업할 당시에 썼던 가사를 보여주었다. 노트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작곡가에게 응답하겠다던 자신의 진심을 적어놓았던 것까지 전부 민수에게 보여주었다.


“저는 곡을 만들고 가이드까지는 가능한데, 가사를 붙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나도 솔직히 작곡에도 관심이 있거든. 피아노도 칠 줄 아니까 종종 작곡을 흉내 내곤 하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 아무래도 전공이 음악계통이 아니다 보니까 아는 것도 없고.”

“저는 문학계열에 있는 분들이 때로는 너무 부러워요. 자신의 생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라던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단어를 캐치해 내는 능력이라던가, 제가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이곡의 주인공이 누굴까 정말 많이 궁금했었는데, 그게 너였다니.., 세상 참 좁다.”

“저도 이 가사를 누가 쓴 건지 무척 궁금했었어요. 어떻게 제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는지 묻고 싶을 만큼요.”


정완과 민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것들을 묻고 대답했다. 음악이라는 관심사가 동일하다 보니 대화에 막힘이 전혀 없었다. 지내온 환경도 다르고 자라온 세월도 달랐지만 통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정완은 가슴속 한 구석이 비워져 나간 기분이 들었다. 가볍고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의 방 앞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다.


“형, 혹시 내일 일정 있으세요?”

“아니, 딱히 없는데. 왜?”

“아키하바라에 갈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래, 그러자. 어차피 정해놓은 일정은 없으니까. 근데 아키하바라는 왜?”

“헤드폰 살 것도 있고 새로 나온 음향 기기들 구경 좀 하려고요.”

“뼛속까지 음악인이네. 내일 보자. 나 너무 졸려서 안 되겠다.”

“형,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뭔데?”

“그랜드 피아노가 좋으세요?, 아니면 디지털피아노가 좋으세요?”

“그랜드 피아노. 그건 왜?”

“아니에요. 내일 봬요 형. 안녕히 주무세요.”


정완은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점점 닫히는 눈꺼풀을 도저히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첫날부터 우울함에 둘러싸여 밤새 외로움에 발버둥을 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경미는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정완의 작업실에 들어와 정완이 앉던 의자에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다. 정완이 떠난 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정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울적해진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현수는 사무실 밖에서 경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 사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미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듯 말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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