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생각만으로는 전해지지 않아.
episode 21.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일몰시간도 바짝 당겨졌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눈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미세먼지로 가득 찬 도심의 가로등의 불빛들은 닦지 않은 안경을 쓴 것처럼 희뿌옇게 거리를 비췄다.
“지수야, 나 도착했어.”
“응, 금방 나갈게.”
“나올 때 마스크 쓰고 나와. 목이 칼칼하네.”
“미세먼지 때문에?”
“응, 겨울만 되면 더 심해지네.”
“집 앞인데 뭘. 조금만 기다려.”
지수의 집 앞에 도착한 병준은 지수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마스크 쓰고 나오라니까.”
“집 앞인데 뭐 어때?, 춥다. 얼른 타자.”
지수가 춥다며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자 병준은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좋은 소식이 뭔데?, 아버지가 허락해 주셨어?”
“응, 엄마도 무척 좋아하셨어. 오랜만에 엄마 웃음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근데,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좀 그렇다.”
“미국이 무슨 옆 동네도 아니고..”
“그건 알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님이잖아.”
“걱정 마. 조만간 한국에 오시기로 했어. 너 보고 싶으시데.”
“정말?, 며칟날 오시는데?, 다이어트 좀 할까?, 피부 관리도 좀 받아야겠지?”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예뻐.”
“그래도 처음 뵙는 거잖아. 첫 만남부터 밉보이고 싶은 며느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
“꾸미지 않은 모습을 봐도 좋아하실 거야 분명.”
“그래서 언제 오신대?”
“언제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어. 운영 중인 농장 주변에 화재가 크게 발생하는 바람에 잠시 대피하셨다가 집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더라고.”
“농장에 불났어?,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
“농장에 불이 난 게 아니라, 인근에 숲에서 불이 났는데 대피명령이 내려졌나 봐.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데.”
“다행이다. 아무튼 부모님 오시기로 정해지면 제일 먼저 나한테 보고해.”
“보고?, 결혼할 사이라고 벌써부터 하대하는 거야?”
“좋으면서 뭘 그래.”
“그래, 좋다.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
“어디 가서 티 내고 다니지 마. 팔불출 소리 듣는 거 순식간이다 너?”
“상관없어, 나만 좋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할 얘기는 다 했어.”
“벌써 들어가라고?, 어차피 결혼할 사이다 이거야 지금?”
“늦게 들여보내면 장인, 장모님이 안 좋게 보실 거 아니야.”
“별걱정을 다 하네. 우리 엄마는 제발 외박 좀 하고 오라고 난리다.”
“외박?, 그럼 오늘 외박할래?, 오늘 호텔홍보팀에서 연락받고 객실 촬영 다녀왔는데, 침대가 꽤 푹신푹신하더라고.”
지수는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병준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이제는 곧잘 농담도 할 줄 아는 병준에게서 조금씩 사람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어딘가 모르게 뿌듯함이 느껴졌다. 병준은 지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장난을 쳤고 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줄도 모르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2박 3일간 호텔에 머무르며 민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정완은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정완은 치바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했다.
“형. 이제 치바로 가시는 거예요?”
“응. 너는 어떻게 하려고?”
“모르겠어요. 이 근방에서 버스킹이 가능한 장소가 있나 알아보고 영상으로 기록을 좀 해둘까 해요.”
“그새 대범해졌네?, 하룻밤 사이에 눈빛이 싹 달라졌군.”
“형 덕분이에요. 서울에 가서도 연락하실 거죠?”
“당연하지. 이런 인연이 또 어디 있다고.”
“아참, 저희가 스튜디오에 갔던 날 말이에요. 그날 제가 습관적으로 영상을 찍었는데 그거 제 유튜브 개인채널에 올려도 돼요?”
“올려. 그런 희대의 명곡은 아낌없이 올려버려.”
“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 서울에 도착하면 꼭 전화하세요.”
“그래.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바로 전화할게.”
정완은 혹여나 빠뜨린 짐이 없나 객실을 두어 번 더 확인하고는 머물다 간 흔적을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했다. 로비에서 체크아웃을 마친 정완은 아쉬움이 가득해 보이는 민수에게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 보이고는 열차를 타기 위해 도쿄역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각, 퇴근을 마친 선영은 또 한 차례 만남을 위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네 번째 만남에서 좋은 기억을 갖게 된 선영은 다섯 번째 만남에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약간의 기대감마저 생겼다.
“팀장님!”
“민아 씨. 왜?”
“팀장님 앞으로 택배가 온 게 있던데, 아직 확인 안 하셨나 봐요?”
“택배?, 무슨 택배?”
“저거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선영에게 같은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직장동료가 택배 상자를 가리켰다. 그 택배의 정체는 바로 선영이 정완의 가슴팍에 밀어 넣었던 그때 그 상자였다. 낯익은 상자를 열자, 정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노랫말이 적힌 골판지와 작은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퇴근을 하려던 선영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상자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냈다. 엉성해 보이지만 깔끔하게 마감된 골판지를 꺼내 든 선영은 골판지에 적힌 노랫말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미안해 그저 하나밖에 내가 몰랐던 거야
너 떠나가던 날 피아노 멜로디에도
울고 있던 널 보았는데
울다가 내가 미웠다가 맘이 많이 아팠니
내가 못나 그랬어 힘겨운 너를 몰랐어
그저 미소만 지어달라고
미안해 하나밖에 몰랐던 날 이해해줄래
너 떠난 후에야 눈물을 알게 된 거야
바보 같은 날 용서해줘
사랑해 널 사랑해
아픔으로 너를 보낼 수는 없는 거야
이런 나를 알잖아 돌아올 이른 봄날엔
다시 너를 볼 수 있게 My Love
사랑해 널 사랑해 정말 미칠 것 같은데
너는 어디에 있니 다시 볼 수는 있니
단 한 번만 내 욕심인 거니
미안해 하나밖에 몰랐던 날 이해해줄래
너 떠난 후에야 눈물을 알게 된 거야
바보 같은 나를 용서해줄래
널 사랑해 나를 잊지 마
아무런 희망 없는 추억에도 좋았잖아
내 맘이 가득하게 너에게 전해지기를
영원히 널 지킬 수 있도록 My Love
yada 3집. <미안해> 작사/작곡: 이재혁
골판지에 적힌 가사를 읽어 내려가던 선영의 코끝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노랫말이 적힌 골판지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선영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상자에 동봉된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이 노래 기억나?, 내가 너랑 처음으로 헤어졌을 때 알게 된 노래라면서 너한테 몇 번 불러 준 적 있잖아. 자주 들려주기도 했고.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너무 아꼈던 것 같아. 미안해 죽겠으면서도 왜 나는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하면서도 왜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을까?, 너와 떨어져 있던 지난 석 달 동안 무척이나 많은 생각을 했어. 반성도 참 많이 했고. 마음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었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나 느끼고 있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똑바로 표현해야 되는 거였어. 이제야 깨닫게 된 나를 용서해줘. 그리고 나, 지킬 거야. 너랑 했던 약속도 지킬 거고, 이 노래 맨 마지막 줄에 있는 가사처럼 내 사랑도 지킬 거야. 앞으로 많이 노력할 테니까 지켜봐 줄래?, 이제는 생각하고 말하기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려고. 그게 맞는 것 같아. 그게 내 진심을 표현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으니까.
PS. 내 대답은 이거야. 선영이 네가 옳았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행복하게 해 줄게. 사랑해 선영아.
선영의 눈동자 속에서 여행에 가면 편지를 주겠다고 잔뜩 들떠있던 정완의 표정과 미처 편지를 챙겨 오지 못한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완과 마주 보고 있던 커피숍의 풍경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선영은 꼼짝도 못 할 만큼 오열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작은 휴지 조각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사무실에 남아있던 사람은 없었다. 턱끝에서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석 달 전 정완과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었던 그때와 며칠 전 정완과 다투던 그때는 다를 것이 없었다. 한바탕 눈물이 휩쓸고 간 선영의 얼굴에서 떨림이 멎어 갈 때쯤 선영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윤선영 씨?”
“네?, 누구세요?”
“뵙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안 보이시길래요.”
“죄송해요, 잔업이 있어서 이제 막 퇴근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울어요?”
“아니에요, 계속 말을 안 하고 있었더니 목이 잠겨서요.”
“회사가 어디죠?, 제가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삼성역 근처예요. 금방 갈게요.”
“제가 갈게요. 도착하면 다시 전화드리죠.”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나기로 했던 남자의 전화였다. 약속시간이 지난 것도 모른 채 울기 바빴던 선영은 재빨리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화장을 고치기에는 시간이 녹록지 않았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자에 골판지와 메모지를 다시 넣으며 호흡을 가다듬던 선영은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비슷한 시각, 오후 수업을 마친 경미는 강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책상에 엎드려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강의실에 남아 짐을 챙기던 현수는 야간수업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경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수강생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현수는 꼼짝도 않는 경미에게 다가갔다.
“경미야, 어디 아파?”
“머리가 좀 아파서.”
“약 사다 줄까?, 아니면 마실 거라도?”
“괜찮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저기, 현수야.”
엎드린 채로 대답을 하던 경미가 고개를 들며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현수에게 말했다.
“정말 네 말대로 고백을 해보는 게 좋을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아직도 고백 안 했어?, 뭘 자꾸 망설이는 거야?”
“하고 싶어도 지금은 못 해.”
“그러고 보니까 요새 정완이 형이 안 보이네.”
“난데없이 두 달 치 월세를 내놓고는 홀연히 떠나버렸어.”
“떠나?, 어디로?”
“말하지 말아 달래.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선영이 누나랑 또 안 좋은 방향으로 일이 터진 모양이네.”
“되게 힘들어 보였어. 그래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때가 기회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왜 안 해봤겠니?, 학원도 팽개쳐놓고 쫓아가고 싶었는데.”
“그 정도 각오라면 고백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그러게, 네 말처럼 이러나저러나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게 많아서 말도 꺼내지 못한 걸까?, 용기가 없어서겠지?”
“용기라고 하지 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그냥 말해. 말을 해야 알지. 안 그래?”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왜?, 왜 말 못 하는데?”
“말하면 현실이 되어버리잖아. 그 현실이 어떨지 나는 모르니까..”
현수는 어디를 보고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초점이 잡혀있지 않은 경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촉촉이 젖은 경미의 눈동자는 현수의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내 눈에는 변명만 하는 겁쟁이로 보여.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네 마음이 닿을지, 닿지 않을지 모르니까. 그게 두려워서 벌벌 떠는 것처럼 보여 지금.”
“정완 오빠를 좋아하게 돼서 때로는 슬프고 가끔은 괴로울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너무 행복해. 이런 적은 없었어.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야.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
울먹이는 경미를 바라보던 현수는 끓어오르는 본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언제까지 가슴앓이만 하고 있을 거냐고!”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고백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수천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데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일방적으로 네 소망을 강요하는 거라고!, 대단한 착각이지. 그걸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있는 너도 진짜 대단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고 있는 지금 네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강요한 적 없어. 그냥 나 혼자 좋아하겠다는데 그게 왜 한심해?”
“그럼 울지나 말던가. 아파하지나 말던가!, 왜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 우는 건데?, 왜 자꾸 날 아프게 만드는 거냐고!”
현수의 말이 끝나자 경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정완과의 거리가 좁혀졌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부터 시작된 적도 없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경미는 현수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경미는 결국, 억지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초점이 사라졌던 경미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현수를 쏘아보며 뜨거운 원망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현수가 울고 있는 경미에게 테이블에 놓여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건네자 경미가 현수의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
“동정하지 마. 시키지도 않은 짓 좀 하지 말라고!”
“동정?, 웃기는 소리 좀 작작해. 나 자신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누가 누굴 동정해?, 내 처지부터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뭐?, 동정하지 말라고?,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내 입으로 하겠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아파하면서 울기까지 하는데, 그걸 보고 있는 내 속은 멀쩡할 것 같아?”
경미는 무섭게 쏘아붙이는 현수의 한마디에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기분이 들었다. 딱히 울 일도 아니었고 감정싸움을 할 일도 아니었다. 매번 현수의 직설적인 표현에 말문이 막혀버리는 자신이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그저 감정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곱게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꼭 데자뷔 같지 않아?, 네 첫사랑을 가로챈 네 친구랑 너랑 다른 게 뭐야?, 네가 하면 정당해 보이기라도 할 것 같아?, 그냥 너는 한낱 겁쟁이일 뿐이야. 용기는 너 자신을 위해서 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내는 게 용기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현수는 도무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경미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꾹 참아왔던 본심을 또 한 번 토해낸 현수는 더 이상 경미와의 대화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현수는 의자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한편, 적막한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선영이 침착함을 되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선영 씨, 삼성역에 도착했습니다. 코엑스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죠.”
“아, 네. 금방 갈게요.”
선영은 조금 전 전화를 걸어왔던 남자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회사를 빠져나와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여깁니다. 윤선영 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커피 주문해 놓았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딱딱한 말투와 경직된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대적 우월감은 선영을 위축시켰다. 테이블에 자신의 차키와 지갑을 내려놓은 남자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묻기 시작했다.
“올해 서른이시라고요?”
“네..”
“팀장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직급이 과장인가요?, 아니면 대리?”
“과장이에요.”
“그럼 연봉이 세금 떼고, 5천은 넘겠네요?”
“직종이 그렇다 보니 5천까지는 안 돼요. 규모도 작은 회사라 직함도 별로 의미가 없고요.”
“형제는 어떻게 돼요?”
“언니가 한 명 있어요.”
“언니는 시집가셨고요?”
“네..”
진동벨이 울리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커피를 받으러 갔다. 선영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가벼운 탐색전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치 강력반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뭐, 제 인적사항 같은 건 대충 아시죠?”
“아, 네.”
“대진 투자증권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김경철입니다. 곧 마흔이고요. 수당은.., 아니, 연봉으로 따지면 1억 5천쯤 됩니다. 제 명의로 된 부동산도 제법 있습니다. 뭐, 자랑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확실하게 결혼 준비를 마친 사람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나저나 화장도 안 하시고, 약속시간도 안 지키시고. 윤선영 씨 같은 분은 처음 봤습니다.”
“죄송해요.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어서.”
“본론만 얘기하죠. 선영 씨는 결혼하게 되면 직장을 계속 다닐 생각인가요?”
“네, 일단은요.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 와이프가 될 사람이라면 직장은 다니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아기는 몇 명 정도 낳고 싶으신지?,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4대 독자라 어릴 때 외롭게 자란 게 한이 돼서요.”
“아기요?, 아기는 아직..”
“최근에 건강검진받은 적 있습니까?”
“네?, 건강검진이요?”
계속되는 경철의 공격적인 질문에 선영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선영이 곤란해하던 그때, 선영의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죄송한데,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시종일관 일관적인 표정으로 선영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경철은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선영 씨?, 이정진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오늘 시간 되면 식사 어떠세요?”
“오늘요?”
“네, 안되면 할 수 없고요.”
“아니에요, 갈게요.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요?”
“메시지로 약도 보내드릴게요. 천천히 오셔도 되니까 오늘 안에만 오세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경철과의 만남이 줄곧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선영은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자신의 바람을 정진이 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리로 돌아온 선영이 경철에게 말했다.
“저기, 제가 급히 좀 가야 할 일이 생겨서요.”
“지금 이 자리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까?”
“죄송해요. 먼저 일어날게요.”
“이봐요, 윤선영 씨!”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온 선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회사로 갔다. 가방에서 차키를 꺼내 든 선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긴박했던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선영은 정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