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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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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l 01. 2020

EP 22) 숙성의 의미. 마음이 자라나는 소리.

episode 22.


한참을 달려 정진이 보내준 주소를 찾아 인근에 도착한 선영은 주변을 살피며 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정진 씨. 저 도착했는데.., 주차장이 어디예요?”

“벌써요?, 지금 나갈게요. 거기 그대로 계세요.”


선영은 불이 꺼져 있는 주변의 상점들 사이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정진의 모습을 포착했다.


“선영 씨, 여기에요. 제가 주차해 드릴까요?”

“저, 이래 봬도 10년 무사고예요.”


선영은 정진이 가리키는 곳에 능숙하게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린 선영은 정진을 따라 계단을 오른 뒤, 외로워 보이는 미등만 켜져 있는 입구를 지나 레스토랑의 안으로 들어갔다.


평수가 그리 넓지 않은 레스토랑의 내부는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엔틱 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집기들이 곳곳에 위치해있었고 벽에는 고풍스러운 그림 몇 점이 걸려있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요리하는 중인데 조금 기다려 주실 수 있죠?”

“덕분에 살았어요. 저 물 한잔만 주세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따가 얘기하면 안 돼요?, 숨 좀 쉬고요. 여태 숨도 못 쉴 만큼 갑갑했었거든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선영에게 물을 한잔 내어준 정진이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빗소리를 쏙 빼닮은 고기 굽는 소리 레스토랑 안에 울려 퍼졌다. 고소한 버터향과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선영의 오감을 자극했다.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레스토랑의 내부를 둘러보던 선영은 다소 어두운 조명 때문에 눈에 피로감을 느꼈다. 선영은 레스토랑 내부의 조명 스위치를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면을 향해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걷기 시작한 선영은 벽면에 일렬로 장식된 수많은 즉석사진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선영은 레스토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기념사진이겠거니 하며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길게 늘어진 노끈의 매듭이 지어진 마지막 부분에 나무로 된 집게에 매달려있는 사진 한 장이 선영의 눈길을 끌었다. 사진 속에는 정진으로 보이는 남자와 애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자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선영이 사진을 보고 있던 사이에 정진은 정성스럽게 플레이팅을 마친 커다란 접시 두 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이 사진, 정진 씨예요?”

“눈썰미 좋으시네요. 근데 왜 일어나셨어요?”

“조명이 조금 어두워서요.”

“저를 부르지 그랬어요. 잠시만 계세요.”


정진은 테이블 위에 접시를 가지런히 놓고 매장 내부의 조명을 밝게 조절했다. 그리고는 선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집게에 걸려있던 사진을 빼들며 말했다.


“궁금해요?”

“지금보다는 훨씬 어렸을 때 같은데.., 정진 씨 맞죠?”


사진을 다시 집게에 매단 정진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선영을 안내했다.


“일단 식사부터 해요. 식기 전에 드셔야 맛있으니까요.”


자리에 앉은 선영은 정진의 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두툼한 고기 두 점 사이로 뚜렷한 경계선을 보이고 있는 커다란 흰색 접시에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이 경계선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예요?”

“먼저 드시고 얘기해요. 지금은 그게 순서예요.”

“먹는 방법이 따로 있어요?, 레스토랑에는 별로 와 본 적이 없어서..”

“음.., 딱히 먹는 방법은 없어요. 드시고 싶은 것부터 먼저 드시면 돼요. 소스는 입에 맞는 걸로 찍어 드시면 되고요. 위쪽에 있는 붉은색 소스는 레드와인소스고, 아래쪽에 가루로 되어있는 소스는 히말라야 핑크 솔트예요. 개인적으로 핑크 솔트를 추천하지만 선영 씨 입에 어떤 게 맞을지 몰라서 두 가지 소스를 준비했어요.”

“이 경계선이 소스였구나. 그럼, 잘 먹겠습니다.”

“원래는 와인 곁들여야 더 맛있는데, 운전하셔야 니까 와인은 다음에 해요.”


선영은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선호했지만 덜 익혀먹는 쪽은 기피했다. 조금 질기더라도 핏기가 없어질 때까지 바싹 구워진 고기가 아니라면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선영은 경계선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두툼한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리고 정진이 추천한 핑크 솔트를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속에서 퍼지는 담백함과 기분 좋은 버터향이 선영의 입맛을 저격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차올랐 육즙 또한 일품이었다. 왼쪽에 있던 고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선영은 오른쪽에 남아있는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왼쪽에 있던 고기보다 외형적으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영은 마찬가지로 먹기 좋은 크기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오른쪽에 있던 고기도 선영의 취향이었다. 먼저 먹었던 고기보다 고소함과 담백함이 배로 느껴졌지만 향신료 같은 특유의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 순간, 선영은 와인을 곁들여 먹어야 더욱 맛있다는 정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영 씨는 정말 고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너무 맛있긴 한데,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것 같아요.”

“이것도 마저 드세요.”

“정진 씨는 안 드세요?”

“저는 아까 팀원들이랑 저녁 먹었어요. 한번에 많이 내놓으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따로 준비한 거예요.”


정진이 자신 앞에 있던 접시를 선영의 빈 접시와 맞바꾸려 하자 손사례를 치며 선영이 말했다.


“반씩 나눠먹으면 안 돼요?, 저 혼자 다 먹으면 조금 민망할 것 같아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전부 선영 씨 드시라고 만든 거니까 부담 없이 드세요.”


선영은 만날 때마다 항상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정진에게 따듯함을 느꼈다. 대화를 나눌수록 솔직함이 묻어 나오는 정진의 배려가 거짓이 아님에 선영의 가슴속에 미묘한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선영은 수줍게 웃어 보였고 선영이 식사를 마치자 정진은 깨끗하게 비워진 두 개의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정진에게 선영이 말했다.


“오늘 결혼정보업체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그랬어요?, 어땠어요?”

“말도 못 꺼낼 만큼 숨이 막혔어요.”

“그래서 그랬구나.., 그나저나 선영 씨, 디저트 드실래요?”

“디저트요?”

“무알콜 모히또랑 컵케익이에요.”

“디저트도 직접 만드세요?”

“그럼요. 레스토랑 메뉴에 있는 것들이에요”

“능력자네요. 주신다면 감사히 잘 먹을게요.”

“여기 오는 손님들이 전부 선영 씨 같았으면 좋겠네요.”

“그거 칭찬이에요?”

“그럼요. 당연히 칭찬이죠.”


뽀송뽀송해 보이는 컵케익과 영롱한 빛깔의 모히또를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고 있던 선영에게 정진이 말했다.


“아까 그 사진 말이에요..”

“그 사진요?”

예전 애인이에요.”

“아, 그러셨구나. 어쩐지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선영 씨 눈에는 그게 보여요?, 행복인지, 슬픔인지.., 뭐 그런 거요.”

“당연하죠. 입이 귀에 걸려있던데. 그건 누가 봐도 행복한 거잖아요.”

“그렇죠..”

“아직 못 잊으셨어요?”

“99%는 잊었어요.”

“나머지 1%는요?”

“그게 저 사진이에요.”

“많이 좋아하셨나 봐요.”

“5년 정도 만났어요.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지내는 모양이더라고요.”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사실 오늘 선영 씨 뵙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럼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이해가 쉬울까요?”

“일단 식사 얘기부터 할까요?, 입에는 맞았어요?”

“그럼요. 한 점도 안 남긴 거 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어느 쪽이 더 맛있었어요?”

“확실히 오른쪽에 있던 고기에 신경을 더 많이 쓰신 것 같았지만, 제 입에는 왼쪽 고기가 더 맛있었어요. 왼쪽 고기는 수수해 보였지만 고기 본연의 맛이 완벽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요, 오른쪽 고기는 화려해 보였지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이어요.”

“정확하시네요.”

“왼쪽이 소고기, 오른쪽이 돼지고기. 맞죠?, 소스로 경계선을 장식한 것도 그런 이유죠?”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선영 씨는 눈썰미가 꽤 있으세요. 혹시 미식가는 아니죠?”

“미식가라뇨. 그냥 고기를 좋아하는 일반인일 뿐이에요.”

“선영 씨, 혹시 드라이에이징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드라이에이징요?, 건조 숙성이었나..”

“맞아요. 왼쪽에 있던 고기는 20일 정도 숙성시킨 소고기예요. 오른쪽 고기는 뒷고기, 주먹 고기라고 부르는 돼지고기의 부위고요. 여기 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오른쪽에 있던 고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오른쪽 고기에서 향신료 같은 특유의 향이 나는 건 왜 그런 거예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구운 통마늘이랑 팔각을 넣고 재워놓아서 그래요.”

“고기를 기름에 재워 놓기도 해요?”

“다음에 고기 구워 드실 때 식용유라도 조금 두르고 구워보세요. 훨씬 맛있을 테니까요.”

“느끼하지 않을까요?, 고기에 기름이라니..”

“전혀 그렇지 않을 거예요. 해보고 맛없으면 다시는 안 하면 되잖아요.”

“아까 팔각이라고 말씀하신 게, 그 마라탕에 들어가는 향신료 맞죠?”

“선영 씨, 저희 팀에서 일해보실 생각 없어요?, 지금 진지하게 스카우트 제의하는 거예요.”


넉살 좋게 농담을 건네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선영을 대하던 정진의 표정이 차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만났어요.”

“아까 그 사진 속에 있던 여자분이요?”

“그 친구랑 2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그 친구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그 당시 저는 욕심이 남아있었고, 그 친구는 수료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만족한 상태였거든요.”

“같이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는 저도 꿈이 있었고 욕심도 많았거든요. 한참 열정이 불타오르던 나이였으니까요.”

“맞아요. 저도 그런 때가 있었어요.

“혼자 남아서 1년 하고도 6개월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여자 친구가 보고 싶어서요?, 아니면 공부가 힘들어서요?”

“둘 다였어요. 함께 있을 때는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니까 그리움만 점점 더 쌓여가고.., 그러다 보니 공부도 전혀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그럼 애초에 같이 돌아오지 그랬어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같이 돌아갔겠죠. 한국에 돌아오니까 마땅히 취업할 곳도 없고, 취업이 잘 안 되다 보니까 매일 불평불만만 늘어갔어요.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해지니까 점점 그 친구하고 다투는 날이 많아졌죠.”

“그 부분.., 저도 공감돼요.”

“있을 때 잘하라는 말, 아시죠?, 매사에 예민하게 굴다 보니 전보다 다툼도 잦아지고 마음에 없는 말도 많이 하게 됐어요. 5년 동안 몇 번씩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났으면서도 그런 시간이 되풀이되는 동안에도 저는 소중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말도.., 진짜 공감되네요.”

“그 친구와 헤어졌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꽤 오랫동안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정말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한때는 없이는 못 살겠다고 했던 사이였으니까요.”

“헤어졌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신 거예요?”

“곁에서 매일 잔소리해주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곁에서 늘 힘이 되어주던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니까, 그 친구와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이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거 있죠?, 그런 느낌을 받게 된 이상 어쩌겠어요?, 받아들여야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뭐.”

“무릎 꿇고 빌어보기라도 하지 그랬어요.”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평소에는 가지도 않았던 지인들 모임에 갔는데, 그때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게 된 거예요.”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네요..”

“맞아요. 왜, 전에 선영 씨 처음 만났을 때, 제 취미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그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부터였어요. 마지못해 살아가는 기분이 자꾸 들어서 최대한 바쁘게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어요.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만큼 제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여가면서 까지요.”

“그래서 그렇게 취미가 많았던 거구나..”

정신없이 살다 보니 외로움도 허전함도 점점 잊혀더라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삶이 안정되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다시 사랑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들었던 시점이 불과 몇 달 전이에요.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아픔이 동반되는 걸 알면서도 사랑이 하고 싶더라고요. 근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느 내 나이가 서른여섯씩이나 되어있다는 거예요. 20대 때처럼 두근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걸 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보니까 궁여지책으로 찾아본 게 결혼정보업체였죠.”

“그랬구나..”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개똥철학인 줄은 아는데, 최소한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거요. 조건이라기보다 아픔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리는 것 같네요. 

“비슷한 아픔이라..”

“아까 드라이에이징 얘기했었죠?”

“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숙성이 되는 기간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지키지 않으면 숙성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빨리 숙성시키고 싶은 욕심에 온도를 올리거나 습도를 줄여버리면 숙성이 되기는커녕 상해버리잖아요?, 지킬 건 지켜가면서 맛있게 숙성이 되기를 시간에 맡겨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숙성이라..,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과정이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서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에 대해 이해하기가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까지 정진 씨랑 비슷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직까지는요. 그러니까 열 번도 넘게 만남을 가진 거겠죠. 그나저나 선영 씨는 왜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어요?”


정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선영은 당황했다. ‘결혼이 하고 싶어서요.’라고 당당하게 말을 꺼내지 못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던 것일까. 주저하는 선영에게 정진이 말을 이어갔다.


“선영 씨는 그런 사람 없었어요?, 최근에 헤어진 게 언제예요?”


선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정진이 솔직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았기에 자신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실은, 얼마 안 됐어요. 솔직히 결혼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을 하긴 했는데,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만났는데요?”

“7년이요.”

“결혼이 하고 싶은 이유라면.., 역시 그 문제로 다투신 거군요?”

“네, 뭐..”

“그래서 아까 제 얘기에 공감했던 거예요?,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오늘 택배를 받았어요. 언제 온 건지도 모르는 택배가 와있더라고요.”

“택배요?

택배를 열어보니까 남자 친구가 쓴 편지가 들어있었어요.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을 줄 알고 그 편지를 읽었는데 눈물이 나는 거 있죠?, 그래서 화장도 다 지워진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맨얼굴이셨구나.., 그래도 예쁜데요 뭘.”

“솔직해지세요. 다른 때는 참 솔직하시더니..”

“저는 선영 씨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제가 찾던 사람인가 싶었어요. 드디어 만났구나 싶었는데.., 선영 씨는 제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네요.”

“왜요?”

“헤어진 남자 친구가 없는 빈자리를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 건 아니죠?”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울었다면서요. 지금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부터 나죠?, 진심으로 끝났다고 생각해본 적 없죠?, 진심으로 끝이 난 거라고 받아들였다면 선영 씨처럼 안 그래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버린다고요. 뒤도 안 돌아보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랑 결혼해버린다고요.”


선영은 애써 부하고 있었지만 반복되는 정진의 일침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코끝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정완과 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말은 그렇다고 했을지언정, 손끝에 정완과의 추억이 닿기라도 하는 날에는 몇 번씩이나 그때를 회상하며 가슴 아파했고, 아파하는 가슴으로 정완을 움켜쥐었다. 선영은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단 하루라도 정완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는 것을.


“선영 씨. 사람들은 왜 사랑에 리스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아세요?”

“왜요?”

“사무치도록 외로운 날에 누군가가 나를 좀 안아주었으면.., 미치도록 괴로운 날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따듯한 위로를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라나기 때문이에요. 저는요, 마음이 자라나는 소리를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이에요. 사랑하고 싶다는 내 안의 소리를요.”

“마음의 소리요?”

“네. 선영 씨가 힘들 때 선영 씨를 안아주었으면 하는 사람, 선영 씨에게 따듯한 위로를 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남자 친구요..”

“거 봐요. 선영 씨, 사랑이라는 건 말이에요.., 너무 가까워도 보이지 않는 거고요, 너무 멀어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을 때 부정하지 말고 미루지 마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대는 아니니까요. 어중간하게 인생을 살다가 혹시라도 죽음과 마주했을 때.., 굉장히 억울하고 창피할 것 같지 않아요?, 지금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한번 깊게 생각해보세요.”


정진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선영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천천히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는 선영에게 정진은 티슈를 가져다주었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잘 생각해봐요. 그게 그냥 단순히 서운하고 속이 상해서 흐르는 눈물은 아니잖아요?, 제가 볼 때는 미련 같아요.

“미련이요?”

“겪어본 사람으로서 조언 하나만 더 할게요.”

“네..”

“아직 사랑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쉽게 놓지 마세요. 안 그러면 처럼 후회할지도 모르니까요.”

“죄송해요. 이러려고 온건 아닌데..”

“먼저 얘기 꺼낸 건 저예요. 선영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오히려 자신에게 솔직해진 선영 씨를 보니까 왠지 뿌듯한데요?”


정진은 선영이 눈물을 모두 덜어낼 때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같이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있는 흉터가 생기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선영의 눈물이 멎기를 기다려줄 뿐이었다.


“고마워요, 정진 씨.”

“저도 고마워요. 덕분에 그 친구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네요.”

“그리고 죄송해요..”

“선영 씨, 늦지 않았어요. 어서 가보세요.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정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한 선영은 자신의 차량에 탑승하기 전, 정진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선영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소를 유지하던 정진은 선영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한시라도 빨리 잡기를 바랐다.


선영은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무작정 정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텅 빈 것 같았던 머릿속과 구멍이 크게 뚫려있는 것 같았던 가슴속에는 여전히 정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흘렸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 선영은 그동안 자신과 정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촘촘히 떠올렸다. 변해버린 것은 단지 자신의 바람뿐이었음을 눈치챈 것일까. 지금까지 정완은 변함없이 자신의 생각을 선영에게 표현해왔다. 그런 정완의 입장을 헤아려주고 정완의 감정마저도 함께 나누어갖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본인이었음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선영은 자신의 바람이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있는 힘껏 핸들을 움켜잡았다. 힘이 들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힘이 들 때 곁에서 가장 먼저 정완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말했던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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