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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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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l 01. 2020

EP 23) 놓치고 있는 것. 잃어버린 것.

episode 23.


정완의 작업실이 있는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선영은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의 문을 망설임 없이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완의 작업실의 문을 열어본 선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완의 작업실 의자에 경미가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미 씨?”


놀라기는 경미도 마찬가지였다.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질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에 낯선 여자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아연실색할 만큼 크게 놀랐다.


“어머, 선영언니. 웬일이세요?”

“정완이 어디 갔어요?”


선영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정완이 신신당부한 대로 모른다고 잡아떼려 했지만 경미는 용기를 내야겠다는 결심이 이미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정완 오빠, 일본 갔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언니한테는 꼭 말해줘야 할 것 같네요.”

“언제요?, 누구랑 갔는데요?”

“며칠 됐어요. 혼자 갔고요.”

“정완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데요. 무지 힘들어하는 얼굴로요.”

“언제 온다고는 말 안 해줬어요?”

“그건 저도 몰라요. 때가 되면 오겠다고 했어요.”

“네.., 고마워요 경미 씨.”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선영이 허탈한 걸음으로 작업실을 나서려는 순간 경미가 말했다.


“언니한테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알려준 거 아니에요.”

“네?”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경미는 무언가 결심한 것 같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 오빠랑 언니가 헤어졌을 때도, 저는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잠시만요. 저기, 경미 씨..”

“줄곧 반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어요. 정완 오빠의 옆자리는 항상 언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요.

“반칙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수 언니가 어떤 목적으로 저를 여행에 데리고 갔는지 알면서도 저는 그 여행에 따라간 거였어요.”

“이제 와서 그 얘기를 왜..”

“정완 오빠를 좋아하니까요. 저, 정완 오빠 많이 좋아해요.”


선영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백을 하지도 않은 경미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며 지수에게 따져 물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 당시 선영은 경미의 마음을 단순한 호감정 도로만 여겼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크게 벗어난 경미의 진심을 알게 되니 무척이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이제는 반칙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정완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절대로 언니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언니랑 정완 오빠는 명백히 남이잖아요?”

“경미 씨..”

“저, 고백할 거예요. 정완 오빠가 돌아오면 고백할 거예요.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언니 눈치 안 볼 거예요. 제 감정을 꽁꽁 숨기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요.”


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지금, 선영은 당장 정완을 자신의 눈앞에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정완은 그곳에 없었다. 선영은 걷는 것조차도 힘에 부칠 정도로 풀려버린 다리를 이끌고 겨우겨우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왔다. 시동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선영은 한동안 자신의 차량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던 정완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고소공포증이 있는 정완이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혼자가 된 정완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을까. 선영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을 온 힘으로 부정하려 했다.


선영이 사무실에서 나간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사무실의 불을 모두 끈 경미는 사무실의 문을 잠갔다. 아직도 건물 앞에 주차된 선영의 차를 한번 흘겨보고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고 나니 한결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횡단보도에 멈춰 선 경미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정완과 함께 맥주를 마셨던 건물의 옥상을 바라보았다. 지난여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작은 감정은 더 이상 경미의 마음속에 가두어둘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자라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고 있는 지금 네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현수가 사무실을 나서기 전, 경미에게 했던 그 말이 경미의 감정을 봉인했던 쇠사슬을 끊어준 셈이었다. 용기는 본인이 아닌 타인을 위해 내는 것이라던 말도 일조했다. 경미는 집에 돌아와 잠이 들기 전까지도 현수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뭉뚝해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며칠 후, 치바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머물고 있던 정완은 가벼운 짐만 챙기고는 외출 준비를 했다.


“경화야, 이 근처에 뭐 구경할 것 좀 없어?”

“많지. 왜?

“집에만 있으니까 따분해서. 상일이 형은 가게 나가셨나?”

“재료 사러 갔어. 정 심심하면 가게 일이나 좀 도와. 가게에 자주 놀러 오는 일본 친구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번역기 돌려가며 그게 무슨 짓이냐.., 그냥 바람이나 좀 쐬다 올게.”

“선영이 때문에 그래?, 니들은 어째 매번 그런 식이냐.”

“그러게나 말이다. 어렸을 때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싸워놓고, 나이가 드니까 현실이랑 씨름을 하고 있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복잡한 건 없어. 단지 내가 준비가 덜 된 느낌일 뿐이야.”

“무슨 준비?, 평생 준비만 하다가 고독사 하려고?”

“인생이 고달프기만 해서 그런지 미래를 생각하면 자꾸 불안해져.”

“너, 선영이 못 믿어?, 선영이가 그렇게 못 미더운 애냐고.”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선영이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놀고 있네. 나는 뭐 잘났다고 일본까지 와서 살고 있는 줄 알아?”

“네가 일본을 좋아하니까. 상일이 형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이고.”

“그래. 그냥 생각하고 있는 게 비슷하니까. 그래서 온 거지 인생 별거 있냐?, 피해를 주네 마네 그런 생각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야?”

“생각의 차이겠지. 그나저나 결혼은 안 하고 동거만 할 거야?”

“나는 결혼하기 싫다고 했고, 상일 오빠는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타협했지. 동거하기로.”

“참 쉽다..”

“인생은 한 번뿐이야. 여러 번 살 수 있다면 한 번은 이렇게 살아보고 한 번은 저렇게 살아볼 수 있겠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피곤하기밖에 더해?”

“나 지금 되게 피곤하게 살고 있는 거야?”

“응, 아주 많이. 그리고 몹시, 매우.”

“네 얘기 들으니까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나갔다 올게.”

“알았어. 너무 멀리 가지 마. 내 친구가 국제미아가 됐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엄청 창피할 것 같으니까.”

“알았어. 그냥 이 주변만 걷다 올게.”

“해지기 전까지는 돌아와. 저녁 먹어야지.”

“알았어. 다녀올게.”


인근에 있는 공원에 도착한 정완은 한가로이 공원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넓고 큰 공원을 걷던 정완은 호수가 훤히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앉아 노트를 펼쳐 든 정완은 생각나는 것을 노트에 기 시작했다. 생각을 하고 적는 것이 아닌, 생각나는 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또 적었다. 정완은 노트에 적은 글귀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열하는 것에 특별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보다 비교적 쾌적하고 포근했기 때문일까. 매년 겨울이면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서울은 얼마나 추워졌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호수 위로 새빨간 노을이 내려앉자 뒷짐을 지고 호숫가 주변을 걷던 정완은 귀가를 서둘렀다. 부산스러운 바람이 건조해진 땅바닥에 멋대로 쌓여있는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쌀쌀함이 묻어나는 초겨울의 입김이 정완의 얼굴을 할퀴듯 스쳐 지나갔지만 춥지 않았다.


“경화야, 나 왔어.”

“얼른 와서 앉아. 안 그래도 막 저녁 만드려던 참이었으니까.”

“상일이 형은?”

“집에 잠깐 옷 갈아입으러 갔어. 거기 앉아 있어, 간판 좀 들여놓고 올게.”

“벌써 문 닫아?”

“겨울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온 상일과 간판을 들여놓고 오겠다던 경화가 함께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


“오빠, 이것 좀 테이블로 옮겨줘.”

“어묵 나베네. 정완이는 나베요리 좋아해?”

“그럼요. 안 그래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났었는데.”

“잘됐다. 경화가 스키야키 먹고 싶다고 해서 조금 전에 장 봐왔거든.”


상일은 휴대용 가스버너를 켜고 어묵이 들어있는 나베를 얹어놓은 후, 불 조절을 했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한 개 더 들고 온 경화는 테이블 한편에서 스키야키를 만들었다.


“정완이 너, 요새도 술 안 먹어?”

가끔 맥주 한 캔 정도는 먹어.”

“무슨 낙으로 사냐, 재미없게.”

“술을 마셔야 재밌나 뭐. 알잖아?, 술 안 먹어도 먹은 사람보다 잘 노는 거.”

“하긴.”


익숙한 듯 글라스에 술을 따르고 있는 경화를 보고 있던 정완이 상일에게 말했다.


“형. 경화가 저렇게 술 마셔도 아무렇지 않아요?”

“먹고 싶은 거 먹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있나?, 게다가 항상 내가 옆에 있으니까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고.”

“두 사람은 진짜 천생연분이네요. 털털한 걸로 치면 지구 최강인 것 같아요.”

“털털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일종의 배려지.”

“그게 무슨 배려예요?, 건강에 신경 쓸 나이잖아요. 병이라도 나면 그땐 어쩌려고요?”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해도 병이 나는 법이야. 더 나이 먹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경화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

“뭐, 두 사람 일이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더 얘기하면 머리가 아파질 것 같요.”


정완과 상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안 들리는 척하며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경화는 잘 구워진 야채와 고기를 접시에 덜어냈다.


“이거 먹어봐. 날달걀에 푹 담가서 먹어.”

“응, 잘 먹을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야?”

“왜?, 공짜로 숙식하고 있다고 눈치 주는 거야?”

“인생 낙오자 같은 소리 그만하고. 선영이 만나러 안 가냐고.”

“만나면 뭐하냐.., 또 결혼 얘기 나오면 지지고 볶다 헤어질 텐데. 이젠 그러기 싫다.”

“당장 돌아가기 뭐하면 선영이랑 여행 왔을 때 같이 갔던 곳이나 한번 둘러보던지.”

“갑자기 왜?”

“둘이 왔을 때랑 혼자 왔을 때의 차이점을 느껴보라는 거야.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지나쳐버린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확인이 되겠냐..”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한번 가보라는 거야. 느껴지는 게 있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어차피 언제 돌아갈 거라고 정해놓은 것도 아니라면서.”

“이제 와서 그게 의미가 있을까?”

“이번 생에서 여자는 선영이뿐이라며?, 그 한 명뿐인 여자를 그냥 방치해 둘 거야?, 그러다 다른 놈이 채가기라도 해 봐.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해 봐라. 아마 네 성격이라면 당장 일본으로 귀화 신청하고도 남을 거다.”

“그러게, 그 생각까지는 안 해봤네. 다른 남자랑 결혼이라도 해버리면 그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낸들 아니?, 네가 찾아야지. 그리고 정 잊지 못하겠으면 새겨. 나처럼 레터링으로 새기던지, 아니면 마음에 새기던지.”


경화가 자신의 팔을 걷어 올리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타투가 보였다. 그것을 본 정완은 신기한 듯 쳐다만 볼 뿐이었다.


“안 아팠어?, 길게도 썼네.”

“왜 안 아팠겠어?, 뻘겋게 부풀어 올라서 화끈거릴 때마다 긁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지.”

“이다음에 더 나이 먹으면 후회할 것 같지 않아?”

“지금 후회하는 것보단 낫지. 이 레터링은 내가 예전부터 마음에 새겨두고 있던 말이야. 마음에 새겨놓으면 언젠가는 잊어버릴까 봐 팔에다 새긴 거고. 언제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젠 잊어버릴 일이 없지.”

참 자유로운 영혼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너의 거침없는 행동들이 부러웠어.”

“나는 칼같이 맺고 끊는 네 성격이 더 부럽던데?”


서로를 부러워하는 정완과 경화를 번갈아보던 상일은 참지 못하고 그만 코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이거 비웃은 거 아니다. 그냥 코가 간질거렸을 뿐이야.”

“오빠, 지금 우리 무시해?”

“형, 말로 하시지 왜 비웃고 그래요.”

“아니라니까 참.”


정완에게 상일을 소개해주던 그때도 그랬다. 경화는 상일에게 거침없이 애정표현했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선영에게 정완은 그저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미국 친구라는 말만 거듭 되풀이했다.


“정완아. 형도 경화가 하는 말에 동의해.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면 끝났다고 순순히 인정하면 되고, 만에 하나 뭔가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 일말의 가능성을 되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인생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상일의 말이 끝나자 경화가 정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붙들어. 행복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잊혀지지만 불행했던 시간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고 네가 말했었잖아?, 오빠나 나나, 너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딱 그거야.”


정완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생각에 잠겼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소리 내어 웃었다. 일본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화와 상일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싫어했지만 선영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정완은 선영을 생각하는 마음의 깊이를 재보고자 싶어 떠났던 여행이었음을 실감했다. 산들바람에 바짝 말라버릴 정도로 얕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깊이를 측정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경화와 상일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정완은 4년 전 그때로 돌아가 선영과 함께 떠났던 여행지를 돌아보며 선영과 함께했던 그 시절을 더듬어 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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