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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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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l 08. 2020

EP 25) 서서히 치닫는 깨달음.

episode 25.


사무실을 나서던 지수는 ‘왜, 하필 오늘일까’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로 그때, 지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응, 병준아. 나 지금 집에 가려고.”

“정완이는 만났어?”

“아니, 못 만났어.”

오늘도?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찾아가도 없고. 도대체 얘는 뭐 하자는 거니.

아 맞다. 우리 직원이 오늘 인터넷 기사를 하나 보여줬는데, 신기한 걸 발견했어.

“무슨 기사?”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영상을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영상을 보니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가 나오더라고.”

“멜로디?”

“응.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아무래도 정완이 같아서.

“정완이?, 어디서 찍은 건데?”

“그건 나도 모르지. 기타를 치는 사람도 누군지 모르겠고. 아무튼 뒤에서 큰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꼭 정완이 같길래.”

“그 영상, 지금 볼 수 있어?”

“내가 메시지로 링크 보내줄게. 네가 한번 봐봐, 정완이가 맞는지.”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지수는 병준이 보내준 링크를 눌러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이 시작되자 지수의 귀에도 낯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멜로디보다 가사를 집중해서 듣던 지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남자가 정완이라고 확신했다. 영상이 끝나자 지수는 곧장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영아. 지금 어디야?”

“이제 퇴근하려고. 요새 맨날 야근이야.”

“잠깐 만나자.”

“다음에 보면 안 돼?, 너무 피곤해서.”

“잠깐이면 돼. 청첩장도 줘야 하니까 만나자. 너희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릴게.”

“꼭, 오늘이어야 해?”

“응. 오늘 꼭 만나야 돼.”


연말이 돌아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강도 높은 야근을 버텨내는 것이 점점 힘에 부쳤던 선영은 해가 바뀔 때마다 때때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바짝 익은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선영은 책상에 잔뜩 어질러진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퇴근을 했다. 운동화로 신발을 갈아 신은 선영은 차를 몰아 지수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요즘 너무 바빠서.”

“너, 정완이 만나러 갔었다며?”

“어떻게 알았어?”

“낮에 청첩장 주러 정완이 작업실에 갔는데, 경미가 말해주더라고.”

“그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피곤해지네..”

“정완이 지금 어디에 있어?, 너는 알고 있다며?”

“일본에 있데.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고.”

“일본?, 팔자 좋네. 고소공포증도 있는 애가 무슨 일본까지 가서 은둔 중이라니?”

“청첩장은?”

“경미가 정완이한테 고백할 거라던데, 괜찮아?,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지수야.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으니까 그만하고 청첩장이나 줘.”


지수는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선영에게 건넸다. 청첩장을 받아 든 선영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청첩장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씩이 접어보기도 하고 펼쳐보기도 했다.


“부를 사람도 별로 없어서 그냥 심플하게 만들었어.”

부럽다. 네가 시집을 갈 줄이야.., 그것도 나보다 빨리 갈 줄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청첩장 말고 중요한 게 또 있어?”


지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바뀌어있는 선영에게 낯선 남자와 함께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정완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었다.


“얘 정완이 맞지?, 피아노에 앉아있는 남자 말이야.”


지수가 보여주는 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선영은 한눈에 그 남자가 정완임을 알아차렸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 정완의 모습을 본 선영은 영상이 끝날 때까지 정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래 좋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이런 느낌이라니?”

“왜, 그때 여행 갔을 때 있잖아. TV에서 정완이가 작사에 참여했다는 그 노래 얘기할 때. 그때, 경미 씨가 했던 말 생각나?, 정완이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걸 들었다면서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잖아.”

“그랬나?, 그나저나 경미 걔도 진짜 보통 아니다.”

“그때 경미 씨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 마치 어렸을 때 선생님 앞에서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어린아이 같았으니까. 잔뜩 기대하고 수줍어하는 표정이 딱 그래 보였어. 경미 씨가 그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이거 정완이 맞지?”

“뭐 하러 자꾸 물어봐. 대충 봐도 정완인데.”


다시 한번 영상을 재생한 선영은 시큰거리는 콧등 사이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이렇게라도 정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던 것이었을까.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지만 볼 수 없다는 현실에 불안던 것이었을까.


선영이 정완의 영상을 한번 재생하려 하자 지수가 휴대폰을 뺏어 들고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


“선영아. 요새도 결혼정보업체에서 연락 와?”

“아니, 더 이상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하겠다고 했어.”

“잘했어. 내가 봐도 그건 진짜 아니었어.”

“맞아. 내가 억지 부렸던 거야. 내 이기심 때문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정완이만 탓했던 내가 정말 한심하더라. 왜 그런 일에 오기를 부렸던 걸까?”

아직도 결혼하고 싶어?”

“당연하지. 결혼이 하고 싶어서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던 거잖아. 근데, 그 사람들한테 자녀 계획 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대로 대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때 느꼈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아기 아빠는 반드시 정완이어야 한다고. 훗날 내가 찍게 될 내 가족사진에는 나와 정완이가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이제야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지수야. 정완이는 언제쯤 돌아올까?, 어떤 마음이 들어야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될까?”

“걱정 마. 조만간 돌아올 거야. 정완이도 분명 너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불안해하지 마 선영아.”


카페를 나선 선영과 지수는 인근의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지수가 개찰구를 통과하자 선영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지수를 바래다주는 동안에도,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선영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정완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영상을 반복해서 보던 선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정완이 작사한 그 노래에 답가라도 하듯 영상에 댓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네가 항상 머물던 그곳에 가봤어.

또 며칠 전에는 마지막으로 너와 마주 보고 있던 그곳에 가봤어.

그리고 오늘, 드디어 너를 만나게 되었어.


그때, 조금만 더 크게 울어 볼 걸 그랬나 봐.

혹시라도 그랬다면, 네가 나를 잡아주지 않았을까?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멈추지 않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봤는데

오라는 너는 오지 않고 바람만 불더라.

 

잊지 못했다면 그건 추억이 아니겠지?

잊지 못한 거라면 그건 아마도 그리움이겠지?

반짝이는 것만이 추억은 아니었어.

살아있는 매 순간이 반짝이고 있었다는 걸

잠시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해.


아직도 나는 네가 그리운가 봐.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하나 봐.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추억이

지금도 나를 울리고 있으니까.


생각나는 대로 적은 댓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영은 댓글을 수정하지 않았다.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정완의 메시지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루라도 빨리 정완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소망하며 눈꺼풀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정완과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을 떠올리고 그리워했다.  


그 무렵, 도쿄타워에 도착한 정완은 선영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곳부터 차근차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련해진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 시절을 떠올려 본 정완은 커다란 감정이 밀려오기를 기대했지만 허전함과 쓸쓸함 외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선영이 없는 빈자리만 체감할 뿐, 선영을 향한 마음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다. 이어서, 아사쿠사에 위치한 신사로 이동한 정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4년 전 그때의 기억을 소환했다. 하지만 신사의 주변에 늘어선 상점가에서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선영과 옆에서 선영의 미소를 사진에 담고 있던 자신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정완이 신사를 둘러보고 출구로 나올 때까지 이렇다 할 감정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았다. 신사를 떠나기 직전 출구 앞에 있던 기념품 상점을 발견한 정완은 문득, 기념품 매대에서 신중하게 부적을 고르던 선영의 진지함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때 그 시절, 선영이가 진심으로 바라고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와 명예, 건강과 결혼에 관련된 부적을 손에 쥐고 뿌듯해하던 선영의 표정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정완은 선영의 표정을 선명하게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언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음은 분명했으나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가족들의 안녕과 자신들의 미래에 축복만이 스며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이튿날. 시부야의 하치 동상 앞에 도착한 정완은 사진을 찍어달라며 어리광을 부리던 선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장난기 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해맑게 웃던 선영의 순수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스크램블 교차로를 오가는 수 백 명의 인파 속에서도 정완은 단번에 선영을 찾아낼 수 있다며 호기를 부리자신의 모습도 떠올렸다. 교차로의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정완은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혹시라도 깨달음이 찾아올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어제와 같은 일반적인 감정들이었다. 힘없이 교차로를 건너는 정완의 옆으로 허전함과 쓸쓸함 그리고 외로움과 그리움이 차례로 지나쳐갈 뿐이었다. 


‘지금 선영이는 그때처럼 화창한 미소로 활짝 웃을 수 있을까.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완은 교차로를 건너며 선영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여운이 긴 아쉬움에 허탈해하던 그때, 일본에 왔으면 꼭 한 번은 먹고 가야 한다는 선영의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던 규카츠 전문점이 떠올랐다. 정완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편식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정완은 고기보다는 생선을 더 선호했다. 건너편 모퉁이를 돌아 규카츠 전문점에 도착한 정완은 4년 전 그때처럼 선영이 주문했던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정완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문 너머로 사방팔방으로 복잡한 길이 연결된 상점가의 중심부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엇을 떠올려도 온통 선영과 함께했던 추억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중심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추억들 사이사이에는 선영이 존재했다. 자신의 머릿속과 쏙 빼닮은 상점가를 바라보던 정완은 음식이 나오자 맛과 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식사를 했다. 허기진 뱃속은 음식으로 채워졌지만 허기진 가슴속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가게를 나와 곧바로 숙소를 잡은 정완은 혹시라도 술을 마시면 텅 비어있는 자신의 가슴속을 무언가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화려한 불빛이 사정없이 번쩍이는 시부야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정완의 숙소에는 긴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정완이 기대했던 감정들은 도무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정완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며 4년 전의 기억 속에 머물러보았지만 깨달음은 끝끝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빈방에 메아리치는 서른 살 남자의 흐느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다음날. 정완은 퇴실을 준비할 때부터 어쩐지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듯한 이 행위를 중단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혹은 겨우 찾아낸 깨달음에 크게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숙소를 나설 때까지 갈등을 하던 정완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자신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정완은 그 노트를 한번 펼쳐보고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하라주쿠에 도착한 정완은 선영과 이동했던 경로를 떠올리며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 길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점가로 향했다. 왼손으로 정완의 손을 꼭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크레페를 먹던 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티셔츠에 묻은 줄도 모르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행복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그때의 선영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정완의 손을 잡기도 하고 정완의 팔짱을 끼기도 했던 선영의 얼굴이 떠오르자 정완의 가슴은 조금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완은 다케시타 거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초입으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깨달음은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보다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다음 행선지인 이케부쿠로로 향하려던 그때, 길 건너에 있는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신사로 향하던 정완이 신사의 입구에 발을 딛자, 비로소 놓쳐버린 기억의 한 조각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산해 보이는 신사의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테미즈야*였다.


테미즈야 앞에 선 정완의 머릿속에 4년 전 그때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초행길인 정완이 보기에는 한국의 약수터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히샤쿠*에 물을 담아 마시려는 정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선영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시늉만 하는 용도라며 자신을 창피해하던 선영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정완입가에 어느새 오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테즈미야 신사를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곳.

*히샤쿠 물을 뜨는 기다란 국자 모양의 도구. 


그 당시 정완은 참배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종의 의식 같은 행위쯤으로 가볍게 넘겨짚어도 될 일이었지만 정완은 선영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며 선영이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오늘, 정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히샤쿠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에 가볍게 물을 흘려 손을 씻어내며 입을 헹구는 시늉을 했다. 왠지 모르게 그동안 쌓였던 피로감과 불쾌함, 긴장감 같은 것들이 조금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완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신사의 내부에 깔린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곧, 선영이 신사의 중앙에 위치한 제단에서 동전을 던지고는 박수를 두 번치며 합장을 하고 무언가를 기원하던 그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완이 슬며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작은 나무판에 각자의 소원을 적던 정완과 선영의 모습이 펼쳐졌다. 정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겠다 옥신각신하던 자신과 선영의 표정에서 지나쳐버린 기억의 한 조각을 찾은 것 같았다. 그 시절 작은 나무판에 선영과의 영원한 사랑을 적었던 것을 떠올린 정완은 선영과 헤어진 지금의 상황과 겹쳐보았다. 영원한 사랑을 간절히 빌었음에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정완은 일본어로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허무맹랑한 결론을 내리고는 신사의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 등에 바싹 붙어 앉아서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적었던 선영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때, 조용히 경내를 가로지르는 일본 전통혼례의 행렬이 정완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들의 행렬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과 지나쳐버린 것을 동시에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영이는 왜 일면식도 없는 이국땅의 남녀가 혼례를 치르는 것을 보고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을까.’ 


‘어째서 자신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결혼식 눈물까지 흘려가며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일까.’


그 시절, 결혼에 대한 이상향이 남달랐던 선영에게 국적이나 대상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그저 그들의 앞날에 비단결 같은 행복과 눈부신 축복이 깃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앞날에도 같은 결과가 드리우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선영은 창피함을 잊은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축복하며 갈채를 보냈고 부끄럽다는 것을 망각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려가며 그들의 앞날을 열렬히 응원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정완은 단지 직업적인 반응 정도로 여겼다. 웨딩플래너로서 누구보다 결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일 것이라며 선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아마도 그때 선영이는 그 나무판에 결혼에 관한 자신의 바람을 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혼을 꿈꾸던 선영이의 바람을 우연히 누군가가 들어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지난여름, 선영과 헤어지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 정완의 눈앞에 펼쳐졌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염원하던 선영의 진심 어린 눈빛과 자신을 노려보던 원망 어린 눈빛이 동시에 떠오르자 정완의 눈에서는 어느새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영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눈물이었다.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가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눈물이었다. 텅 비어있던 가슴에 깨달음이 넘치도록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정완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전통혼례가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오자 정완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때의 선영과 똑같은 얼굴로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며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전통혼례가 끝나자 근처의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은 정완은 나무로 된 벤치에 앉아 자신의 노트를 펼쳐보았다.


-놓치고 있는 것. 지나쳐버린 것. 일말의 가능성.-


자신이 적어놓은 메시지를 집중해서 보던 정완은 자신에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깨달음을 의심할 겨를도 없이 곧장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하려 했다.


-일말의 가능성.-


그러나 정완은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결국 이케부쿠로와 우에노를 샅샅이 돌아보며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관한 조각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놓치고 있는 것과 지나쳐버린 것들을 한 톨이라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완은 끝내 귀국을 하루 미루고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을 예매했다.


다음날. 이케부쿠로에 도착한 정완은 선영을 온종일 설레고 들뜨게 만들었던 부엉이 카페를 찾아갔다. 부엉이의 모형부터 살아있는 부엉이까지 접해본 정완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 찬 선영의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선영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오르자 정완 역시 선영과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우에노를 거쳐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했다. 정완은 공항으로 출발하는 지하철 안에서 일본에 머무는 동안 노트에 적어두었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감정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났을 때쯤, 이제야 뿔뿔이 흩어져있던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온종일 정완을 따라다니던 허전함과 쓸쓸함. 정완을 울게 했던 외로움과 공허함. 정완을 웃게 했던 기쁨과 환희. 그리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그리움과 애틋함. 정완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들 모두가 하나의 깨달음이었음을 실감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정완은 탑승수속을 마치기도 전에 결론부터 내렸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끝을 보기에는 아직도 간절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는 결론을 말이다.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 안에서 정완은 눈을 꼭 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찾아낸 자신의 깨달음이 선영에게 닿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부디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부디 자신과 똑같은 감정이기를 몇 번씩이나 빌었다. 일본에 있는 신이 아니라면 한국에 있는 신,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바람이 선영에게 닿을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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