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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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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l 04. 2020

EP 24) 꽃. 이름을 불러도 꽃이 되지 않는 사랑.

episode 24.


뉴스에서는 산간지방 곳곳에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년보다 춥지 않았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 100년 만의 한파, 관측 이례 최초라는 수식어들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기온은 여전히 수은계의 밑바닥을 맴돌았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외로움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쓸쓸함과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머물고 있는 감정이었다. 쓸쓸하지 않기를, 외롭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언제나 그래 왔듯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다.


연말이 되어서야 병준의 부모님이 한국에 도착했다. 병준의 부모님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지수는 병준과 함께 병준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지수의 부모님을 함께 만나 정식으로 상견례까지 마쳤다.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자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혼수와 예물 같은 겉치레는 간략하게 하기로 했고, 결혼식 또한 작고 조용하게 치르기로 양가 간의 협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병준과 지수는 청첩장을 주문하고 예식장을 예약했다. 남은 것은 결혼식밖에 없었다.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친 병준의 부모님은 돌아올 2월을 기약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선영의 아버지는 무사히 용종 제거 수술을 마치고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혼자서 식사를 하는 것도,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도 아무런 제약이 없을 만큼 일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남을 가져오던 선영은 다섯 번째 만남 이후, 더 이상 그런 자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업체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 회사의 업무에 집중하며 하루빨리 정완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경미 역시 선영과 비슷한 심정으로 정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미는 매일 퇴근하기 전, 정완의 작업실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청소를 마치면 정완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자신의 카메라에 담겨있는 정완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그때를 그리워했다. 정완이 일본으로 떠난 이후 작업실에는 언제부터인가 라벤더 향이 짙게 배어있었다.


정완은 경화와 상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도쿄로 출발했다. 치바를 떠나기 전, 정완은 선영과 함께했던 그때를 회상해보기로 결심했다. 머릿속에 압축해둔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풀어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정완은 도쿄타워를 시작으로 아사쿠사의 신사를 거쳐 시부야, 하라주쿠, 이케부쿠로, 우에노까지 그때와 똑같은 순서대로 둘러보기로 했다. 경화와 상일의 말처럼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지나쳐 버린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그날 이후 경미에게 한마디 말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미가 먼저 말이라도 걸까 싶어 수업이 끝나면 누구보다도 강의실을 빠르게 나왔다. 하지만 밤마다 아려오는 가슴 한구석을 달래주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지난달부터 현수는 수강료 납부일이 다가오자 이번 달까지 학원을 다녀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매일 고민을 하던 현수의 마음속 저울은 더 이상 경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자, 학원을 그만두어야겠다는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일찍이 그만두었어도 될 상황이었지만 학원을 핑계로 경미를 만나고자 했던 일념이 현수의 발목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경미의 마음을 여러 차례 두드려 보았던 현수는 그 횟수를 거듭할수록 막연함과 답답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한차례의 고민이 비켜가자 반복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내고 싶은 절실함이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현수야. 형이야.”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심오한 상념에 잠겨있던 현수에게 유튜브 편집자를 권했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똑같지. 너는 좀 어때?”

“살아있으니까 살고 있는 거죠 뭐. 근데, 어쩐 일이세요?”

“전에 편집자 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봤던 것 때문에. 생각 좀 해봤어?”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부르면 당장 달려가야죠.”

“잘됐다. 마침 나랑 같이 일하던 편집자가 사정상 그만두어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정말요?, 그럼 언제부터 나가면 되는데요?”

“오늘부터 나와도 상관없어. 인수인계할 것도 있으니까. 이쪽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소식이었다. 현수는 켈리그라피 학원을 다니며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었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단숨에 뛰어들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머릿속으로는 분명 시뮬레이션까지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경미와의 관계를 이대로 방관하고 묵과하기에는 현의 가슴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형, 죄송한데요.., 며칠만 시간 좀 주실 수 있어요?, 학원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고, 준비할 것도 좀 있어서요.”

“나도 이번 주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참이었어. 그럼 준비 잘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우리 사무실로 와.”

“네, 형. 그렇게 할게요. 일요일 저녁에 미리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현수는 책상에 놓인 자신이 그린 꽃의 일러스트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오랜 고심 끝에 경미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줄 방법을 찾아낸 현수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경미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현수는 의자에 앉아 자신이 그린 일러스트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김춘수 시인의 ‘꽃’을 검색했다. 집중하며 한 글자씩 시를 옮겨 적기 시작한 현수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오묘한 감정에 몇 번씩이나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어느덧 야간수업시간이 다가오자 현수는 부랴부랴 학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행여나 자신의 손으로 처음 만들어본 일러스트가 색이 번지거나 때가 탈까 싶었던 현수는 친누나의 방에 있는 미술용 화구통에 일러스트를 돌돌 말아 학원으로 달려갔다. 학원에 도착한 현수는 강의실부터 살펴보았다. 어쩐 일인지 항상 늦게 오던 수강생 몇몇이 먼저 도착해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하는 수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현수는 그저 수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경미의 낯빛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정완이 떠난 지난 한 달간 애써 밝게 웃으며 쾌활한 모습으로 수업을 진행했던 경미도 슬슬 한계가 오는 것 같아 보였다. 야간수업을 마친 경미는 수강생들이 모두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무기력함에 등떠밀려 침울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그대로 엎드렸다.


“저기, 경미야.”

“현수구나. 아직 안 갔어?”

“가려다가 너한테 줄 게 있어서 다시 왔어.”

“줄 거?”

“경미야. 그땐 내가 미안했어. 이번에는 좀 받아주라.”  

“미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지. 너라고 뭐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니..

솔직히 그동안 어떤 말을 해야 될지 혼란스러워서 여태껏 말도 못 붙였어.”

“그랬구나. 그나저나 줄게 뭐야?, 중요한 거야?”

“응. 그러니까 다시 왔지.”


현수는 화구통에 담겨있던 자신의 진심을 닮은 일러스트 조심히 꺼내서는 경미의 책상 앞에 펼쳐놓았다.    



“우와, 이거 진짜 네가 만들었어?”

“응. 전에 너한테 물어본 적 있지?, 일러스트 그리는 거. 다 쓸데가 있어서 물어본 거였어.”

“진짜 잘 만들었다. 글씨도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들어?”

“응. 선생님으로서 굉장히 뿌듯하다. 이제 하산해도 될 것 같아.”

“너 줄게. 너 주려고 만든 거니까.”

“이걸 왜?, 만드는데 꽤나 힘들었을 텐데..”


오랜만에 보는 경미의 밝은 미소가 현수의 가슴을 두근거림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현수가 원한 것은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현수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경미야.”

“응?”

“내가 네 이름을 아무리 불러줘도 너는 꽃이 될 수 없는 거야?”


현수가 만든 일러스트를 손에 들고 예쁜 미소를 짓고 있던 경미의 입꼬리가 서서히 굳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몇 초간의 정적이 스쳐가자 일러스트를 책상에 내려놓은 경미가 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현수야. 꽃이라는 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잡초 일수도 있어.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야. 누군가에게 사랑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매력을 가진 장미, 아니면 다양한 꽃말을 가진 히아신스 같은 예쁜 이름을 가진 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제멋대로 자라난 잡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름 하나 없이 그저 멋대로 자라난 초록색의 풀 따위일 뿐이라고.


지독한 악연인 것처럼 매번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지, 끊어낼 수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수는 이대로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초록색 풀도 누군가가 듬뿍 사랑을 주고 끊임없이 정성으로 가꿔주다 보면 이름이 생길지 모르는 거잖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이름을 가진 꽃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그 초록색 풀에 이름을 붙여줄게. 내가 정성스럽게 그 풀을 가꿔줄게. 내가 너에게 사랑을 줄게.”


현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에게 자신의 진심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경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꽃을 피우기에는 너무 춥지 않니?, 현수야. 아무리 네가 정성을 쏟고 사랑으로 품어줘도 얼어붙은 땅에서는 꽃이 피지 않아. 정말로 신이 존재해서 우연히 너의 소원이 전해져 기적적으로 싹이 난다 해도, 어차피 그 싹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얼어 죽고 말 거야.”


현수가 깨끗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경미의 확고함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현수는 경미가 작은 틈이라도 보여주길 기대하기 시작했고, 혹여라도 그 틈을 발견한다면 자신이 메꾸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현수는 희망을 품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지독하기만 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든 매듭짓고 싶어 했던 것이 현수의 속마음이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으로 반복되기만 했던 경미와의 인연이 자신의 바람처럼 아름답게 매듭지어지지 못했지만 현수는 후회하지 않았다.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낼 수 없을까?”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았면서 도대체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이만큼 했는데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겠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잖아?, 네가 상처받는 걸 볼 때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 경미야.”

“있잖아 현수야.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된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어. 너를 친구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남자로는 받아줄 수 없어. 이게 내 대답이야.”


경미는 끝내 현수의 고백을 거절했다. 이미 가슴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완 때문이었다.


“아직도 좋아하는 감정이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친구로 지낼 수 있어?, 그건 네 욕심이야. 내 인격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그리고 나는 열 번이나 찍을 만큼 근성 있는 남자가 아니야. 잘 지내.”


현수는 사무실의 문 앞에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세차게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무실의 출입문이 닫히자 책상에 놓여있던 현수의 일러스트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일러스트를 주워 든 경미는 잠시 동안 문밖을 응시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정완의 작업실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같은 시각, 청첩장을 주기 위해 정완을 찾아온 지수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사무실에서 나오는 현수와 마주쳤다.


“현수야.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지수 누나..”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아니에요. 화 안 났어요.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세요?”

“정완이한테 청첩장 주러.”

“정완이 형 없어요. 얘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정완이는 도대체 어딜 쏘다니는 거라니?,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보고.”

“누나.”

“응?”

“사람들은 보통 예쁜 꽃을 보면 꺾고 싶어 하잖아요?”

꽃?, 갑자기 웬 꽃타령이야?

“근데 저는 꺾여 있던 꽃이 참 예뻐 보였나 봐요.”

“무슨 소리야?”

“저는 그냥.., 그 꽃이 다시 활짝 피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 부러진 꽃이 오늘 그러더라고요.”

“꽃이 부러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부러져서 죽은 게 아니래요. 얼어 죽은 거래요. 

“죽다니, 뭐가?”

누나, 깊은 바닥까지 꽁꽁 얼어붙은 땅이 녹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그나저나 갑자기 꽃 얘기하니까 정완이 예전에 너랑 비슷한 말을 했던  생각나네.”

뭐라고 했는데요?”

“꽃이 예쁘다고 꺾어버리면 꺾여버린 그 꽃은 금세 죽고 만다고. 잠깐이야 기분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볼 수 없는 그 꽃을 생각하면 슬프지 않겠냐, 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

가지려 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네요. 근데 어떡해요?, 저는 갖고 싶은데. 진심으로 갖고 싶었는데.., 정완이 형처럼 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된 거겠죠?”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제 다 끝났어요. 들어가 보세요. 볼일 있다면서요. 먼저 가볼게요.”

“뭐가 끝나?, 설명은 해주고 가야지?, 현수야!, 만난 김에 청첩장 받아가. 현수야!”


돌아서는 현수의 이름을 부르며 몇 차례나 현수를 불러 세워 보려 했지만 지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는 현수의 걸음을 붙잡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사무실에 들어온 지수는 곧장 정완의 작업실로 향했다.


바로 그때, 작업실 청소를 마친 경미가 정완의 작업실에서 나왔다.


“경미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지수 언니. 오랜만이에요.”

“응, 오랜만이야.”

“예뻐지셨네요. 결혼 준비는 잘 돼가요?”

“응. 청첩장 주려고 왔는데, 정완이는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보는 거라니?”

“정완 오빠, 잠시 어디 좀 갔어요.”

“어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너만 알고 있는 거야?”

“얼마 전에 선영언니 왔었어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선영언니한테는 말했어요.”

“그랬구나.., 선영이는 여기 왜 왔데?”

“정완 오빠 만나려고 왔겠죠.”

정완이 얘는 정말 속세랑 연을 끊을 작정인가 보네.”


삐죽이는 입술 구시렁대며 사무실 이곳저곳을 훑어보 지수에게 경미가 말했다.


“있잖아요, 언니. 선영언니 왔던 날..”

“선영이랑 왜?, 무슨 일 있었어?”

“선전포고 했어요.”

“선전포고?”

“네. 정완 오빠 돌아오면 고백할 거라고요.”

“뭐?, 너 진심이야?,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냐고.”

“네, 진심이에요. 이렇게 후회하나 저렇게 후회하나 어차피 후회할 거면 해보고나 후회하려고요.”

“경미야. 꿈을 꾸는 건 좋은데,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인정해요. 선영언니를 동경했던 것도 인정하고요. 어쩌면 선영언니가 아닌 정완 오빠의 옆자리를 동경했던 건지 잘 모르지만요. 하지만 이제 동등하다고 생각해요.”

둘이 짰니?, 오늘 너랑 현수랑 참 알 수 없는 소리하네.”

언니. 아무래도 동경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은 비슷한 구석이 있나 봐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동경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기본적으로 바람이라는 감정이 포함되어있으니까. 인간의 바람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지.

“틈만 나면 동경일까, 사랑일까 비교해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공통점이 보이더라고요. 

“공통점?

욕심.., 욕심이 보였어요. 어느 순간 그 욕심이 점점 커지다 보니까 도무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게 됐어요. 

“동경, 사랑, 욕심.., 끝을 알 수 없는 감정들뿐이네.

언니, 솔직히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정말 제 욕심 때문일까요?, 동경과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제 욕심이 빚어낸 감정일까요?, 저도 제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게 된 이상.., 제 으로 직접 결말을 맺어야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아요. 그렇게 하지 못하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정완이한테 고백하겠다 이야?”

“비참하게 막을 내린 내 첫사랑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어서 아무 데나 내팽개쳐놓고 줄곧 행복하기만 한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꿔 왔는지도 몰라요. 처음에는 그저 볼 수만 있게 해 달라고, 그저 얘기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만 빌었는데 바랄 때마다 그 소원이 이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소원이 늘어나는 거 있죠?, 알아요. 이것도 욕심이라는 거. 근데 그 욕심이 정완 오빠를 소유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단지 필요해지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정완 오빠가 힘들 때 필요한 사람이 나였으면.., 오빠가 행복할 때 필요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그런 바람 같은 거 말이에요.”

“참 너도 기구한 아이구나. 구구절절 다 말할 필요 없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으니까.”

“망상에 절어있던 불쌍한 아이가 누군가로부터 구원받고 싶었다고만 생각해주세요. 그렇게만 생각해 주세요 언니.”
몰라. 이제 신경 안 쓸 거야. 말린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잖아?, 어차피 정완이가 해결문제야. 선영이를 만나든, 너를 만나든 이제 나랑은 상관없어.”

“네, 언니.”

“근데, 각오는 하고 있는 거야?”

“각오요?”

“상처받기 싫다며?, 미움받기 싫다며?”
“상처나 미움을 받는 게 적어도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됐어. 여기 청첩장 놓고 갈 테니까, 나중에 정완이 오면 전해줘.”

“제 거는요?”

안 보여?, 두 장이잖아, 두 장. 그럼 나 갈게.”


지수는 그저 날을 잘못 맞춰왔다 생각했다. 현수가 자신에게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기고 간 것도, 경미가 정완에게 고백을 하겠다는 것도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수는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때였다무슨 수를 써서집요하게 알아내려 했을 것이고, 어한 방법을 써서든 포기시키려고 온갖 회유를 시도했겠지만 지수는 더 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기억하 감정이나 느끼고 있는 감정은 오롯이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정완의 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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