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ade By me 27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희완 Jul 18. 2020

EP 27) 첫눈.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내는 용기.

episode 27.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자욱한 연기를 닮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대로변의 가로수들이 헐벗고 온몸으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견뎌 내는 동안 뿌리를 덮고 있는 흙속에서는 유연하고 강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가 끝나자 어느새 퇴근이 시간에 가까워졌음을 확인한 선영은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수야, 뭐해?-

-병준이랑 저녁 먹고 있어.-

                                                                                                                               -그렇구나.-

                                                                                                    -낮에 정완이한테 전화 왔었어.-

-나도 통화했어.-

-너 전화 안 받는다고 엄청 퉁퉁거리던데.-

                                                                                                 -지금까지 계속 회의 중이었거든.-

-그래서 통화는 잘했고?-

                                                                                                                            -응. 대충은..-

                                                                                                                                 -지수야.-

                                                                                                           -이따가 잠깐 볼 수 있어?-

-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안 그래도 병준이가 일이 있어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

-몇 시까지 어디에서 볼래?-                                                                       

                                                                              -그럼, 7시 30분까지 그때 그 카페에서 만나자.-


선영은 퇴근을 하자마자 차를 몰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직 풀어내지 못한 감정이 선영을 불안하게 만든 것일까. 혹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정완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초조했던 것일까. 불안함과 초조함이 들이닥치자 선영의 가슴은 답답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지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했던 것에 부작용이 생긴 것인지, 부주의했던 자신의 발언에 발등이 찍힐까 두려웠던 것인지는 알  없었다. 그러나 정완을 향한 믿음만큼 두텁고 단단했다. 최소한의 추억이 머물러있음에, 마음에 알알이 스며있는 똑같은 감정들이 존재하기에 필연적인 믿음으로 기다리면 반드시 정완이 자신의 뜻에 부응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시각, 야간수업을 마친 경미는 서둘러 사무실의 문을 닫고 정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아직 미팅 중이에요?-

-곧 끝날 것 같아. 장소랑 시간은 정했어?-

                                                                                                          -네. 메시지 남겨놓을게요.-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와요.-


경미는 정완에게 메시지로 장소와 시간을 보내고 택시를 탄 후 목적지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린 경미는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신이 예약한 자리를 안내받았다. 정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경미는 몇 번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고쳤다.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행복하고 즐거운 듯 경미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레스토랑 전체를 빙 둘러쌓고 있는 성벽 같은 커다란 창밖으로 쌀알만 한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던 경미는 맨 처음 두근거리는 꿈을 꾸게 되었던 그 무렵을 떠올렸다. 여전히 경미의 가슴속에는 정완의 그 한마디가, 정완의 그 미소가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쌀알만 했던 눈이 털처럼 변해갈 때쯤, 레스토랑의 출입구에 정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여기에요.

밖에 눈이 꽤 오네.

“일찍 왔네요. 길 안 막혔어요?”

응. 현수는?”

“오빠, 일단 주문부터 해요. 배고파 죽겠어요.

“현수 오면 시키자.

“나, 배고프면 우는 거 알죠?”


경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부탁했다. 하늘을 가득 뒤덮을 만큼 눈이 내리는 겨울이었지만 경미의 얼굴에는 벌써 봄날이 찾아온 것 같았다. 메뉴판을 건네받은 정완은 무엇을 주문해야 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온통 영어와 불어로 되어있는 메뉴판에는 그 흔한 사진조차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우리, 이거 먹어요.”

“응?, 어떤 거?”

“커플세트요.”

“세트메뉴 같은 거야?”

“네. 아마 그럴 거예요.”

“너도 잘 모르면서 왜 이런 데서 만나자고 했어?”

“가끔씩 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와보고 싶었거든요.”

“아무튼 너는 정말 특이하다니까.”

“스테이크가 좋아요?, 파스타가 좋아요?”

면은 별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B 세트주문할게요.”


주문을 마치자마자 경미는 정완을 부르며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라고 손짓했다. 솜털 같은 눈이 겹겹이 쌓여가는 창밖을 해맑게 바라보던 경미가 말했다.


“오빠. 오빠는 눈 좋아해요?”

“나?, 좋아하지. 비 오는 날도 좋아하고. 근데, 선영이는 눈이나 비 오는 날을 엄청 싫어해. 그래서 선영이가 일기예보라도 보고 나온 날에는..”

“오빠. 오빠는 왜 어두운 색 옷만 입어요?”

“글쎄, 밝은 색은 나랑 안 어울려서 그런가.”

“잘 어울리던데요?, 전에 기획사 모임에 간다고 했던 날 흰색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입고 갔잖아요.”

기억력도 좋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기억력이 좋은 게 꼭 좋지 많은 않아요.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거든요. 잊을만하면 자꾸 생각이 나서 그게 좀 힘들 때도 있어요.

“하긴.., 나도 종종 그럴 때가 있어. 잊어서는 안 될 일은 잘 잊어버리면서, 정작 잊어버려도 될 일은 꼬박꼬박 기억을 해낼 때가 있으니까. 전에 다 같이 여행에 갔을 때도 그랬어. 선영이랑..”

“정말요?, 나랑 똑같네요. 잘 찾아보면 나랑 오빠랑공통점이 겠죠?”

“뭐, 찾아보면 겠지. 가만 보니까 너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것 같네.”

“아직은 나도 오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더 많은 걸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을수록 더 알고 싶어 지는 게, 사람 심리 아닐까요?”


정완과 경미 대화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주문했던 메뉴가 테이블에 하나씩 차려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나이프와 포크, 정갈하게 세워진 순백색의 천으로 된 냅킨 주변으로 널찍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으로 와인 잔에 탄산이 들어있는 청포도향의 와인이 따라졌다. 와인 잔을 타고 흘러넘치는 청량함과 상큼함이 경미의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주었다.


“그나저나 현수는 언제 와?”


갑작스러운 정완의 질문에 경미는 잠시 흠칫했지만 못 들은 척하며 품격과 기품이 절로 느껴지는 음식과 음식을 담고 있는 접시들의 조화롭고 아름다운 향연을 휴대폰 카메라에 저장했다. 경미는 하루 일과를 마친 것처럼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정완에게 말했다.


“오빠, 오늘 현수 안 와요. 앞으로도 안 올 거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현수랑 화해한 거 아니었어?”

“애초부터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요 뭘.”

“뭐라고?, 그럼, 그때 여행은?, 그건 어떻게 된 건데?”

“오빠. 이거 되게 맛있는데, 오빠도 좀 먹어요.”

“아니 경미야. 나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먹으면서 얘기해요. 천천히 하나씩 다 말해줄게요.”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던 정완의 접시를 자신의 접시와 바꾼 경미는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정완은 쭈뼜거릴 뿐이었다. 정완의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 한 조각을 끼운 경미는 수줍게 웃으며 정완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당황한 정완은 경미가 내민 포크를 손으로 받아 들고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어때요?, 맛있죠?”

“응. 근데, 경미야..”

오빠. 저 와인 좀 마실게요.


정완이 스테이크를 삼킬 때까지 턱을 괴고 지켜보던 경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정완에게 말했다.


“학교 다닐 때, 줄곧 따돌림을 당했었어요. 

“네가?

“좀 들어봐요. 다 말한다고 했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미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행동 때문에 오해를 꽤 많이 샀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상처받는 게 꺼려졌고 미움을 받는 게 싫어졌어요. 뚜렷한 주관도 없이 살다 보니까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는 일도 꽤 많았어요. 지금까지도 참 주관 없이 살았다고 느끼는 게 뭐냐면,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바뀌어가는 환경에 쉽게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노력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요.”

“그래서 나보고 신기하다고 했던 거야?”

“맞아요. 펜션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어요. 나만 빼고 다들 알아서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요. 나한테 뭐라도 시켜줬으면, 나도 이곳에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어요. 

“말을 하지 그랬어. 불편해서 그런 줄 알았잖아.

“바보 같죠?, 알아요. 내가 봐도 정말 바보 같았으니까.” 

“바보라니..,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근데 오빠. 나는 그냥 내 자신이 상처받는 게 싫었고,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게 두려웠을 뿐이었어요. 단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요. 

“상처받기 싫고 미움받기 싫은 심정은 이해한다만, 경미 너는 정말로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런 상황들이 자꾸 반복되다 보니까 차라리 혼자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받거나 미움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근데, 이상하게도 어느새부턴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결과만 생각했구나?,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떤 일에 대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반드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니까.”

“오빠 말이 맞아요. 가끔 그 과정이라는 게 떠오를 때마다, 주관 없이 살았던 날들이 후회스럽기도 했고, 이리저리 끌려만 다녔던 날들에 화가 나기도 했으니까요.

“그랬구나.., 근데, 경미야. 오늘 이 자리랑 그 얘기어떤 관계가 있는 거야?”

“일단 좀 먹기나 해요.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고요. 모처럼 비싼 곳에 왔는데 아깝게 남기고 갈 거예요?”


정완은 경미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하며 접시 위에 균일하게 잘려 있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경미의 이야기를 듣던 정완은 낯선 경미의 말투와 행동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던 그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와인 잔을 쓸어내리던 경미가 잔을 들며 말했다.


“오빠, 우리 건배해요.

“건배?

건배만 해줘요. 갑자기 와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듣고 싶어 졌어요. 오빠는 운전해야 되니까 마시라는 말은 안 할게요.”


행여나 와인 잔이 깨질까 싶어 조심스러워하는 경미의 모습이 경미의 마음과 매우 닮아있었다. 맑고 투명한 소리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둔탁한 소리가 나자 경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어요.”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던 때그때부터였다고요. 괜히 관심 있는 척하면서 다가오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나를 온전히 나로만 봐주는 오빠를 만나게 된 때부터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샌가 거짓 없이 솔직하게 나를 대해주는 오빠한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오빠한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젠가 이런 내 진심을 보여줄 기회가 있을까, 혹시라도 내 마음을 먼저 알아채 주지는 않을까.

“경미야..”

“있잖아요 오빠. 지금도 그 떨림이 멈추질 않아요. 긴장도 엄청 되고요.


정완은 경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경미가 하는 말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조금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연이어 기울이던 경미의 와인잔이 깨끗이 비워지자 경미가 말을 이어갔다.


“펜션으로 여행 가던 날, 지수 언니가 오빠랑 선영언니 화해시켜주려고 만든 자리라는 거, 이미 알고 있었어요. 현수가 여행에 같이 갔던 건 구색을 맞추자는 지수 언니의 제안 때문이었고요.”

“다 알면서도 따라온 거였어?,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뭐길래?”

“보고 싶었어요. 이런 표정, 저런 표정을 보여주는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지수랑 선영이도 알아?”

“네. 그래도 나는 상관없었어요. 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건 내 의지였으니까요.”


이제야 정완은 경미의 말속에 감추어져 있던 희끗한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와인잔을 내려놓은 경미가 글썽이는 눈으로 정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 오빠 좋아해요. 오늘 그 말하려고 억지 좀 부려봤어요.”


정완은 어떤 대답이 적절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말문이 막혀버린 것 같은 기분에 그저 경미를 멀뚱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가엾고 초라한 내 처지를 비관하면서 스스로 세운 울타리에 갇혀 살다가, 우연히 보게 된 빛줄기가 너무나도 눈부셔 보였어요.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다 보니까 왠지 일어서서 걷고 싶어 지더라고요. 계속 웅크리고 있기만 했던 내 두 다리에 점점 힘이 실리는 기분이.., 그 기분이 정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좋았어요. 

경미야..

처음에는 겨우 서 있을 수 있게 되어서 그거면 됐다 싶었는데, 설 수 있게 되니까 걷고 싶어 지고, 걸을 수 있게 되니까 달리고 싶어 지는 거 있죠?, 그게 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오빠를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오빠를 쫓아가고 싶었어요.


경미의 말이 끝나자 정완은 경미에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완은 경미가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거짓 없이 솔직하게 경미를 대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경미야. 누군가 나를 의지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나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질 때가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기댈 곳을 찾기 마련이기도 하고. 인생 혼자 살아가기에는 너무 외로우니까, 혼자 버티고 견뎌내려고 하면 너무나 가혹하고 처절한걸 나도 아니까.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알 것 같아. 근데 경미야..”

“오빠,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정완의 이야기를 듣던 경미는 정완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완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며 둘러댄다거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며 남을 속이고 기만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미는 정완이 매우 진지할 때만 보여주었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정완의 답변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떨림은 여전히 경미의 곁에 머물러 있었으나 조금 전과는 완벽히 다른 떨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화장실에서 나온 경미는 계산대에 들러 종이와 볼펜을 빌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정완은 아까부터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 경미가 혹시나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경미가 상처를 받더라도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경미가 자리로 돌아와 앉자 정완은 경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경미야. 지금 나한테는 선영이 밖에 없어.

“그렇게 단정 지을 만큼 선영언니가 좋아요?”

“이대로 선영이랑 헤어지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울 수 없을 거야.”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경미야. 나는 누군가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두려워.”

“뭐가 두려운데요?, 사랑도, 아픔도 서로 보듬어주면서 맞춰 가면 되잖아요.”

“맞춰가는 게 틀렸다는 건 아니야. 근데 경미야. 나는 한 사람이랑 맞춰 가는데도 7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 아직도 맞춰 가야 할게 많다는 걸 깨달았고.”

“감정적으로 변하면 누구도 모르는 거잖아요. 좋아한다고 확 말해버리면 흔들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나는 아직도 선영이를 좋아하고 사랑해.

나 오늘 엄청 용기내고 있는 거 알아요?, 몇 번이나 물어봐도 내 마음.., 받아줄 수 없다는 뜻이죠?”

미안해 경미야.”

“오빠.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이게 무슨 미안할 일이라고. 매번 오빠가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솔직히 기분 좋았는데, 오늘은 좀 별로네요.”


정완은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경미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무언가 말을 더 꺼내야 할 것 같은 순간 정완의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경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받을까 겁을 내기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 경미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는 것을 직시했다. 정완이 전화를 하러 간 사이 경미는 종이에 무언가를 또박또박 적어 의자에 걸려있던 정완의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통화를 마친 정완이 곤란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자 경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완의 와인잔을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오빠. 가봐야 되는 일이면 먼저 가도 돼요.”

“같이 나가자.”

“아 맞다, 다음 달에 사무실 계약 끝나면 다른데 알아보려고요.”

“나 때문이야?”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요. 오빠도 봐서 알잖아요. 수강생을 새로 받을 수 없을 지경이라는 거. 포화상태가 된 지 3개월째라 그만둘까 옮길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고요.

그건 그렇지. 근데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

“전에 말한 적 있을 거예요. 그냥 심심해서 하는 일이라고. 오늘 오빠랑 잘 안되면 그만두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왠지 더 열심히 하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고 할까요?”

“지금 네가 하는 말, 믿어도 돼?”

“당연하죠. 이사할 때 꼭 도와줘야 해요?, 이사하면 우리 그때처럼 짜장면 먹어요.”

“그래, 그러자.”

“약속한 거예요?”

“알았어. 슬슬 일어날까?, 눈 많이 오니까 집까지 바래다줄게.”

“먼저 가요. 나는 남은 와인 좀 마저 마시고 갈게요.

“경미야..”

“오빠. 오늘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요. 네?”


정완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경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를 입고 계산대로 향했다.


음식 값을 계산하려던 정완에게 레스토랑의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제셨어요.”

“네?

“같이 오신 여성분이 자리와 메뉴를 예약하실 때 결제까지 다 하셨어요.”


정완은 계산대에서 서서 경미가 앉아있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미는 정완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한 듯 한층 더 밝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완이 경미에게 다가가려 하자 경미는 금세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는 있는 힘껏 정완의 접근을 거부했다. 하는 수없이 경미에게 손을 흔들며 짧은 인사를 나눈 정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되어있는 자신의 차 앞에 서서 차키를 꺼내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정완은 차키와 함께 포개져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잠시 꿈을 꾸고 있었나 봐요. 아주 달콤하고 향기로운 그런 꿈을요. 이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좋을지 무서워요. 나만 몰랐나 봐요. 이 꿈이 계속 이어지기를, 이 꿈이 언젠가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꿈이었다는 걸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도 꿈만 같아요. 나한테 있어서 오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 같은 사람이에요. 고마워요 오빠. 그리고 마음대로 꿈을 꿔서 미안해요.-


정완은 운전석에 앉아 경미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는 시동을 걸 선영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차를 몰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있는 순간만큼은 쉽게 잠에서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욕심은 금세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꿈과 욕심의 경계에서 현실과 마주하고만 경미는 약간의 상실감에 취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하기보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오히려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경미는 그저 달콤한 꿈이었음을, 단지 허황된 욕심이었음을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아쉬움이 짙게 베어 발길을 떨쳐내지 못했던 순간도, 제대로 숨 쉴 수 없을 만큼 뜨거웠던 순간도, 칼로 도려내진 것 같은 마음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던 순간도, 촉촉하게 젖은 눈을 깜빡이며 그리움을 흘려보내던 순간도 경미가 줄곧 카메라에 담아왔던 꿈만 같았던 시간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26화 EP 26) 폭풍전야. 선택은 각자의 몫.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