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8) 회귀. 부서지지 않는 믿음.
episode 28.
비슷한 시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선영이 커피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지수가 도착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영을 발견한 지수는 곧장 선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선영아, 저녁은?”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어. 요즘 통 입맛이 없어.”
“밥은 제때 먹어야 한다는 애가 요새는 자주 굶네?”
“그러게.”
“왜 그렇게 멍해 있어?, 무슨 일 있어?”
“정완이가 경미 씨랑 저녁 먹는데.”
창밖에 나부끼는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정말?”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하고 그래?”
잠시 당황해하며 두꺼운 점퍼를 벗는 시늉을 하던 지수가 선영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은 나도 아까 정완이한테 그 얘기하려다가 말았어.”
“경미 씨가 고백할 거라는 얘기?”
“응. 근데 이제 나서지 않으려고. 백번을 넘게 생각해봤는데 그게 최선인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마음은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해서 맞춰지지 않는 거니까.”
“지수 네 말이 맞아. 나도 아까 경미 씨랑 저녁 약속 있다는 얘기 들었을 때, 정완이한테 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려다 말았거든.”
“왜?,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 잘못한 걸까?, 내 잘못이니 지수야?”
“잘했다고 할 수 없지만, 잘못했다고도 못하겠다.”
“불안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모르게 점점 더 불안하기만 해.”
고개를 숙인 채 커피잔에서 손을 떼지 못하던 선영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한 지수는 선영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왜?, 떨리니?, 네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고백을 받으러 갔는데,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막 답답하고 불안해?”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불안해할 필요 없어 선영아. 너 정완이 믿지?”
“믿지 그럼.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고 믿어.”
“그럼 됐어. 정완이도 분명 같은 마음일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지. 적어도 오늘만큼은 네가 울지 않아서, 더더욱 그렇다는 확신이 드는걸?”
지수는 선영의 얼굴을 보며 찡끗 웃어 보였다. 선영은 지수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낮 동안 선영을 괴롭히던 얄궂은 생각들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불안함과 초조함도 말끔히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수백만 개의 거미줄처럼 정신 사납게 늘어진 빛줄기는 어느새 빈틈이 없을 만큼 선영의 마음을 밝게 채워주었다.
혼자 남아 정완을 기다리겠다는 선영의 결심을 재차 확인한 지수는 마지막으로 선영의 표정을 신중히 살펴보고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영아.”
“응?”
“조급해하지 마. 억지로 바꾸려 하지도 말고.”
“알았어. 고마워 지수야.”
한편, 정완이 떠나고 홀로 창밖에 내리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던 경미는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경미야. 오랜만이네.”
“지금 어디야?”
“일하고 있지. 요즘 너무 바빠.”
“밖에 눈 오는 거 봤어?”
“눈?, 밖을 내다볼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현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나니 팝콘만한 눈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나, 오늘 고백했어.”
“고백?,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차인 것 같지는 않은데?”
“차였어. 근데 생각보다 아프지가 않네.”
“의외다. 울고불고 난리 칠 줄 알았는데.”
“그러게..”
“고백했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어때?, 실연당한 소감이.”
“소감은 무슨, 그냥 씁쓸해. 근데 한편으로는 후련해진 기분도 들어.”
“후회돼?”
“아니, 전혀. 마음속에 가득 찼던 안개가 걷힌 기분이랄까. 거절당하면 다 팽개쳐놓고 집에만 틀어박혀서 종일 울 것 같았는데, 뭔가 더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는 거 있지?”
“그거 희소식이네. 나도 너한테 차이고 하루하루를 정말 알차게 보내는 중이었는데.”
“현수야. 용기는 나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내는 거라고 했지?”
“맞아, 내가 그 말했지.”
“지금까지 나는, 내 꿈을 이루는 건 온전히 내 몫이라고만 생각했었거든?, 근데 아닌 것 같아. 내 꿈을 이루는 건 내 몫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말처럼 용기는 누군가가 있어야 낼 수 있는 것이지만, 꿈 또한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누군가 있어야 가능한 건가 싶어서.”
“경미야, 내 마음이 바로 그거야.”
“너도 이런 기분이었어?, 그 감정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일까?”
“아마도 그럴걸?, 잔뜩 쌓여있는 일을 패대기쳐놓고 너랑 수다를 떨고 있는 걸 보면..”
“현수야. 너랑 나랑은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하여간 너랑은 대화가 안 된다 정말. 이렇게 한결같이 네 생각만 하는 남자가 나 말고 또 있는 게 아니면, 이쯤 해두고 그만 받아주지 그래?”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까?”
“누군들 사랑에 익숙하겠어?,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연민 따위의 감정이 아니야. 사랑이라고 사랑. 나도 익숙하지 않아서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지금 너에 대한 내 감정은 사랑이라고 확신해. 경미야, 나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마음껏 기대고 응석 부려도 좋으니까, 그냥 내 눈이 따라가는 곳에 있어주면 안 돼?”
“현수야. 내가 여기서 또 너를 거절하면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되는 거니?”
“남이지 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랑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아.”
“너를 싫어해서가 아니야. 싫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걸..”
“나는 왜 하필 너를 알게 되어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는 걸까?”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
“너도.”
“그럼 끊을게.”
“경미야.”
“응?”
“너, 그거 알아?”
“뭘?”
“혼자가 아닌 세상은 생각보다 행복하다는 거.”
“혼자가 아닌 세상?”
“세상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어. 이제 더는 네 스스로를 가두려 하지 마. 혹시라도 떠올리기 싫은 추억이 생길까 걱정이라면, 그 추억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지금의 너라면 앞으로는 더 이상 상처받을 일도 없고, 미움받을 일도 없을 거야.”
“정말?, 더는 상처도 미움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누군가의 상냥함에 의지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네 스스로 행동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도록 노력해야지.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 그걸 두려워하면 언제까지나 그 자리일 테니까. 혼자가 되는 것에 더는 익숙해지지 마.”
“고마워 현수야.”
“무섭다고 시작도 안 하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말 거야. 그게 싫으면 네가 변해야지. 안 그래?”
“너랑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랑 친구로 못 지내.”
“알았어 알았다고. 친구 하자는 말 안 할게, 됐지?”
“그럼, 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아.”
경미는 투명하게 비워진 와인 잔 두 개를 나란히 세워놓았다. 조금 전까지 마주 보고 앉아있던 정완의 모습을 떠올리던 경미의 입술에는 쓸쓸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으려던 경미는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몸을 의자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자 경미는 마치 기댈 곳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았다.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누군가를 미워한다거나 상처받게 하지 않을게요. 정완 오빠. 기댈 곳을 잃은 나는 이제 비틀거릴 일만 남은 걸까요?, 아니면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상을 씩씩하게 걷는 일만 남은 걸까요?, 선택은 내가 하기 나름인 거겠죠?, 고마워요 오빠. 오빠는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 같은 사람이에요.’
선영이 카페에서 정완을 기다린 지 한 시간여가 지났을 무렵, 정완이 선영의 앞에 나타났다. 창밖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눈꽃을 바라보며 정완을 기다리던 선영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늦었지?, 내가 이럴까 봐 기다리지 말라고 한 건데.”
“정완아.”
“응?”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왜 그래?.., 화났어?”
“밖에 눈 많이 온다. 우리 나가서 좀 걷자, 응?”
정완은 영문 모를 선영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무언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 것 같은 불길한 기분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정완에게 삐죽삐죽 미소를 짓던 선영은 정완의 팔짱을 끼고 계산대로 가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주문하며 점원에게 말했다.
“여기 몇 시까지 해요?”
“11시요.”
“그럼 저희 그때까지 주차 좀 해놔도 돼요?”
“가능은 한데, 매장 문 닫기 전에는 꼭 오셔야 해요.”
커피를 받아 든 선영은 정완에게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눈길을 걸으며 정완에게 커피를 건넨 선영은 정완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끼웠다.
“선영아. 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나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나도 너 없는 동안 모르는 남자들이랑 밥 먹었어.”
“남자들?”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었거든.”
순간, 정완의 가슴속에서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잠시 놀란 정완이 선영의 손을 놓으려 하자 선영은 정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손 빼지 마.”
“진심이었어?,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거냐고.”
“그땐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니야.”
“참 당당하네.”
“정완아, 우리 저기 가서 계란빵 먹자. 나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단 말이야.”
“어물쩍 넘어가려는 거야?”
“아니, 그럴 거였으면 말도 안 꺼냈지.”
선영은 정완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계란빵과 어묵을 팔고 있는 작은 트럭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묵 국물을 마시는 선영의 코끝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계란빵에 설탕 들어간 걸 좋아했는데, 정완이 너는 소금 들어간 걸 좋아했지?”
“그때는 그랬지. 지금은 설탕이든 소금이든 상관없어.”
“이거 먹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너, 서서 먹는 거 질색했잖아.”
“한때지 뭐.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순식간에 계란빵 한 개를 다 먹고 티슈로 입을 닦던 정완에게 따끈한 어묵 국물을 따라 주던 선영이 말했다.
“너랑 정말로 끝내겠다고 말은 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헤어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 오히려 남이 될까 봐..,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아.”
“나도 그래. 너를 놓아주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점점 목이 잠기는 기분이 들었던 선영은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아참, 일본 여행은 재미있었어?, 가서 뭐했어?”
“여행?, 여행은 아니지. 놀러 갈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왜 하필 일본이었어?, 요새는 싸고 좋은 데도 많잖아.”
어묵 국물이 담긴 종이컵을 내려놓은 정완은 선영의 질문에 즉답하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정완은 쑥스러운 듯 코트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으며 선영에게 말했다.
“너랑 함께 갔던 곳이라서.”
정완의 대답을 들은 선영의 입가에는 한아름 웃음꽃이 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먹먹함은 정완의 한마디로 깔끔하게 비워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선영은 약간의 긴장감마저도 살포시 내려놓게 되었다.
“가서 뭐했는데?, 일본 여자들 만날 생각에 들떴었어?”
짓궂게 장난스러운 말을 하는 선영을 밀쳐내며 어묵과 계란빵의 계산을 마친 정완은 선영보다 한걸음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정완의 팔을 낚아챈 선영이 말했다.
“가서 뭐했냐고 묻잖아. 응?, 말 안 해줄 거야?, 정말 일본 여자 만나고 온 거야?”
“뭐래.., 그 작곡하는 친구 만난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경화네 가서 며칠 동안 신세 좀 지다가 너랑 같이 머물렀던 곳에 혼자 가봤어.”
“정말?, 어땠는데?,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어?”
정완은 선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주머니에 있던 노트를 꺼내 선영에게 보여줬다. 노트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정완의 필체를 들여다본 선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트럭을 등지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골목길 사이로 방향을 바꾼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며 발자국을 남겼다.
“실은 나도 너랑 조금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 그리고는 곧장 결혼정보업체에 해약을 통보했지.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너와의 추억이 너무 생생하니까.., 한순간에 잊혀질리 없다는 게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나도 그랬어. 행복했던 순간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왜 그 수많았던 추억을 외면하고 살았을까?”
“또 한 가지 있어. 우리는 서로에게 처음을 가장 많이 줬던 사이였다는 것도 잠시 잊고 지낸 것 같아.”
“당연해지니까 익숙해진 거고, 익숙해지니까 잊어버린 거지 뭐.”
“정완이 네가 자그마한 실수를 하거나 티끌만 한 잘못을 하기라도 하면, 왜 나는 그렇게 길길이 뛰었던 걸까?, 지나고 나면 별일도 아닌데..”
“나는 뭐 안 그랬나..”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불행했던 기억보다 행복했던 기억이 몇 배는 더 많은데 어째서 나는 섭섭해하기만 하고 투정만 부렸나 모르겠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일을 자주 겪게 되다 보니까, 대처가 미흡할 수밖에 없던 거지. 지겹도록 반복했던 옛 기억들은 어디엔가 묻어놓지도 모를 만큼.”
“있잖아, 정완아. 최근에 부쩍 소원해진 우리 관계 때문에 나 많이 힘들었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네 모습에 화도 났고,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내 운명에 많은 실망을 했어.”
“이해해.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정말?”
“하라주쿠에 있는 신사에 갔을 때, 너무 간절해졌거든. 다시 한번 그 표정을 짓는 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지더라고.”
“그때 내 표정이 어땠는데?”
“작은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표정?, 떼를 써서라도 그 기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그런 표정 말이야.”
“무자비한 포식자 같은 표정은 아니고?, 너 그때 나한테 맹수 같다고 놀렸잖아.”
“그건 싸웠을 때고. 아무튼 그날의 네 얼굴이 너무 그리웠어. 그리워하다 보니까 보고 싶어 죽겠더라고.”
“정완아. 인생이라는 길이 아무리 굴곡지고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나는 너랑 그 길을 같이 걷고 싶어. 함량 미달이니 기준치 초과니 이런 어려운 말은 필요 없어. 그냥 오늘처럼 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싶어.”
“나도 처음부터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니었어. 살다 보니까 넘지 못할 역경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어. 나는 단지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만들어놓고 싶었을 뿐이었어.”
“헤아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세게 안아주지 못해서 내가 미안해.”
한적한 골목길의 끄트머리에 잠시 멈춰 선 선영은 한 손으로는 정완의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몇 번씩이나 닦아냈다. 그런 선영을 말없이 지켜보던 정완은 선영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정완의 품 안에서 잠시 들숨을 쉬던 선영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정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모르면 알 때까지 물어볼 거야. 물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르는 채로 살아갈 테고,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불안해하지도 않을 거고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않을 거야.”
“못 보던 사이에 철들었네 우리 선영이. 한 살 더 먹어서 그런가?”
선영의 머리를 쓰다듬던 정완이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선영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갈까?, 카페 문 닫겠다.”
“벌써?, 아쉽다.., 아직 해주고 싶은 말이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남의 사유지에 차를 두 대나 대놨으니.”
“정완아. 노력으로 분명 안 되는 게 있겠지만.., 그래도 나, 노력할게.”
“나도 노력할게, 선영아.”
불이 꺼진 카페 앞에 도착한 정완은 선영이 먼저 출발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예전처럼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주말이 떠오른 정완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흔하디 흔한 일상마저 그리워질 때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선영을 향해 흔들던 정완의 손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었던 아쉬움과 조금 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미련 역시, 한동안 정완 곁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