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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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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Sep 14. 2021

EP 30) 서른 하나, 그리고 8년.

episode 30.


2월의 마지막 날 아침. 마침내 병준과 지수의 결혼이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펜션으로 여행을 떠던 날, 그 길고 긴 밤하늘에 뿌려져 있던 별들 사이를 이어가며 결실이 맺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그날보다도 두 사람은 빛나고 있었다. 서로의 진심이 담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끄집어냈던 그 진심이 서로의 가슴속에 닿기만을 간절히 원했던 두 사람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달콤하고 찬란한 열매를 손에 쥐었다.


예행연습이 끝나고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던 지수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현수였다.


“누나, 축하해요.”

“현수구나, 와줘서 고마워. 일은 할 만 해?”

“적성에 딱 맞는 일을 찾았어요. 그나저나 누나, 완전 다른 사람 같네요.”

“너무 설레서 밤새 한잠도 못 잤어.”

“그렇게 좋아요?”

“너도 해봐. 해보면 알 거야.”

“행복하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어 보여요.”

“왜?”

“얼굴에 엄청 크게 쓰여 있으니까요.”

“티나?”

“표정관리 좀 하세요.”

“그 정도야?”

“어쨌든 누나. 정말 축하해요.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잊어주세요.”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지. 네가 경미를 좋아하는 줄 누가 알았겠니?”

“에이, 다 잊어달라니까요.”

“그래, 알았어. 누나 결혼식 보면서 밥 먹고 가.”

“아니에요. 오늘도 철야라 바로 가봐야 해요.”

“섭섭하다, 얘.”

“죄송해요, 누나.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식 올리는 거 볼 시간도 없어?”

“지금도 밤새 일하다 온 거예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조심히 가. 연락할게.”


수가 신부대기실을 빠져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미가 뒤를 이어 신부대기실을 찾아왔다.


“언니, 축하해요. 너무 예뻐요.”

“고마워 경미야. 방금 현 왔다 갔는데, 못 봤어?”

“현 왔었어요?”

“못 만났나 보구나. 혼자 온 거야?”

“네. 저 학원 이사하는 것 때문에 요즘 너무 정신없어요.”

이사?, 정완이 때문은 아니지?”

“저, 이제 아무렇지 않아요. 전보다 더 행복하다는데 왜들 이러실까 정말.”

“근데 경미야, 정완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좋아하게 된 이유라도 말해주면 안 돼?”

이유요?, 그냥.., 오빠를 볼 때마다 딱 맞는 옷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나한테 딱 어울리는 예쁜 옷이요.”

“딱 맞는 옷?”

“왜요?, 표현이 좀 이상했어요?”

“아니, 이것까지 설명해주면 네가 좌절할 게 뻔하니까, 그냥 못 들은 걸로 할게.”

“못 들은 걸로 할 거면서 왜 물어봤어요?”

“경미야. 딱 맞는 옷이라는 건, 남들이 봐도 편하고 어울려 보여야 그게 딱 맞는 옷이야.”

“알아요.., 그런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 아니라는 거.”


지수는 잔뜩 풀이 죽어버린 경미의 손을 잡았다. 경미의 손등을 다독이던 지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도 일찍 갈거니?, 현는 바빠서 식 올리는 것도 못 보고 바로 간다고 나갔거든.”

“그 정도로 바쁘지는 않아요. 언니 사진 찍어 줄라고 카메라도 가져왔는데요?”

“너랑 현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네.”

“괜찮아요 언니. 다 지난 일인데요 뭘.”

“경미 너한테는 특히나 더 미안해. 그리고 와줘서 고마워.”


지수와 경미가 대화를 나누던 그때, 병준과 정완의 손을 잡은 선영이 차례로 신부대기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지수와 대화를 나누던 경미는 지수에게 거듭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는 쏜살같이 신부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경미 씨도 부른 거야?, 너란 애는 정말 배알도 좋다.”

“근데 선영이 너, 왜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왔어?, 내 결혼식인데 왜 네가 주목받으려고 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꾸며보겠니?, 근데 경미 씨가 뭐라고 안 했어?”

“응, 쟤도 알고 보면 참 착하고 여린 애야. 진작 알았으면 그런 짓은 안 했을 텐데.”

“이제 와서 옛날 얘기 꺼내봤자 의미가 있겠니.”


지수와 선영이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 병준은 부모님을 모시러 가야 한다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수와 그 옆에 앉은 선영의 모습을 사진에 담던 정완에게 지수가 말했다.


“정완이도 오늘 엄청 신경 쓰고 왔네.”

“병준이도 엄청 신경 쓰고 왔던데 뭘.”

“당연한 거 아니야?, 신랑이잖아 신랑. 누가 보면 오늘 니들이 주인공인 줄 알겠다.”

“좋아?”

“응, 너무 좋아.”

“축하해.”


지수와 투박하게 악수를 나 정완은 선영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때처럼 울지는 않을까,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영은 환하게 웃고만 있었다. 신부대기실을 나온 정완과 선영은 규모는 작지만 세련되고 우아함이 느껴지는 결혼식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완과 팔짱을 낀 채 느리게 걷던 선영은 식장 입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병준과 지수의 행복한 표정을 가득 담은 커다란 액자를 어루만지며 진심으로 축복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날, 일본의 전통 결혼식을 보던 그때의 표정과 무척 흡사한 표정을 짓고는 한참 동안 액자를 매만졌다.


그런 선영을 조용히 지켜보던 정완이 조심스럽게 선영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선영아. 아직도 결혼이 하고 싶어?”

“당연하지. 하지만 등 떠밀리듯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버렸어.”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진심이야.”

“알았어. 이제 조급해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한테 프러포즈할 때까지 여유롭게 지켜봐 주면서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니까, 자극시키지 마.”


자신의 거침없는 발언에 살짝 당황한 것 같은 정완의 팔짱을 낀 선영이 말했다.


“결혼식 시작하나 보다. 우리도 가자.”


병준의 부모님과 선영의 부모님, 그리고 친분이 있는 직장동료와 몇몇의 친인척이 앉아있는 자리를 비집고 정완과 선영이 남은 자리에 앉자, 결혼식장에는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주례도 사회자도 없고 피로연도 없는 결혼식이 조금 낯설었지만, 식사를 하 일상을 보내듯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이 조금은 새롭게 느껴졌다.


평범한 예식장에서 스몰웨딩을 결정한 지수가 선영에게 자신이 결정한 예식장에 대해 말하던 날. 선영은 지수가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혼식장을 고른 것에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지수는 단지 선영이 바빠 보였기 때문이었다는 간단한 이유를 붙여보았지만 선영은 용납하지 않았다. 선영은 전력을 다해 프로젝트에만 매달리기에도 충분히 바쁜 시기였지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오늘 결혼식을 진행하게 될 장소와 스테프 섭외부터 모든 소품과 일정을 기획했다. 8년간의 고마움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선영은 그 부족함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채우려 했다.


병준과 지수가 동시에 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선영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온몸으로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 오늘만큼은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선영의 마음과는 다르게 기쁨이 가득한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정완도 선영을 따라 일어나 병준과 지수의 결혼을 열렬히 응원하며 환호했다. 마치, 일본에서 전통 결혼식을 올리던 그들을 축하해주던 그날의 선영처럼 정완 역시 온 힘을 다해 병준과 지수의 결혼을 축복했다.


먼발치서 지수와 병준의 사진을 찍고 있던 경미는 병준과 지수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지만, 어째서인지 정완과 선영에게는 자그마한 응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의 말미쯤, 경미는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갔다. 정완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흔적조차 없이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경미는 줄곧 꿈만 같았다고 느꼈던 시간이었지만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단지 미움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잠시 회상하던 경미는 진심으로 그들을 응원을 해줄 수 없는 눈앞의 현실이야말로 자신의 명확한 의지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지수가 힘차게 던진 부케를 얼떨결에 받게 된 선영은 허둥거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완에게 병준이 다가와 말했다.


“입 좀 닫아 정완아. 침 좀 닦고.”

“축하해 새신랑. 유부남이 된 소감이 어때?”

“고마워 정완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너랑 선영 씨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

“고맙긴.., 식 끝나면 뒤풀이 같은 것도 있어?”

“없어. 곧장 신혼여행 가야 해.”

“신혼여행 생략하기로 했다더니, 바뀐 거야?”

“우리 와이프가 좀 기특해야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뭐라고?”

“우리 부모님 미국으로 돌아가실 때 같이 가자더라. 가서 쓸쓸함이 생기지 않을 만큼 따듯한 추억을 만들고 오자면서.”

“그게 신혼여행이야?”

“내 말이.., 근데 그걸 여행이라고 생각해주는 게, 너무 기특하지 않아?”

“지수 그렇게 안 봤는데, 기특한 구석이 있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누가 더 팔불출인지 대결해 볼래?”

“팔불출이라니.., 그나저나 선영 씨한테 다시 시작하자고 똑바로 얘기했어?”

“아니, 아직 못했어.”

“또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야?”

“그래서 지금 내가 개운하지가 않은가 봐.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좀 아니다 싶어.”

“말해. 말을 해야 알지. 초능력자도 아니고 말을 안 하면 무슨 수로 알겠어?”

“내 생각도 그래. 당연하게 생각하면 그때처럼 또 잊고 지낼 테니까,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 둘 필요성이 있어.”


정완의 진지한 표정에 동조하던 병준은 자신을 부르며 사인을 보내는 스테프들의 몸짓이 점점 분주해지는 것을 발견하자 정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정완아, 사진 찍으러 가자. 너랑 선영 씨도 같이 찍자. 우리 넷이서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지?”


병준과 지수를 중심으로 부모님과 지인들의 사진 촬영이 끝나자 병준의 옆에는 정완이, 그리고 지수의 옆에는 선영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까지 모두 마친 병준과 지수는 초대에 응해준 하객들에게 큰소리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답례품을 받은 하객들이 순차적으로 귀가를 시작하자 옷을 갈아입은 병준과 지수도 곧장 신혼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공항까지 운전을 자처하는 정완의 배려를 끝끝내 마다한 병준은 직접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병준의 부모님이 뒷좌석에 앉자 병준과 지수는 지수의 부모님과 짤막한 인사를 나누었다. 운전석에 앉은 병준이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던 그때, 조수석에 타고 있던 지수가 창문을 열며 정완과 선영에게 말했다.


“정완아, 선영아. 너희 둘이 처음 만났던 그때를 잊지 마. 사랑하겠다고 뜨겁게 가슴을 달구던 그때를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알겠지?”


곧 차량이 출발했고 지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정완과 선영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정완과 선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정완의 차에 탄 두 사람은 돌아가는 동안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선영아. 우리 차 한 잔 하고 갈까?”

“나도 그 말하려고 했는데.”


선영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도착한 선영은 먼저 차에서 내려 정완이 주차를 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정완이 카페에 먼저 들어가려는 선영을 불러 세웠다.


“선영아.”

“응?”

“우리 다시 만날까?”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번쯤은 제대로 말하고 싶어서.”

됐거든?, 말 안 해도 알아.


선영의 앞에 바싹 다가온 정완은 선영의 허리 잡아채며 선영을 있는 힘껏 안았다.


“다시 시작하자, 선영아.”

“말했지?, 나는 한 번도 너랑 진심으로 끝났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고. 우리는 잠깐 몸살이 났던 것뿐이잖아, 안 그래?”


자신이 쓴 가사를 인용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선영이 고마워서였을까. 정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똑 닮은 말을 예쁘게 뱉어내는 선영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선영아.”

“나도. 나도 너무너무 사랑해, 정완아.”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서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확고한지 재차 확인했다.


입춘이 지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었을 무렵이었다. 매서운 한파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는 사람들의 차림새도, 곳곳에 남아있는 빙판길도, 잎사귀가 바싹 말라있는 카페의 화분도 아직은 춥기만 한 겨울의 중심에 있었다. 해가 바뀌어 가면서 새로운 기억들이 머릿속에 켜켜이 쌓여갔고,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직 새파란 싹이 돋아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환경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지만 모두의 가슴속에는 어느새 한송이의 꽃이 피어나 있었다. 차갑기만 한 겨울의 중심에서도 꼿꼿하게 봉오리를 세우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띠를 두른 꽃이 피어 있었다. 진귀한 모습으로 활짝 만개한 그 꽃의 이름은 바로 추억이었다. 꽃의 이름은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려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그 꽃은 쉽사리 시들지 않을 것이다. 밟히고 뜯겨나가도 좀처럼 생명력을 잃지 않는 잡초와도 비슷한 추억이라는 꽃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죽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맞잡은 손을 이끌고 카페로 들어간 정완과 선영은 따듯한 자몽티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서로이기 때문이었을까. 잡고 있는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사랑과 마주했을 때, 이별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자신과 마주했을 때 역시, 아직은 변함없는 온도를 유지하고 있음에 두 사람은 안심하고 안도다.


“정완아. 너를 만나면서부터 내 세상은 조금씩 변해갔어. 근데 신기하게도 변해가는 세상이 낯설다거나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너랑 함께하면 낯설기는커녕, 오히려 더 즐거워지는 기분이었어. 나는 그게 지금도 신기해.

“정말 무섭지 않았어?, 너는 눈물도 많고 겁도 많잖아.”

“응. 진짜야. 내가 겁을 먹을 때마다, 네 목소리가 얼마나 힘이 되어주었는지 너는 모를걸?”

“내 목소리?”

“난 아직도 그때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던 따듯한 네 목소리 말이야.”

“이번에 나도 많이 느꼈어. 아마도 지금, 선영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닮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정완아. 앞으로도 나만 바라볼 거지?”

“당연하지. 말했잖아, 이번 생에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나는 지금처럼 네가 그 자리에 항상 머물러줬으면 좋겠어.”

“이제 서두르지 않을게. 조급해하지도 않을게. 성급해하지도 않을게.”

조금만 느리게 걷자. 그리고 나란히 걷자. 쭉 그렇게 걷자 선영아.”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을 겪을 때가 온다. 하지만 속력을 높여 빨리 걷는다고 해서 그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길이 꼭 위험하고 아찔하기만 한 고된 길만은 아니었다. 느리고 더디게 걸어도 꾸준히 걷다 보면 위험하고 아찔했던 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조급할수록 꼬이고, 닦달할수록 부딪히고, 초조해할수록 어긋날 뿐이었다.


지난여름, 선영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그 길 끝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바람대로 그 길의 끝에는 정완이 서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이 컸고, 그 길의 끝에 정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서 있을까 싶어 잔뜩 겁을 먹었던 선영이었다. 애매한 기분으로 빙 둘러 온 그 길의 끝에는 변함없이 정완이 서 있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길의 끝에 정완이 없었다면 선영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리한 도구로 깔끔하게 잘라내지 못했던 것도, 지우개로 빈틈없이 지우지 못했던 것도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었다.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의 둘레에서 정완을 빼놓지 못하게 된 지금도 자신이 결정한 일이었다.


서른하나, 그리고 8년.

정완은 새로운 꿈을 꾸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였다고만 생각했다. 그저 쫓고 있던 꿈에 가까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뿐이었다. 쫓고 있던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은 자명했으나, 인생의 중대한 기로가 될 뻔했던 계기는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먼 훗날 그때를 떠올리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지만,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조각나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살아온 인생은 살아왔던 인생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막연한 생각을 하는 그때마저도 언젠가는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언제가 한 번씩은 후회를 하곤 한다.


서른하나, 그리고 8년.

우리는 모두 꿈을 꾸며 살아간다. 꿈은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지만 추억이라는 꿈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빛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반짝임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다만,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설렘과 두근거림 역시 우리의 곁에 머문 채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이 또한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표현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의 모든 순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꿈을 꾸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인간의 인생사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으로 그 표현의 차이를 좁혀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표현과 입장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도 어디까지나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며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모두가 같은 장소를 기억하고, 같은 얼굴을 기억하고, 같은 상황을 기억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추억이라 일컫는다. 그리고는 ‘그때는 그랬지.’라며 아득히 멀어진 것 같은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추억을 회상하는 행위는 누구에게는 그때를 어렴풋이 떠올리는 작은 기쁨에 불과했지만 간혹, 누구에게는 간절하다 못해 절실해질 때가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그저 회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기억이 조금 왜곡될 수 있으나, 모두의 기억 속에 함께 남아있는 최소한의 기억이 그런 것이다. 최소한의 기억은 추억의 작은 불씨와도 같았다.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 함께 만들었던 추억은 그 어떤 역경에 부딪혀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온 정완이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선영이 정완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때 기억나?, 지수가 했던 말.”

“어떤 거?”

“정신없이 채우다 보니 넘쳐버린 걸까?, 채우려 하지 않아서 비워진 걸까?,라고 했던 거.”

“아, 그거?, 그게 왜?”

“추억이 가득 담겨있는 화분이 메마른 것 같아 보였어. 그래서 사랑이라는 물을 열심히 주었는데 물이 흙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밖으로 넘치기만 하더라고. 그것마저도 사랑이라고 소리쳤던 나였는데, 힘없이 흘러버리기만 하던 그 물이 내 눈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걱정 마. 이제 두 번 다시 밖으로 흘러넘칠 일은 없을 거야.”

“진짜야?, 믿어도 돼?”

“발을 동동 구를 필요 없어. 이제부터는 넘쳐버린 사랑도 함께 담아줄게.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많이 후회했으니까. 선영아, 다시는 그 화분이 메마르지 않게 내가 많이 노력할게.”

“내가 더 많이 주더라도 절대로 흘려버리지 않기다?”

“응. 약속할게.”


과거에 연연하며 얽매이던 두려움과 후회도, 지금 느끼고 있는 안도감과 만족감도, 혹시나 미래에 느낄지도 모를 불안함과 막막함도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가는 상황과 감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처럼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최대한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꾸준히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을 지나오며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은 오직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은 ‘made by me.’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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