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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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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l 11. 2020

EP 26) 폭풍전야. 선택은 각자의 몫.

episode 26.


일교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유난히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1월. 도심의 빌딩 숲 사이사이를 누비는 얼음장 같은 바람이 오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바짝 여미게 했다. 밤이 엄습하자 거리 곳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 위로 현란한 불빛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야간수업을 마친 경미는 자리에 앉아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일러스트를 볼 때마다 현수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던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수야. 나야, 경미.”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요즘 왜 학원에 코빼기도 안 비춰?”

“수강 끝났잖아. 그리고 나 취직했어.”

“그랬지 참. 취직했어?, 축하해, 정말 잘 됐다.”

“고마워. 별일 없지?”

“응. 딱히 별일은 없는데..”

나 지금 일하는 중이거든?”

“현수야, 잠깐만. 끊지 마.”


그간 현수는 경미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친구들의 격려 아닌 격려에 하루 걸러 하루 조금씩, 아주 조금씩 경미를 잊으려 노력하며 지냈다. 그랬던 현수는 경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된 기분이었다.


“너한테 고맙다는 말은 해야 될 것 같아서.”

“뭐가 고마운데?”

“그냥.., 이것저것.”

“싱겁기는.”

“나, 고백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고.

“잘 생각했어.

“그동안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줄곧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던 것 같아. 지금까지는 내 자신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 말을 듣고 나니까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있잖아, 막상 고백하려니까 괜히 무섭고 막 떨리는 거 있지?”

“무서운 건 누구나 다 똑같을걸?,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경미야, 겁부터 잔뜩 먹고 도망칠 궁리만 하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곧 학원 임대계약이 끝나. 그래서 말인데 정완 오빠한테 거절당하면 학원 옮기려고.”

“너 바보야?, 왜 자꾸 도망 생각부터 해?, 그때처럼 또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또다시 상처 주려고?”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주치면 서로 민망할 것 같으니까.”

“먼저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지는 거야. 똑바로 마주설 수 없을 것 같으면 다음으로 미뤄. 괜히 무리해서 뒷걸음질 치다 넘어지지 말고. 이제 나는 네가 넘어지더라도 일으켜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나 참 꼴사납다. 그치?”

“이제 알았어?, 실연당한 남자한테 이상한 말이나 하게 만들고 말이야.”

“아무튼, 고마워 현수야. 너한테는 참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동정하지 마.”

“따라하지 마.”

“경미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알았어. 그렇게 해볼게.”

“그럼 끊는다.”


현수는 회복 중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가슴이 쪼개지는 듯 아팠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은 자중하기로 했다. 그저 경미가 상처받지 않기를, 부디 다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날 밤. 인천공항에 도착한 정완은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나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완은 주머니에서 손을 넣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두터운 입김을 가르며 택시정류장에 도착한 정완은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휴대폰의 전원은 꺼져있었다. 빡빡한 일정을 며칠째 강행했던 정완은 미처 휴대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겠지만 연거푸 하품을 할 정도로 피로가 누적되었던 정완은 잔뜩 위축된 몸으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정완은 가장 먼저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여행가방을 열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완은 부피가 큰 세탁물부터 꺼내놓았고 자질구레한 짐들을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남아있던 작은 짐들을 마저 꺼내던 그때, 혹시나 싶어 챙겨갔던 수면제가 담긴 약봉투를 발견했다. 정완은 자신이 수면제를 처방받아갔던 것도 잊어버릴 만큼 이번 여행이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가슴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무언가를 게워내고 싶었던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이었다. 분명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이었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완은 지금 이 순간 게워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게워냈다는 것을 느꼈고, 한없어 무겁기만 했던 마음은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져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게워내고 또 게워내려 해도 선영만큼은 게워낼 수 없는 존재였다. 선영뿐 아니라 선영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 역시 게워내고 싶다고 해서 게워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깊이 새겼다. 여행에 다녀온 흔적을 말끔하게 정리한 정완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날 밤, 정완의 꿈속에는 오랜만에 선영이 찾아왔다. 정완은 남아있는 인생의 모든 행복을 다 써버려도 좋을 만큼 행복한 단꿈에 흠뻑 젖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티끌 하나 없이 말갛게 개어있는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요 며칠 평년보다 높은 낮 기온을 유지해온 터라 봄의 발자취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깬 정완은 밤새 충전기에 꼽혀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마자 그동안 확인하지 않았던 메시지와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정완은 알림 소리와 진동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스턴트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맛이었지만 그리웠던 맛이었다. 정완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아 채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에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너무 가까워지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기에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정완의 머릿속은 자신이 느낀 커다란 깨달음을 함축시킨 문장을 선영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휴대폰에서 울려대던 각종 알림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정완은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작사를 의뢰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간 이렇다 할 일거리가 없어서 잔뜩 실망하고 있던 정완에게는 꽤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작업실로 갈 채비를 하면서 두 번째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민수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민수의 메시지를 본 정완은 현관문을 나서며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완이 형?, 도착하신 거예요?”

응. 너한테 가장 먼저 전화하는 거야. 약속 지켰다.”

갑자기 좋은 일이 두 개나 생기는 바람에 가장 먼저 형한테 알려드리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좋은 일?”

“전에, 형이랑 노래했던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엄청 좋아요. 그 영상 때문에 구독자도 많이 늘었어요.”

“정말?, 너도 이제 유튜브 스타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형. 이메일 받으신 거 있죠?, 곡에 관한 이메일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 작사를 부탁한다는 메일이 두 개 있더라고.”

“두 개씩이 나요?, 축하해요 형. 아마 그중에 한 곳은 저랑 같은 곳일 테니까 갈 때 저랑 같이 가요.”

“이야, 웬일로 의뢰가 들어왔나 했더니 네 덕분이었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같이 연주하고 노래한 거잖아요. 서로 윈윈 한 거라고요.”

어쨌든 새해벽두부터 좋은 일이 생기니까 기분 좋네. 고맙다 민수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형이랑 만난 건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행운은 무슨, 인연이지.”

“아참, 형도 영상 한번 보세요. 감회가 새로울 걸요?, 편집을 조금 더니 느낌이 색다르더라고요.”

“네 채널 홍보하는 중이야?, 구독이랑 좋아요도 눌러줘야 돼?”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래, 그렇게 할게. 다음에 또 통화하자.”

“형, 잠시만요.”

“왜?”

“영상에 댓글이 엄청 많이 달렸는데, 그중에 제가 조금 특별한 댓글을 봤거든요?”

“어떤 거?”

“'JSYW0412'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이었는데.., 짚이는 사람 없어요?, 그 댓글을 본 순간 저희가 부른 노래에 마치 답장을 해주는 느낌이었요. 덧붙여 말하면 편곡해서 답가로 써도 될 정도로요.

글쎄다.., 근데, 답가라니?”

“일단 한번 보세요. 유튜브 검색창에 제 이름으로 검색하면 볼 수 있어요.”

“알았어. 그럼 또 연락할게.”


민수와 통화를 마친 정완은 작업실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창밖의 익숙한 풍경을 감상하던 정완은 궁금증을 자아낸 민수의 마지막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휴대폰을 꺼내 든 정완은 민수와 자신이 함께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곧 해당 영상을 찾은 정완은 영상을 재생하지도 않은 채 적혀있던 댓글을 먼저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JSYW0412'라는 닉네임이 남긴 댓글을 발견했다. 그 댓글을 읽어본 정완은 단숨에 'JSYW0412'의 정체가 선영임을 알아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빌었던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누군가가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버스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정완은 버스에서 내린 후, 작업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자신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았다. 그러나 볼륨을 아무리 높여 보아도 곳곳에 울려 퍼지는 생활소음 때문에 민수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영상 또한 햇빛에 반사되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작업실에 가서 다시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정완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작업로 향했다.


“경미야, 잘 있었어?”

“오빠!”


경미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기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몹시 반가웠던 경미는 정완을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집기류를 던지듯 내려놓고 정완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오랜만에 본 정완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짙게 드리웠던 그늘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환하게 웃어 보이는 정완의 표정에서 여유로움마저 느껴지자 경미는 물 밀 듯이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왜 그래, 경미야. 설마 배고파서 우는 건 아니지?

“보고 싶었어요. 오빠, 이거 꿈 아니죠?”

“꿈은 무슨..,  하여튼 경미 너는 진짜 특이하다니까.”

“오빠,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저녁?, 딱히 약속은 없는데. 이따 기획사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없어.”

“그럼 같이 저녁 먹어요. 전에 오빠가 남자 친구 생기면 근사한 데 가서 밥 사준다고 약속했었잖아요.”

“아, 맞다. 약속은 지켜야지. 나 없는 동안 현수랑 화해했나 봐?”

“장소는 내가 정해도 되죠?”

“그래, 그렇게 해. 장소랑 시간 정해지면 메시지 보내줘.”


경미는 계속되는 두근거림과 긴장감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떨고 있었다. 작업실로 향하는 정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경미는 온몸에 열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기분에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경미야, 여기 네가 청소했어?”

“네. 사무실 청소도 할 겸, 겸사겸사 했어요.”

“미안하게 청소까지 하고 그래. 근데, 이 디퓨져 냄새 너무 좋다. 고마워.”

“아참, 오빠. 우리 다음 달에 사무실 계약 만기일인 거 알고 있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네.”

“오빠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나는 가능하다면 여기서 좀 더 있고 싶지. 또 그 고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이따 저녁 먹으면서 그 얘기도 마저 해요.”


경미는 더 이상 정완을 마주 보고 서있을 수 없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들킬세라 황급히 뒤를 돌아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작업실에 들어온 정완은 민수의 유튜브 채널에 올려진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과거 자신이 써 내려간 가사를 입힌 완성도 있는 노래를 끝까지 듣고 난 정완은 민수가 느낀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혼자 디지털피아노를 치면서 불규칙한 음정과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던 때와는 새삼 다른 감정이 전해졌다. 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댓글을 확인하던 정완은 선영이 남긴 댓글을 떠올렸다.


반짝이는 것만이 추억은 아니었어.

살아있는 매 순간이 반짝이고 있었다는 걸

잠시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해.


아직도 나는 네가 그리운가 봐.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하나 봐.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추억이

지금도 나를 울리고 있으니까.


정완은 곧장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선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동안 선영에게 온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읽은 정완은 선영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는 지수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한 후 전화를 걸었다.


“야, 박정완!, 지금까지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 연락해!”

“다들 격하게 반겨주는 분위기네. 잘 지냈어?”

“못 지냈다. 너 지금 어디야?”

“작업실이야. 어제 도착해서 한숨 푹 자고 방금 도착했어.”

내가 보내준 메시지 봤어?, 그 영상에서 피아노 치는 사람, 너지?”

소식 참 빠르네.

“기타 치던 사람이 영상 올린 거야?”

“응. 펜션 놀러 갔을 때 대차게 까였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믿기지 않겠지만 그 친구가 원곡자야.

“정말?”

“응, 인천공항에서부터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같이 있었어. 술 한 잔 하자길래 따라갔더니, 걔가 그 작곡가 더라고.”

“소감이 어떻데?, 착잡하고 절망적이고 막 그랬데?”

“너 내 친구 맞냐?, 가만 보면 친구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원곡자라면 충분히 그런 기분일 수 있겠던데 뭘.”

“내가 까일 거 알면서 들이댔던 그 느낌이랑 같았나 봐. 무명 작곡가의 설움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

“동병상련이다 뭐 그런 거야?, 하긴 노래하는 거 보니까 둘 엄청 행복해 보이긴 하더라.”

“영상 보니까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줄곧 밝고 희망적인 예쁜 이야기로 가사를 썼던 내 자신이 조금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가식적이기는.., 마음의 거울이라며?, 네 희망과 바람을 담은 게 어째서 가식이야?”

“모르겠어. 오늘 이메일을 확인해보니까 작사 의뢰가 두 개나 들어왔더라고. 아마도 대충 느낌은 오는데,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야. 나도 이제 솔직해져야 할 것 같으니까.”

“안 본 사이에 철들었네. 그래서 선영이한테는 연락해봤고?”

“당연하지. 너보다 먼저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한창 바쁠 시간이겠지 뭐.”

“나, 이제 너희 두 사람 걱정 안 하기로 했어. 은영 언니랑도 많이 얘기해봤는데, 언니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아.”

“나도 하나 절실히 느낀 게 있어. 억지로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어긋나 버린다는 거.”

“깨달음을 얻어왔다니 헛된 여행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 당연하지. 결혼 준비는 잘하고 있어?”

“경미한테 청첩장 주고 왔는데, 아직 못 받았어?”

“응, 청첩장까지 나왔으면 이제 다 한 거나 마찬가지네. 식장은?”

“그냥 스몰웨딩 하려고.”

“아쉽지 않겠어?”

“누군들 크고 화려하게 안 하고 싶겠니. 그래도 불만은 없어. 병준이도 같은 생각이고.”

“일사천리네.., 추진력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니까.”

“너도 추진력 좋잖아. 결혼 빼고.”

“아픈 데는 건들지 마라. 거기에 대해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까.”

정완아. 서두르라고 바람 넣지 않을게. 대신, 조급해하는 선영이나 좀 잘 달래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일본에 있는 동안 결혼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했거든?, 왜 결혼을 자꾸 망설이게 될까, 왜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까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해봤어.”

“정말 거기까지 생각해 본거야?

“응. 혼자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니까, 금세 결론까지 도달하게 되더라고.”

“결론이 뭔데?”

“부모가 되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 솔직히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었어. 나로 인해 태어난 소중한 생명을 책임질 의지가 결여됐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내가 그 결론에 첨언하자면, 처음부터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자신 있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걱정은 조금씩 나눠서 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해. 낳을 때 조금, 키워가면서 조금,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 그렇게 조금씩 나눠서 받아들이면 겁먹어가며 자신 없어하던 예전의 네 모습도 웃으면서 되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그러니까 정완아, 너무 앞서가면서 살지 마.”

“일시불로 걱정하지 말고, 할부로 걱정하라 이 말이야?”

“그래, 아무튼 너무 멀리까지 내다보지 말라고. 나라고 뭐 걱정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는 줄 알아?, 인생 2막에 도전장을 내미는 심정이 마냥 설레고 즐거운 줄 아니?, 앞으로 다가올 3막, 4막은 어떻고?, 미리부터 걱정하기 시작하면 머리만 아플 뿐이야.”

“하긴, 너도 사람인데. 그나저나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다. 미팅이 있거든.”

“아, 맞다. 혹시 경미가.., 아니다. 그럼 잘 다녀와.”

“응?, 경미가 왜?”

“경미한테 청첩장 맡겼으니까 받으라고.”

알았어.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 시간 되면 식 올리기 전에 병준이랑 같이 밥 한 끼 하자.”

“그래, 조만간 우리 신혼집에서 다 같이 밥 먹자.”


정완은 지수와 전화를 끊고 작업실에서 나와 오후 수업을 준비하고 있 경미를 불렀다.


“경미야, 지수가 청첩장 다며?”

“네. 청첩장이랑, 오빠 차키랑 작업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어요.”

“아, 거기다 뒀구나. 고마워.”

“지금 나가려고요?”

“응, 미팅이 잡혀서.”

“이따 저녁 약속한 거, 절대 잊으면 안 돼요.”

“시간이랑 장소는?”

“아직 생각 중이에요. 이따 수업 끝나면 연락할게요.”

“알았어, 그럼 이따 보자.”


정완은 작업실에 돌아가 서랍을 열어 청첩장과 자신의 차키를 꺼내 들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완이 차에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확인하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정완아. 어디야?, 아직 일본이야?”

“경미가 말해줬구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지금 그게 중요해?, 돌아온 거냐고.”

“응. 어제 도착해서 실컷 자고 출근했어. 지금 작사 의뢰 들어온 것 때문에 기획사에 가려.”


정완의 목소리를 들은 선영은 단단하게 얼어있던 가슴속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잿빛으로 뒤덮여있던 선영의 가슴속에는 가닥가닥으로 된 눈부신 빛줄기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뻗어 나고 있었다.


정완아.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이 바보야.”

“그래서 내가 있던 곳을 그렇게 찾아다녔?”

“댓글 봤구나?, 모를 줄 알았는데..”

“나도 보고 싶다. 많이..”

“저녁에 만나자. 퇴근하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오늘?, 오늘은 좀 곤란한데.”

“왜?, 약속 있어?”

“경미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해서. 예전에 약속했도 있고, 미안한 것도 좀 있어서.”

“경미 씨랑?”

“응. 오래전에 약속한 거라 거절하기가 좀 그래.”

“꼭 가야 돼?, 안 가면 안 돼?”

“선영아.. ”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가야 되는 상황인 거지?”

“그러니까 그게..”

“다녀와 그럼.”

“화났어?”

“아니야, 화 안 났어. 정말 괜찮으니까 다녀와. 그 대신 밥 다 먹으면 차는 나랑 마셔. 기다릴게.”

“그럼 내가 미안해지잖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다리고 싶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

“그러면 최대한 빨리 먹고 나올게. 화내지 마, 알겠지?”

“화 안 낼 거니까 걱정 마. 또 회의 있으니까 이따 밥 다 먹으면 우리 마지막으로 봤던 그 카페로 올래?, 거기서 만나자.”


선영이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정완은 곧이곧대로 선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선영이 일촉즉발의 순간을 억지로 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도 정완은 계속 선영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로 몇 번이나 선영의 기분을 물었지만 선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완에게 언성을 높여가며 신경질을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선영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정완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며 화를 내거나 울지 않았다. 조금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선영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나 그런 감정을 이겨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미의 진심을 확인한 정완이 어떤 결과를 내놓더라도 그 결과를 따르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선영은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적진의 한 복판으로 걸어가는 정완을 순순히 보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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