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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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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6. 2020

EP 15) 스스로 둘러놓은 울타리. 진심을 깨닫다.

episode 15.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있던 정완은 경미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오늘 사무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경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갈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정확히 오전 9시가 되자 발목에 붕대를 감은 경미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완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버선발로 경미를 맞이했다.


“경미야 괜찮아?, 걱정했잖아. 많이 다친 거야?, 뭐 하러 부모님한테 연락을 했어, 나한테 얘기하지. 미안하다 진짜.”

“오빠. 다치니까 참 좋네요.”

“뭐라고?”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오빠도 알다시피 내가 자기 관리 하나는 철저하잖아요. 발목에 흉터라도 남을까 싶어서 급한 마음에 아빠한테 전화했어요.”

“흉터?, 그 정도로 상처가 심했나?”

“생각보다 많이 다쳤다고요.”

“현수한테는 연락했어?

“이따 저녁에 오면 볼 건데요 뭘.”

“현수가 네 걱정 많이 했어. 나보다 훨씬 많이.”

“별걱정을 다하네요.”

“휴대폰 충전부터 해. 배터리 없더라.”


경미는 정완이 내미는 휴대폰을 받고는 충전기에 연결했다. 문득 카메라가 떠오른 경미는 정완이 혹시나 카메라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정완을 떠보았다.


“그나저나 제 카메라 못 봤어요?”

“글쎄, 네 짐은 현수가 차에 실었는데?”

“그럼 캐리어에 있겠네요. 이따 찾아볼게요. 고마워요 오빠.”

“고맙기는, 어쨌든 많이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다.”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정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경미는 정완이 자신의 카메라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경미는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정완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냈다.


“정완 오빠.”

“응?”

“저는요.., 상처받는 게 싫어요.”

“상처받는 게 좋은 사람이 있을까?”

“혹시라도 흉터가 생겨서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상처를 받았던 그때가 자꾸 생각날까 봐.., 그게 너무 싫어요.”

“미안, 신경 못써줘서 진짜 미안. 하필 그때 선영이랑 싸울 줄이야..”

“오빠는 참 둔한 것 같아요.”

“내가?”


경미는 그만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상처받는 것이 싫다고, 흉터가 생기면 그때가 생각이 날까 무섭다고 말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정완이 정말 둔감하다고 느꼈다.


“네, 오빠처럼 둔한 사람 처음 봤어요.”

“에이, 설마.”

“선영언니도 여자예요. 다른 여자한테 관심 주면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고요. 나 같았어도 그랬을 거예요.”


선영의 이야기로 얼버무리니 그럭저럭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었다고 생각한 경미는 캐리어를 열어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책상 서랍에 넣었다. 경미가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메시지가 쏟아졌다. 윤지와 진희가 보낸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경미는 곧장 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미가 휴대폰을 확인하는 동안 정완은 곡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도대체 휴대폰까지 꺼놓고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일이 좀 있어서. 왜 전화했어?”

“선우 오빠 거기 갔었다며?”

“그게 뭐?”

“아무 일도 없었어?, 선우 오빠가 너한테 꼭 해야 될 말이 있다고 하도 조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주소 알려줬어. 미안해 경미야.”

“주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잖아. 그냥 전화로 하라 그러지.”

“네가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내 전화도 잘 안 받으면서.”

“그랬나?, 뭐 어쨌든 지나간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윤지 생일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한다더니 연락도 없고, 선우 오빠가 너 찾아갔다는 얘기 들으니까 걱정돼서..”

“그 인간은 아직도 너희들한테 보고하고 다니니?, 줏대 없기는..”

“경미야, 그런 거 아니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선우 오빠는 진심으로 너를 좋아했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설령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제 와서 굳이 알릴 필요는 없어 진희야. 진실이고 뭐고 지금의 나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윤지도 네 걱정 많이 했어. 윤지 생일날 너한테 했던 말도 전부다 너를 위한 거였다고.”

“윤지가?, 혜정이랑 선우 오빠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를 위해서였다고?”

“너, 선우 오빠랑 헤어지고 난 뒤로 모임에 안 나온 거 알아?, 그때부터 연락도 잘 안됐고.”

“배신감도 들었지만 솔직히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어. 그리고 너희들 만나면 자꾸 그때가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상처받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따지고 보면 피해자가 너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아.”

“그만해 진희야. 다 지난 일이야.”

“경미야.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 위로받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지 마. 우리는 네 편이야. 우리는 네 친구지 선우 오빠 친구가 아니야. 힘들면 마음껏 기대도 좋고, 화가 나면 얼마든지 투정 부려도 된다고.”

“근데 왜 나한테만 숨겼어?, 왜 나만 소외감 느끼게 만들었어?”

“말하려고 했어. 전부다 하나도 빠짐없이 너한테 말해주고 선우 오빠 실컷 욕해주려고 했어. 그럴 때마다 너는 들 생각도 없이 피하기만 했잖아. 몇 날 며칠이고 숨기에만 급급했잖아.”


생각해보니 진희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미는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믿었다. 어쩌면 이 비극적인 결말은 경미 자신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결과만을 받아들일 뿐, 과정이나 이유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경미는 그저 미움받기 싫었고 상처받기 싫었다는 이유로 스스로가 만든 거대한 울타리 안에 고립된 채, 외톨이를 자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 오빠가 너 찾아간 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진실일 거야. 분명 진심으로 하는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 윤지 일도 마찬가지야. 그만 훌훌 털어버리고 예전처럼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마음은 우리 모두 똑같으니까.”

“진희야. 우리 이번 주말에 만날래?, 윤지도 같이.”

“응. 꼭 그렇게 하자.”

“배터리 없으니까, 내가 퇴근하면 전화할게.”

“알겠어. 오늘은 전화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 거야.”

“이제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아. 고마워 진희야.”


경미는 전화를 끊고 선우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높다란 울타리 안에 갇힌 경미를 꺼내 주고 싶어 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지나버린 감정도, 지금 느껴지는 감정도 모두 자신이 만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픈 추억이었고 비참한 기억이라고만 생각했다. 같은 기억을 떠올려야만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다는 정완의 노래 가사처럼, 각자가 떠올리는 부분적인 기억은 분명 차이가 있었지만 경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일관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시야를 넓게 펼쳐 보았을 때, 그것 역시 추억이라 부를 수 있었다. 서로가 추억을 간직하는 방식의 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추억을 공유하는 방식에 착오가 있던 것뿐,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 그 시절은 왜곡된 것이 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경미는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다.


“오빠, 저 병원 좀 다녀올게요.”

“병원에는 왜?”

“피부과요. 흉 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 나도 거의 다 했어. 오늘 중으로 마무리될 것 같아.”

“전에 기획사 모임 갔을 때 만났던 작곡가분이 부탁한 거요?”

“응, 이제 또 당분간 백수생활이겠구나..”

“좌절하지 마요. 그럼 다녀올게요.”


경미는 정완에게 인사를 한 뒤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곡 작업을 마무리한 정완은 작업실에서 나와 인스턴트커피에 물을 붓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수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정완아. 나왔어.”

“어쩐 일이야?”

“볼 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다가,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 경미도 잠깐 보고 가려고.”

“경미 조금 전에 병원 갔는데.”

“많이 다친 거래?”

“모르겠어. 흉터 남는 게 싫다더라고.”

“그렇구나..”

“너도 커피 한잔 줄까?”

“응. 물 많이 붓지 마. 네가 타 주는 커피는 너무 싱거워.”


정완은 종이컵을 들고 작업실로 지수를 안내했다. 정완은 작업실을 대충 정리하고 의자에 앉았다. 지수는 소파에 앉아 여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너랑 병준이랑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

“정말?, 선영이도?”

“응. 선영이 데리고 계단까지 내려왔는데도 전혀 모르더라?”

“병준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까, 왠지 내 얘기처럼 들려서 나도 모르게 집중했나 봐.”


정완이 커피 잔을 비우는 동안 지수는 정완이 타 준 커피를 손에 쥐고만 있을 뿐,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수는 정완과 병준이 나누던 이야기를 듣게 된 것부터 선영과 자신이 펜션 뒤에 숨어있던 일, 그리고 병준의 팔짱을 끼고 펜션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상황을 낱낱이 말한 후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은 터져버릴 것처럼 쿵쾅거리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건 무슨 감정인데?, 좋아 죽겠다는 아닌 것 같고..”

“모르겠어. 그냥 내 마음이 닿았나 하는 생각에 두근거렸고, 너무 깊숙이 닿은 것 같아서 슬펐어.”

“어쨌든 잘 됐네. 이제 불확실성에 주눅 들 이유가 없어진 거니까.”

“나만 입 닫고 눈 감고 있으면 평화가 유지될 줄 알았거든?, 나만 조심하면 병준이랑 유지해온 관계가 뒤틀어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뭘 고민해?, 병준이도 너랑 같은 마음이잖아. 확인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어쩌긴 뭘 어째.”

“변수라는 게 있잖아. 만에 하나라는 게 존재하니까.”

“너 정말 병준이 많이 좋아하는구나?”

“응. 잃게 될까 봐 두렵다던 병준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봐.”

“걱정 마 지수야. 따라가겠다며?, 그럼 조용히 병준이만 따라가면 되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쫓아가지 못할 만큼 떨어져 걸으면 그때는 어떡해?”

“업고 가겠지 병준이는. 분명히 업고라도 갈 사람이야. 그 정도 신뢰는 줬잖아?, 그럼 믿어. 믿었으면 절대 의심하지 말고.”


또 한 번 크게 한숨을 쉰 지수는 고개를 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털어놓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선영이도 매번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거겠지?”

“뭐, 사람이라면 다 똑같지 않을까?, 의지할 곳이 필요하고, 기댈 곳이 필요한 게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너, 선영이랑 화해는 잘 한 거지?”

“아무 문제없어. 지금이 딱 좋아. 예전보다 잘 웃고 말도 꽤 많아졌으니까.”

“다행이다.”

“이제 선영이랑 내 걱정은 그만하고 네 걱정이나 해. 우리 곧 서른하나야.”

“나이 얘기 좀 하지 마. 누가 내 나이 모른데?, 예민하게 만드네.”


지수는 오랜만에 정완에게 허물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 같은 기분에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병준을 알기 전에는 어쩌다 한 번씩 정완에게 의지를 하곤 했다. 당시의 지수 주변에는 현실적이고 편견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련하게 비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지수는 크게 웃으며 정완과 장난을 쳤다. 그때 병원에 다녀온 경미는 살짝 열려있는 작업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정완과 지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남의 개인정보 모으는 게 취미인가 봐?”


현수는 작업실 문 옆에서 정완과 지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미의 뺨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댔다.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크게 놀란 경미는 뒷걸음질을 치며 현수의 말에 대꾸했다.


“이게 무슨 개인정보야?”

“대화도 엄연히 정보거든?”

“친한 척하지 말랬지?, 딱 하루만이라고 내가 얘기했잖아.”

“미안. 자꾸 주제넘게 끼어들어서.”


경미는 정완에게 들킬까 봐 황급히 사무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수는 커피를 들고 경미를 따라갔다.


“정완이 형이랑 선영이 누나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나 봐?”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같은 말 하게 만들지 마.”

“두 사람이 완전히 끝난 걸 확인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다시 만나는 걸 확인해서 내 마음은 순수한 짝사랑이었다고 합리화시키고 싶은 거야?”

“야!, 정현수!”

“목소리 낮춰.”


현수는 경미의 팔을 잡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정완과 지수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작업실 문을 열고 사무실로 나왔다. 지수는 경미에게 곧장 가보려 했지만 정완은 지수를 붙잡았다.


“그날, 현수랑 경미랑 다툰 모양이야.”

“그랬어?”

“응, 그냥 다시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잠자코 있자.”

“그래.., 괜히 나섰다가 또 욕 얻어먹을라.”

“현수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야, 일단 후퇴하자.”


정완과 지수는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편 밖으로 나온 현수와 경미는 또 한 번 거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얘기해줄게, 두 사람 다시 잘 만나게 됐어. 이제 속이 후련해?”

“누가 궁금하데?”

“직접 물어볼 용기가 없으니 몰래 엿들을 수밖에.”

“빈정대지 마. 불쾌하니까.”

“나도 불쾌해.”

“네가 왜 불쾌한데?”

“내 사과를 무시하는 네가 불쾌하고, 너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서 불쾌해.”


경미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현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나머지 경미는 현수를 등진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실의 창문 너머로 경미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지수는 곧장 문을 열고 경미에게 다가갔다.


“경미야.”

“어머, 지수 언니. 언제 왔어요?”

“많이 다친 거야?, 말도 없이 가버리면 어떡해. 다들 걱정했잖아.”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나야말로 미안해. 네 마음 짓밟으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면서 따라간 제 잘못이죠 뭐.”

“아니야 경미야, 내가 나빴어. 정완이랑 선영이 때문에 너한테까지 불똥 튀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도 않았어요. 정말 괜찮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그래.., 근데 현수는 왜 안 들어오고 밖에 저러고 있어?, 그날 싸웠다면서?, 아직도 냉전 중이야?”

“그렇게 됐어요.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튼 진짜 진짜 미안해. 이 말이 꼭 하고 싶어서 왔어.” 


지수는 작업실에 있는 정완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 있는 경미에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개운해진 마음으로 사무실 밖으로 나왔을 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던 현수가 지수에게 말했다.


“누나의 뻔뻔함의 끝은 어디쯤일까요?

“현수야, 누나가 미안해. 경미한테도 제대로 사과했으니까 기분 풀어.”

“그 여행은 누구를 위한 여행이었을까요?”

“이제 그만하자. 응?”

“누누이 말하지만 저한테 사과하실 거 없어요. 저는 누나가 싫으니까요.”

“정말 이럴 거니?”

“저는 본인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남 이사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증오해요. 안하무인, 후안무치, 인면수심. 무슨 뜻인 줄 알죠?, 앞으로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현수야!, 현수야!”


현수는 그대로 사무실에 들어가 가방을 챙겨 강의실로 들어갔다.


지수는 현수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하지만 지수는 현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 친구인척 하는 연극이 끝났음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거침없는 말을 내뱉는 현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미는 야간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완은 경미에게 오늘 마무리한 곡을 들고 작곡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을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십여 분 뒤, 수강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작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시간이 흘러 야간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썰물 빠지듯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현수는 아직 강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 퇴근할 거야. 빨리 안 나오면 불 끄고 문 잠근다?”

“불쾌하다는 말은 뺄게. 좋아해 경미야. 네가 좋아.”

“불쾌해도 상관없으니까 그만 좀 나오지?”


현수는 하는 수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경미는 사무실에 켜져 있는 불을 모두 끄고 정완의 작업실에 켜져 있던 불도 껐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려 하던 그때, 현수가 경미를 불러 세웠다.


“경미야.”

“너한테 좋아해 달라고 한 적 없으니까 좋아하지 마. 아니, 관심도 갖지 마.”

“사과라도 좀 받아주면 안 돼?, 그게 뭐라고 안 받아주는 건데?”

“나한테 뭔가를 바라면 그 길로 끝이라는 말 잊었어?, 인사도 안 받아줘야 알아듣겠니?”

“착각하는 것도 아니고 집적대는 것도 아니야. 비밀을 빌미로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말했잖아. 널 좋아하게 됐다고.”

“웃겨 진짜. 나는 관심 없으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봐.”


경미는 사무실 문을 잠그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진희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며 어둑한 골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현수는 굳게 문이 닫힌 사무실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며칠 후 선영의 아버지는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새로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오전에 입원을 하는 바람에 선영은 동행할 수 없었다. 은영은 아버지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가기 전, 선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실에 앉아계신 아버지는 신문을 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챙겨 온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영아. 아빠 입원 수속 마쳤어.-

-같이 못 가서 미안해.-

                                                                         -회사는 가야지. 이쪽은 걱정 말고 퇴근하면 들러.-  

-응. 야간에도 면회 가능한 거지?-

                                                                          -당연하지. 정완이랑 같이 올 수 있으면 같이 오고.-

-알았어. 물어보고 시간 맞으면 같이 갈게.-

                                                                                                              -그래, 수고해. 이따 봐.-


선영은 아버지의 입원 소식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쓰러진 것이 아니었기에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장담할 수 없는 검사 결과를 생각하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선영은 온종일 불안해했다. 퇴근 후, 선영은 곧바로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정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완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쯤 정완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응, 선영아.-

                                                                                             -일하는 중이라 전화받기가 좀 그래.-

-정완아. 오늘 우리 아빠 입원했어.-

                                                                                                          -오늘?, 조직검사 때문에?-

-응, 그 병원이 췌장 쪽으로는 꽤나 유명한가 봐.-

                                                                                               -그렇구나.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갈 수 있어?-

                                                                                            -지금 그때 그 작곡가랑 미팅 중이야.-

                                                                                                                -작업이 오늘 끝났어.-

                                                                                       -그래서 낮부터 지금까지 미팅 중이거든.-

-그렇구나. 그럼 같이 못 가겠네.-

                                                                                                            -병원 주소 좀 알려줄래?-

                                                                                                     -미팅 끝나는 데로 바로 갈게.-

-응. 무리해서 올 필요는 없으니까, 올 수 있으면 와.-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가야지.-


선영은 퇴근을 마치고 차를 몰아 아버지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언제 입원한다고 미리 말한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섭섭해할 필요는 없었다. 무리해서 올 필요는 없다고 말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정완이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 주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선영이 병원에 도착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정완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쁜 숨을 내쉬며 아버지가 누워계신 병상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필 오늘 작업이 끝나는 바람에..”

“정완이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지?”

“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지난번에 찾아뵙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다. 너도 엄연히 네 할 일이 있는데, 그런 거 하나 이해 못 할까.”

“검사는 잘 받으셨어요?”


은영은 주스를 꺼내 정완에게 건네주며 살갑게 반겨주었다. 선영의 어머니가 정완이 앉을자리를 만들어 주자 정완은 겉옷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정완이 자리에 앉자 은영이 말했다.


조직검사받기 전에 무슨 검사를 또 해야 하나 봐.”

“무슨 검사가 그렇게나 많데요?”

“모르지 뭐.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선영이는요?”

“화장실.”

“누나는 오전부터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응. 신랑도 일하러 가고, 선영이도 일하러 갔으니 할 일없는 사람이 와야지 별수 있니?”

“저한테 전화라도 하시지..”

“너도 뻔히 일하고 있는 거 아는데 뭘 나중에 선영이랑 결혼만 해봐, 아주 실컷 부려먹어 줄 테니까.”


화장실에 다녀온 선영이 병실에 들어오자 병실의 분위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선영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선영의 옆에 섰다.


“정완아.”

“네, 아버지.”

“그나저나 우리 선영이랑은 언제 결혼할 거야?”

“결혼이요?, 해야죠. 해야 되는데 그게..”

“우리 막내까지 시집을 보내야 내가 편하게 눈을 감을 텐데 말이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죠.”


진중한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류했다. 정완에게 부담을 주려고 병문안을 오라고 했던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던 어머니는 연신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와 7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어머니는 정완이 부디 하루빨리 선영과 가약을 맺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컸다.


“아버지, 어머니. 이번 생에서 저한테 여자는 선영이뿐이에요.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이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정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영이 정완에게 말했다.


“7년이나 줬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필요해?, 결혼은 그냥 하는 거야. 해야겠다 싶을 때 하는 거라고. 얘는 아직도 그걸 모르네.”

“언니, 나도 언니 생각에 한 표!, 오랜만에 맞는 말 했네.”

“얘, 너도 잘한 거 하나 없어. 둘 다 똑같으니까 발전이 없는 거야. 정신 차려 이것들아.”


밤 10시가 가까워졌지만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로 병실은 시끌시끌했다. 시계를 슬쩍 쳐다본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싶은 노파심에 은영과 선영 그리고 정완을 병실에서 내쫓듯이 내보냈다. 검사 결과 나오면 그때 다시 오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어머니는 병실의  문을 닫았다. 누군가 운전을 해서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각자가 가져온 차량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차량을 찾아 지하주차장에서 뿔뿔이 흩어진 세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집으로 가는 동안 오늘 했던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던 선영은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선영아.”

“벨트 맸어?”

“당연하지. 요즘 때가 어느 때인데.”

“정완아, 오늘 우리 아빠가 부담 준거 아니지?”

“부담은 무슨.., 내가 그저 죄송할 뿐이지.”

“부담이 아니면 다행이고. 결혼 얘기만 나오면 주뼛거리는 네가 자꾸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불안해하지 마. 아까 했던 말 진심이야. 이번 생에 내 여자는 너뿐이라는 거.”

“우리 아빠.., 정말 괜찮은 거겠지?, 벌써부터 걱정하는 것도 아빠한테는 예의가 아닌 거겠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왜 벌써부터 걱정하냐고 했던 게 누구시더라?”

“그랬지 참, 근데 그게 내 마음대로 잘 안되네.”

“걱정하지 마.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이건 걱정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자.”

“알았어.”


집에 도착한 정완은 침대에 눕기 전 선영에게 줄 편지를 탁자에 세워보았다. 노력한 결과에 보람을 느끼기라도 하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마무리한 작업도 꽤나 성공적이었음에 만족하며 침대에 누운 정완은 지난 석 달 동안 일어난 일은 그저 자잘한 진통 같은 것이었다고 매듭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영과 여행을 다녀온 이후 수면제가 없이도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완은 잠들기 전, 더 이상은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저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행복할 뿐이었다.


병준과 지수는 여행에 다녀온 직후부터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 슬퍼하거나 울어야 안아주었던 일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줄 수 있게 되었고, 손끝을 떨며 잡을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던 손도 거리낌 없이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이제는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여섯 명의 삶에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미세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경미는 그동안 자신에게 상처라고만 생각했던 기억을 조금이나마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현수는 호기심으로 접근했던 작은 관심이 어느새 그 관심을 넘어섰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완과 선영도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각자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했다. 또한, 결혼을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정완의 생각이 미약하게나마 낙관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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