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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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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4. 2020

EP 10) 걸려있는 옷. 악순환의 고리.

episode 10.


선영은 곧장 지수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한 선영은 먼저 도착해 있는 지수를 발견했다. 지수는 굉장히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선영은 휴대폰을 꺼내 정완에게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며 외투를 벗었다. 하지만 정완은 아직도 선영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선영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크게 쉬며 테이블에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자마자 왜 한숨이야?”

“그냥.., 복지관은 잘 다녀왔어?”

“오늘도 아주 보람찬 하루를 보냈지.”

“그나저나 할 말이 뭐야?, 중요한 얘기야?”

“중요하지. 무지 중요한 얘기야.”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전에 말했던 여행, 기억나지?, 우리 여행 가자.”

“그 얘기였어?, 안 그래도 오늘 언니랑 얘기하다 보니까, 가고 싶은 의욕이 조금 생기긴 했어.”

“은영 언니가 뭐라고 했길래?”

“자기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가자 선영아. 어쨌든 가야 할 명분은 생긴 거잖아?”

“잠깐만. 금방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알았어. 얼른 다녀와.”


오밤중이 되어서야 정완은 잠에서 깨어났다.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기보다 기절했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정완은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실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하던 그때, 선영이 보내온 메시지를 발견한 정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리나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정완은 바로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정완아.”

“지수구나, 선영이랑 같이 있나 봐?”

“선영이 화장실 갔어.”

“선영이가 오전에 메시지 보낸 걸 이제야 봤네.”

“여태 뭐했길래?”

“잤어. 불면증이 도졌나 봐. 오전에 병원 가서 수면제 처방받고 왔어.”

“또?, 큰일이네 그거.”

“그러게 말이야. 선영이 오면 얘기 좀 해줘.”

“오면 전화하라고 할게.”


정완은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려던 정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어느새 빼곡히 자라 있는 수염을 만지던 그때, 불현듯 선영과 다투었던 그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완아. 도대체 면도는 언제 할 거야?, 너는 수염이 안 어울린다고 몇 번을 말해. 얼른 면도하자, 응?”

“어차피 내일 되면 또 자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밥은 왜 먹어?, 어차피 또 배고파질 텐데.”

“억지 부리지 마.”

“억지는 네가 부리고 있잖아. 너는 왜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는지 모르지?, 사람들이 왜 아침, 점심, 저녁밥을 정해진 시간에 먹는 건지 모르지?”

“그야 배고플 시간이니까 먹겠지.”

“너는 항상 네 맘대로야. 네 맘대로 굶고, 그러다 굶어 죽겠다 싶을 정도나 돼야 겨우 한 끼 먹잖아. 그러니까 자꾸 배탈이 나는 거고 소화도 잘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다 병나면 어떡할 건데?”

“억지로 밥 먹기 싫어. 그냥 배고프면 먹는 거지 왜 자꾸 잔소리야.”

“너랑은 말이 안 통해. 나 TV 볼 거니까 말 시키지 마.”


선영이 했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는 짤막한 후회가 스쳐가자 정완은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듯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정완은 세수를 한 후,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선영에게 보내야 할 편지를 만들기 위해 사무실로 갈 준비를 했다.



선영이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지수는 선영에게 정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했다.


“선영아, 방금 정완이한테 전화 왔었어.”

“정말?, 메시지 이제 봤나 보네..”

“잤데, 얼른 전화해봐.”

“응..”


선영은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손바닥이 촉촉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응, 선영아. 미안, 여태 잤어.”

“많이 바빠?, 지금까지 잠을 다 자고..”

“아니, 그건 아닌데..”

“오늘 너 만날까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게.., 내일은 어때?, 아니면 지금 잠깐이라도 볼까?”

“오늘은 지수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지금 막 만난 참이거든.”

“내일은?”

“내일 내가 연락할게. 아빠가 요즘 아프셔. 엄마도 좀 걱정되고.”

“그럼 조만간 만나자. 해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 보고 싶다 선영아.”

“나도..”


선영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테이블에 비치된 투박한 케이스에 담긴 티슈를 꺼내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지수는 그런 선영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수야. 나 잘했지?,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참았지?”

“잘했어. 잘 참았어.”

“아무래도 정완이랑 나랑 엇갈리는 중인가 봐.”

“엇갈리다니?”

“지난번 일도 그렇고.., 며칠 전에 네가 도서관에 있던 날, 그날도 사실 정완이 만나러 갔다가 허탕 쳤거든.”

“그래서 그랬구나.”

“참 신기하다.”

“뭐가 신기해?”

“엇갈리는 거 말이야. 예전에는 생각만 해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생각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 있지?, 오히려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면 더 어긋나게 되고, 연락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질수록 더 연락이 안 되니까 그게 너무 신기해. 너는 그런 적 없어?”

“내가 초능력자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거지 뭐.”

“이 엇갈림이 끝나려면 얼마나 더 가슴을 졸여야 할까?, 속상하다.”


주문한 아이스티와 커피가 나오자 지수는 지금이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선영의 심리를 읽은 지수는 어떻게든 선영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지수는 이번 여행으로 정완과 선영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싶었다.


“선영아.”

“응?”

“나, 궁금한 게 있어.”

“넌 참 궁금한 게 많아서 좋겠다.”

“시끄럽고, 이번에 내가 논문 쓴다고 했잖아.”

“응.”

“그래서 말인데,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속마음을 옷으로 비유해서 표현해봐.”

“사랑?, 옷?, 그게 무슨 상관이길래..”

“아무튼 해줄 수 있어?, 없어?, 중요한 거란 말이야.”

“잠깐만..”

“생각할 시간은 안 줄 거야. 지금 바로 말해.”

“지금 당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수는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선영은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옷에 비유해 말하기 시작했다.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는데..”


선영이 손끝으로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컵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느 날 친구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나를 불러 세웠어. 그러더니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옷을 보여주더라고. 나는 그 옷을 보자마자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첫눈에 반해버렸어. 그래서였는지 집에 가서도 자꾸만 그 옷이 생각나고 그 옷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 오랜 고심 끝에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그 옷을 사고 말겠다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친구와 걸었던 그 거리를 예닐곱 번 정도 지날 때쯤에서야 나는 그 옷을 손에 넣게 되었어. 근데 이상하게도 분명 옷가게에서 그 옷을 대충 걸쳐봤을 때는 딱 맞을 것 같고 너무 예뻤는데 집에 와서 다시 그 옷을 입어보니까 자꾸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더라고. 어떤 날에는 가슴이 조금 빈 것 같고, 어떤 날에는 엉덩이가 꽉 끼는 것 같고, 또 어떤 날에는 배가 볼록하게 나온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나는 그 옷을 최대한 예쁘게 입고 싶다는 생각에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도 시작했어.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그 옷을 다시 입어봤는데, 입어볼 때마다 그 옷이 딱 맞는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거 있지?, 결국 그 옷은 입는 날보다 걸려있던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 옷을 만지작거리면서 언젠가 딱 맞게 입을 수 있을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어. 물론, 다이어트와 운동은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나는 7년 동안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아무리 노력하고 기다려봤자 그 옷을 딱 맞게 입을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더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그 옷을 꺼내 입고 거울을 봤는데, 옷을 사고 싶어 했던 그때의 행복했던 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어. 그렇게나 노력을 하고 또 노력을 했는데도 어째서 나는 그 예쁜 옷을 딱 맞게 입을 수 없었던 걸까?, 어느 날부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하니까 눈물만 나오더라고. 나는 그 옷을 옷장에 넣어두려고 샀던 게 아니었는데..”


지수는 선영의 말이 끝나자 오늘의 날짜와 시간을 말한 뒤 녹음기를 껐다. 지수는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얻은 기분이었다. 정완이 생각하는 사랑을 옷으로 비유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정완과 선영은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쪽에 쐐기를 박았다. 이제 선영에게 증명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결심했다.


“정완이 또 불면증 왔나 봐.”

“불면증?, 가끔이었잖아.”

“정완이가 아까 얘기 안 했어?”

“응. 그냥 잤다고만 하던데?”

“오늘 아침에 전에 갔던 병원에서 수면제 처방받아왔데. 그거 먹자마자 세상모르고 잔 거래.”

“정말?, 큰일이네..”

“그나저나 선영아. 여행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는 해본 거야?”

“가고 싶긴 한데.., 모르겠다. 정완이가 안 오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걱정 마. 아마 정완이는 선영이 네가 온다고 하면 두말 않고 올걸?”

“네가 그걸 어떻게 장담해?”

“궁금하지?, 알려 줄까?”

“응. 알려줘. 빨리, 알려줘.”


지수는 선영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자마자 묘안이 떠올랐다. 게다가 확신까지 얻은 상황이니만큼 결정적인 한방만 날린다면 선영은 반드시 여행에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수는 방금 전에 꺼냈던 녹음기의 전원을 켜고 정완의 육성이 담긴 파일을 선영에게 들려주었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한 벌 샀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을 받았다고..-


정완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선영은 정완의 속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표현 하나하나가 선영의 가슴에 와닿아서인지 선영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녹음기에 끝까지 집중하던 선영은 정완의 음성이 끝나자 짧은 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지수는 이 상황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미리 꺼내놓은 손수건을 선영에게 건넸다.


“어때?, 이제 가야 할 이유가 확실히 생겼지?, 선영이 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 거지?”

“응, 충분해. 충분해졌어.”

“그럼 여행 가는 거다?”

“꼭 갈 거야.”


선영과 통화를 마친 정완은 조급해졌다. 선영과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선영에게 전해줄 편지만을 생각하며 사무실을 향해 차를 몰았다. 불이 꺼져있는 사무실 앞에 도착한 정완은 차에서 내려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잠겨있는 현관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넣었다. 하지만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의아한 생각에 사무실의 문을 손으로 살짝 밀자 문이 열렸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 황급히 사무실의 불을 켠 정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경미야?”


정완은 사무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던 경미를 발견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겠다며 활짝 웃어 보였던 경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완은 지금 시간이면 경미가 친구들과 한창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완 오빠?,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만나긴 했는데..”


정완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린 경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는 것이 힘겨워보였다. 정완은 서럽게 우는 경미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난감할 뿐이었다. 조심스레 경미의 옆으로 다가간 정완은 경미의 어깨를 짚으며 다독여주었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에요.”

“잘 안됐어?, 친구들이랑 뭔가 쌓여있던 거.., 풀지 못한 거야?”

“처음부터 쌓여있던 걸 생각 못했나 봐요.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간 거였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울음이 터진 경미는 차분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랬는데?, 그만 울어 경미야. 누가 보면 내가 너 울린 줄 알겠다. 응?”


정완은 일단 경미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그럼에도 울음을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자 정완은 냉장고에서 찬 음료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경미의 앞에 서서 경미가 조금이라도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울음을 그친 경미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어떤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고,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근데, 왜?”

“모르겠어요. 그냥 벌거벗겨진 기분이었어요. 다들 쉬쉬하는 것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는데, 나 자신이 뭔가 찔리는 게 많았나 봐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말하자면 길어요. 아무튼 오빠가 해준 얘기 듣고 나름 용기 내서 가본 건데, 결과는 이렇게 됐네요.”

“미안.., 정말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다.”


그때 갑자기 경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완을 마주 보며 섰다.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정완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죠?”

“응.., 정말 미안.

“그럼 나 좀 안아주면 안 돼요?”


정완은 당황했다. 하지만 눈물로 범벅이 된 경미의 얼굴을 본 정완은 경미의 말을 냉정하게 뿌리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해하던 그때, 경미가 먼저 정완을 끌어안았다. 어느 틈에 정완의 셔츠를 잡고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경미는 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경미의 행동에 그대로 굳어버린 정완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리 넓지 않은 자신의 가슴팍을 빌려주며 울지 말라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기, 경미야..”

“오빠, 잠깐만요. 5분만.., 딱 5분만요..”


한참 동안 정완의 품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던 경미는 정완이 자신의 등을 다독여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멈추었다. 정완의 품은 따듯했다. 그리고 편안했다. 잠시 후, 눈을 비비며 정완의 품에서 얼굴을 뗀 경미가 정완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완 오빠. 오빠 탓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마요.”

“아니야, 내가 괜한 소리 했지 뭐.”

“그래도 오늘 나쁘지 않았어요. 친구들 마음도 대충은 알게 됐고요.”

“응..”

“고마워요 오빠. 근데, 오빠는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아, 두고 간 게 생각나서. 오늘 마무리 지으려고.”

“저도 좀 도울까요?”

“아니야, 나 혼자 해야 되는 일이야.”

“선영언니랑 관련된 일이에요?”

“응, 뭐..”

“오빠. 실은 낮에 기획사 모임 갔던 날, 선영언니 왔었어요.”

“정말?”

“네. 언니가 알아서 한다더니 말 안 했나 봐요.”

“요즘 자꾸 어긋나기만 해. 정말 헤어지려는 징조인지 답답해 죽겠어. 그래서 통 잠도 못 자겠고.”

“오빠, 저 그만 가볼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가려고?”

“네, 집에 가서 씻고 푹 자고 싶어서요.”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가봐서 알잖아요. 걸어가도 금방이에요.”


경미는 더 이상 정완이 선영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대충 씻고 나온 경미는 정완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지수는 선영과 헤어지고 난 후 잔뜩 격앙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준아. 잘 들어갔어?”

“응, 선영 씨는 잘 만났고?”

“나 지금 너무 신나.”

“왜?, 또 무슨 일로 신이 나셨을까?”

“전에 말했던 그 풍차같이 생긴 펜션, 알아봤어?”

“네가 논문 쓴다고 도서관에 있던 날..”

“아, 그때 그래서 전화했던 거였어?, 미안, 병준아”

“알아냈지. 근데 맨입으로?”

“유치하게 이럴래?, 어딘데 거기가?”

“강원도는 맞는데, 인제도 정선도 아니었어.”

“그러니까 어디냐고!”

“화천. 화천이야 거기.”

“그럼 이번 주말에 거기 예약 좀 해줄 수 있어?, 1박 2일로.”

“선영 씨랑 가려고?, 둘이 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너도 가야지. 내가 가는데 네가 안 가면 말이 안 되지.”

“뭐?, 나까지?, 그럼 네 명 예약하면 되는 거야?, 방은?”

“아니, 다섯 명이나 여섯 명. 방은 세 개.”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어?”

“그건 당일 날이 되면 알게 될 테니까 됐고, 렌터카도 한 대 빌려놔.”

“아니, 각자 알아서 가면 되지 굳이 렌터카까지 빌려야 해?”

“6인승?, 8인승?, 아무튼 큰 차로 빌려둬.”

“아주 제멋대로네, 제멋대로야.”

“그래서 싫다고?”

“누가 싫다고 했어?”

“주말이 기다려진다, 그치?”

“너 혼자만 기다려지는 건 아니고?”

“아무튼 너도 시간 비워놔. 필요한 거 생길 때마다 얘기할 테니까 준비하는 것 좀 도와주고.”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가려는 이유가 뭐야?”

“기다려 병준아. 얌전히 주말이 되길 기다리라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어. 우리는 결과만 지켜보면 되는 거야.”

“할 말은 많은데, 지금은 그냥 참을게.

“응, 나만 믿어. 잘 자렴.”

“너도.”


지수와의 통화를 마친 병준의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수의 요구가 다소 과하다며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지수가 그저 한없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병준은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이번만큼은 지수가 하는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로 했다.


한편, 집에 도착한 지수는 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경미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그림에 그려 넣을지를 생각했다. 경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지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지수는 어째서 경미를 이 그림에 넣으려 했는지부터 생각해보았다. 긴 시간을 고민했던 일이 무색할 만큼 이유는 간단했다. 경미는 오로지 정완이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정완을 미끼로 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지수는 이번 여행에서 병준의 속마음을 낱낱이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손해 보는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병준과의 관계를 지금 정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성급하게 굴 필요도 없었다. 정완과 선영에게 드리워진 먹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기만 한다면 이번 여행의 목적은 절반 이상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미 역시 정완과 선영이 본래의 자리를 찾게 된다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수는 이번 여행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정완과 선영은 만나지 못했다. 갑자기 추워질 날씨 탓에 선영의 어머니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픈 어머니가 홀로 아버지를 돌보는 것이 버거운 상황에 선영은 마음 편히 집 밖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 시각 정완은 사무실에 앉아 선영에게 보낼 편지를 만들고 있었다. 편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지만 정완은 선영에게 전할 본인의 진심을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정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컨소시엄에서 친분을 쌓은 한 작곡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정완에게 작사를 의뢰한 그 작곡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정완은 만들고 있던 편지를 정리하고는 급히 책상 서랍을 닫았다.


“오빠, 어디 가요?”

“응, 전에 모임에 가서 친해진 작곡가 한 분이 작사를 부탁해서.”

“잘됐네요. 그럼 이따가 사무실에 다시 오는 거예요?”

“잘 모르겠네. 오늘은 내가 꼭 전화할게. 이제 경미한테 미안한 짓도 그만해야지.”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와요.”

“그래, 수고해.”


경미는 요즘 들어 점점 기운이 없어 보이고 피곤해 보이는 정완이 내심 걱정이었다. 사무실에서 밥을 먹는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본지가 오래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한 정완의 뒤를 따라나선 경미는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정완을 배웅했다. 정완을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경미는 야간수업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경미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경미야.”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를 들은 경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희에게 경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우가 경미를 찾아온 것이었다. 진희는 끝까지 모른척하려 했으나 집요하게 묻는 선우의 끈질김에 결국 경미가 일하는 사무실의 주소를 알려주고 말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혜정이랑 결혼한다는 얘기라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그 얘기 말고. 앉아도 되지?”


선우는 경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경미에게 먼저 선우가 말했다.


“너랑 만나는 동안 혜정이를 만났다는 건 오해야.”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 말 좀 들어봐. 화부터 내는 건 여전하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던 경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선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우는 경미와 사귀었을 당시 항상 지나치게 돋보였던 경미에게 불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선우는 일부러 경미와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다녔다. 경미를 독점하고 싶었다는 이유였지만 자신의 행동이 경미에게 큰 상처를 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 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선우는 몇 번이고 경미를 찾아갔지만 경미는 한 번도 선우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경미를 기다렸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중, 언제나 경미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주던 혜정을 찾아가게 되었고 경미와 헤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선우는 끊임없이 혜정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선우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혜정을 만난 것뿐이었다. 하지만 경미의 친구들이 선우와 혜정이 같이 있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게 되면서 자주 입방아에 오르던 선우와 혜정의 이야기는 와전이 되었고 경미는 끝내 불쌍하고 처량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선우는 경미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봐주었던 혜정을 차마 모른척할 수 없었던 선우는 마침내 혜정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이후 선우는 윤지와 진희를 비롯한 경미의 친구들을 만나 모든 사실을 빠짐없이 털어놓았고 그동안 쌓여있던 오해는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하지만 경미는 예외였다.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경미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지의 생일날 모였던 친구들이 경미와 선우가 만나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했던 것도, 상황을 보고 판단하자는 것도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이런 오해쯤은 간단히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경미가 선우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참회하는 거니?, 속죄하는 거냐고!”

“잘못된 걸 바로 잡고 싶었을 뿐이야.”

“그건 네 욕심이야.”

“경미야, 나 솔직히 너 많이 좋아했어. 너로 인해 정말 행복했었다고.”

“나는 네가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해주겠다. 시답잖은 옛날 얘기까지 하면서 듣고 싶은 말이 뭔데?, 꼴사납다고 생각 안 해?”

“야, 민경미!, 추억까지 싸잡아서 비꼬지 마. 왜곡된 기억을 바로잡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웃긴다 너. 추억?, 추억이라고 했니 지금?, 추억은 같은 기억을 갖고 있어야 추억인 거야. 너랑 나랑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 기억을 바로잡으러 왔잖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아. 얘기 끝났으면 그만 가.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내 딴에는 이 만큼 시간이 지났으면 네가 조금은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얼마나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야 네 속이 시원하겠니?, 얼마나 더 울려야 네가 속이 시원해지겠냐고 이 나쁜 놈아.”


울면 지는 것이라며 이빨을 꽉 깨물고 힘겹게 참았지만 경미는 결국 선우 앞에서 울고 말았다.


“그래, 그만두자.., 나도 할 만큼 했다. 내 결혼식에 와달라는 얘기까지는 차마 못하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오해였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럼 됐네. 말했으니까 그만 가.”


선우와 경미의 감정이 격해질 무렵부터 사무실 앞에는 현수가 와있었다. 현수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선우와 경미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너랑 오해를 풀지 못해도 다 좋아. 근데 경미야, 내가 했던 말을 믿던지 믿지 않던지는 네 자유. 하지만 더 이상 나 때문에 친구들을 피하면서 지내거나 어딘가로 숨어버리지 않았으면 해. 어차피 결정은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더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 때문에 상처받았으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너 따위 한테 한 번도 상처 같은 거 받은 적 없어.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으니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듯하자 현수는 사무실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경미에게 전해주며 경미의 옆에 앉았다. 현수는 지금 이 상황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래 기다렸지?, 커피 좀 사 오느라고.”


선우는 경미에게 커피를 건네는 현수와 경미를 번갈아보고 말했다.


“남자 친구?”


엉겁결에 커피를 받아 든 경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었지만 곧장 현수의 팔을 잡고 선우에게 말했다.


“응, 내 남자 친구야.”


선우는 잠시 동안 경미의 표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현수는 선우가 나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선우를 의식해서였는지 끝까지 장단을 맞추었다.


“괜찮아?, 왜 울었어?”


방금 전 표정과는 180도 바뀐 표정을 한 경미는 현수를 쏘아보며 말했다.


“사적인 대화는 사절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화내지 말고 얼른 마셔. 오늘은 아메리카노야.”

“근데, 왜 자꾸 반말해요?”

“말 놓으면 안 돼?, 보니까 내가 오빠던데.”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랑 나랑 생년은 같거든?”

“내가 생일이 빠르잖아.”

“오빠 소리 듣고 싶으면 다른데 알아봐. 어디서 오빠 대접을 받으려고 해?”


경미는 어이없는 대화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런 경미를 보며 현수가 말했다.


너는 웃는 얼굴이 참 예쁘.”

“누가 네 마음대로 남자 친구인척 하래?”

“그 상황에 그럼 뭐라고 해?, 짜장면 배달 왔다고 할까?”

“근데 왜 자꾸 반말이냐고.”

“너도 반말하잖아.”


현수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속이 상했음에도 어쩐지 계속 웃음이 나는 경미는 휴지를 가져와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다 큰 여자가 어디서 함부로 코를 풀어?, 작업실 형 앞에서도 막 코 풀고 그래?”

“작업실 형?, 정완 오빠?”

“전에 애인이냐고, 싸웠냐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아.., 그때?”

“너, 그 형 좋아하지?”

“눈치는 좀 있네. 소문내지 마. 소문내면 죽여 버릴 거야.”

“생긴 거랑 다르게 입이 거치네, 이 아가씨.”

“너 진짜 어이없다.”

“너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해. 내가 너보다 한 학년 위야.”

“그새 잊었어?, 오빠 소리 듣고 싶으면 다른 학원가라고 했지?”

“이길 수가 없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아무튼 이제 진짜 오해 풀린 거다?”

“오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고 했지?, 오늘은 그냥 내가 넘어가 주는데,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한다?”

“나 원.., 너라는 애는 진짜 알 수가 없다.”

“나는 너라는 애 알고 싶지 않아.”


말로는 경미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현수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무언가 후련해진 표정으로 경미가 말했다.


어쨌든 아까 일은 고마워. 하지만 그 이상 뭔가 바라기라도 하면 아주 그 길로 끝인 줄 알아.”

“오케이. 알아들었어.”


현수는 바뀐 경미의 표정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앞으로 더 친해지면서 차차 경미에 대해 알아 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 야간수업이 시작되었고 경미는 평소처럼 수업에 열중하며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수는 그들이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현수는 줄곧 경미의 눈치를 살폈다. 현수는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고 지금 이 상황에 도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또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교제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처음에 느꼈던 단순한 호기심은 점점 호감으로 변해가는 모양새였다.


그날 밤, 정완은 경미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나온 경미는 집으로 돌아갔다. 선우가 콕 집어 말해주지 않아도 경미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 둘러놓은 울타리에 언제까지 갇혀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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