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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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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01. 2019

EP 4) 딱 맞고 편한 옷. 꿈과 현실의 경계선.

episode 4.


한편, 지수는 함께 정완을 기다리고 있는 병준의 눈치를 보며 정완에게 몇 차례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정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완아. 나 지금 사무실 앞이거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퇴근하면 전화해.-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정완은 지수가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메모지를 찾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지수를 만나러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경미는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기에 터덜터덜 문밖을 나서는 정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자는 약속을 해놓고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지금 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정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운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실렸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끔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경미의 머릿속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강의실 한쪽에서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던 현수는 문밖을 나서는 정완과 정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경미를 유심히 관찰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밖으로 나온 정완은 작업실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지수와 병준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지수 친구 김병준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이네요. 우리 구면이죠?, 박정완입니다.”

“기억하시네요. 그런데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뵐 기회가 있겠죠. 항상 지수 옆에 계신 것 같으니까.”


병준은 지수에게 정완을 함께 만나자고 먼저 제안했지만 지수나 정완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잠시 벙벙한 얼굴로 병준을 바라보던 지수는 이 또한 병준의 배려임을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병준을 보내주었다.


수업을 마친 경미는 사무실 밖까지 나와 지수와 걸어가는 정완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저녁 약속 한번 어긴 일 따위로 속상해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될 리 없었다. 경미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던 말이 욕심이었다는 것을, 그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이때까지는 그저 기분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현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늘 배운 자료를 대충 가방에 구겨 넣고 곧장 경미의 꽁무니를 바싹 쫓았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남자로서의 본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경미가 눈을 질끈 감으며 했던 생각. 그리고 질끈 감은 눈에서 새어 나온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 지금은 단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었다.


지수와 정완은 대로변에 있는 BEER PUB에 자리를 잡았다. 정완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지수가 물었다.


“맥주?, 밥은 먹었어?”

“맥주는 어제 먹었고, 아직 공복이야.”

“누구랑?”

“그 왜, 나랑 사무실 같이 쓰는 경미랑. 아무튼 선영이가 오는 바람에..”

“경미?, 그 여자 이름이 경미구나. 경고하는데 정완이 너, 그 애랑 절대 엮이지 마.”

“무슨 소리야 그게.”

“내 말 들어. 그 애는 절대 안 .”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먼저 일어나는 수가 있다?”

“됐고. 어제 선영이가 뭐래?, 만났다며.”

“뭐.., 한 줄로 요약하자면, 사형을 집행하러 온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었어.

“사형?, 저승사자?, 알아듣게 얘기해.”

“별로 귀엽지 않은 상자에다가 선영이네 집에서 쓰던 내 물건들을 모조리 담아 오셨더라고. 근데, 선물을 줄 때 보여주던 어여쁜 얼굴이 아니라, 서슬파란 큰 낫을 든 저승사자 같은 얼굴이었어.”

“끝 이래?,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던데 뭘. 끝이다 뭐다 그런 말은 없었고, 곧 이사를 할 거니까 찾아오지 마라. 너네 집에 있는 내 짐은 회사로 보내던지 해라. 정말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는 쌩하니 가버렸어.”

“그걸 그냥 보냈어?, 좀 붙들고 매달리고 좀 하지. 바짓가랑이라도 잡지 그랬어.”

“매달릴 틈도 없었어. 붙들고 자시고 할 상황도 아니었고.”

“선영이는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라니?,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

“나는 알 것 같아. 선영이가 왜 화가 난 건지.., 왜 그렇게 차가워졌는지..”

“결혼 이야기하다가 싸웠다며?, 가끔 그렇게 싸우고도 다시 잘 지냈잖아.”

“그렇긴 한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려나.., 근데 왜 당사자인 나보다 네가 더 흥분하는 건데?”

“너랑 선영이 일이잖아. 남의 일도 아니고. 나는 너나 선영이나 상처받는 걸 원치 않으니까. 그리고 박정완과 윤선영의 7년을 함께 보낸 장본인이기도 하고.”

“알아. 선영이가 너한테 많이 의지한 것도 알고, 우리 사이가 꼬일 때마다 네가 열심히 풀어준 것도 잘 알아. 그 부분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잘 안다는 사람이 왜 그래?, 애초부터 싸우지 말았어야지.”

“난들 그러고 싶었겠냐.”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이참에 결혼이나 하지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고, 가족을 구성하고 꾸려가고 지탱해간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거. 근데, 선영이랑은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어. 선영이라면 모든 게 상쇄될 것 같았으니까.”

“근데 뭐가 문제야?, 서로 뜻이 같으면 후딱 해치우면 되잖아.”

“지수야. 지금도 나는 선영이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 결혼도 선영이랑 하고 싶고. 하지만 선영이는 결혼 이야기할 때마다 자꾸 아기를 포함시켜. 그래 좋다 이거야. 다 좋은데,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부터는 선영이만 신경 쓰고, 선영이만 사랑하고, 선영이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게 현실이잖아. 누구누구 아빠, 누구누구 엄마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매일매일 엄청난 각오를 다져야 하고, 매일매일 어깨에 감각이 없어질 만큼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게 현실이잖아. 아기 때문에 나 자신을 포기하고, 선영이를 포기하고, 남은 인생마저 포기하면서까지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낳아봤어?, 왜 낳아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해?”

“다들 그렇게 살잖아. 네 주변을 둘러봐.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서로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부부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물론 아주 간혹 예외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완의 마지막 말에서 제법 설득력이 느껴졌다. 지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라고 들었다. 약 10년간의 열애 끝에 결실을 맺었지만 지금은 밥을 차려주는 것 마저 귀찮아하는 어머니와 휴일에도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려보니,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사이였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도 ‘누구누구 아빠, 누구누구 엄마’라는 호칭만 들었을 뿐, 서로의 이름을 살갑게 불러주는 친지들을 보았던 기억이 딱히 없었다. 선영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영이 하는 말이 옳게 들렸고 정완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완이 하는 말이 옳게 들렸다. 사랑이라는 결과 값은 동일했지만 그 과정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지수는 도끼눈으로 정완을 노려보던 편견으로 가득 찬 시선을 거두었다.


“정완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정신없이 채우다 보니까 넘쳐버린 거니?, 아니면 채우려 하지 않아서 비워진 거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냥. 선영이 만났을 때 선영이가 하는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난 건데, 아마도 너라면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정완은 지수가 건넨 말의 뜻을 금세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선영이 하는 말을 듣고 생각난 것에 단서와 근거를 붙여보니, 왠지 선영이 남긴 메모지의 마지막 글귀와 연계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행복도 너랑 사이좋게 나눠 갖고 싶어.’


선영은 무엇이든 정완과 함께 나누려 했다. 그것이 무겁기만 하고 값어치가 없는 흙더미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반짝거리는 값비싼 보석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정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달려있을 뿐, 고통이든 환희든 짐이 될 것 같으면 무게감이 없는 감정 같은 것들마저도 선영에게 떠넘기려 하지 않았다. 나누어 갖는다는 표현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떠넘기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가치관이 맞아떨어질 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명확해질 때, 삶의 질이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공포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 정완은 그때가 결혼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날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겨우겨우 지금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늘 한 끗이 부족한 느낌은 지금이나 그때나 다를 것이 없었다.


“순서대로 입장만 적용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응?, 순서대로?”

“선영이는 이미 가득 차 있는 줄도 몰랐던 거지. 정신없이 계속 채우다 보니까 넘쳐버린 사랑마저도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던 거고, 나는 넘쳐버린 사랑을 함께 담아줄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아서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도 말라비틀어진 거고.”  

“남 얘기하는 것처럼 말은 참 잘하네.”

“설명하라고 한 게 누군데.”


지수는 정완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선영과 똑같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뿐, 정완은 정완 나름대로 선영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7년을 꾸준히 지켜본 지수의 시선에는 각자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지수의 판단이 틀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도 정완과 선영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큼은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선영이를 만나서 내 진심을 전하기 전까지는 절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지수야, 나 좀 도와주라. 응?, 부탁 좀 하자.”

“선영이랑 만나게 해 달라고?”

“역시, 너는 척하면 척이야.”

“그래.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고마워, 지수야.”

“그전에 내 부탁 먼저 들어줄래?”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 네 속 마음, 네가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생각을 옷에 비유해서 한번 설명해봐.”

“옷?, 갑자기?”

“응. 논문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요즘에는 논문에도 사랑 얘기 쓰고 그래?”

“됐고, 설명해봐. 즉흥적이어야 의미가 있으니까 생각할 시간은 안 준다?”

“10초만 줘.”

“그래. 그럼 나도 녹음기 좀 켤게.”


정확히 10초가 지나자마자 정완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붙이고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지수 앞에 놓여있는 만년필 모양의 녹음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한 벌 샀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을 받았다고 해야겠지. 그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디자인도 너무 예쁘고, 사이즈도 잘 맞고.., 어쨌든 너무너무 편하고 좋아서 어디 하나 흠잡을 게 없을 정도로 그 옷이 좋았어. 그래서 7년 동안 한결같이 그 옷만 고집하게 됐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옷장에 걸려있는 그 옷을 보니까 목도 조금 늘어나 있고 색깔도 원래 색보다 많이 바래져있더라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옷을 들고 세탁소를 찾아갔는데, 주인아저씨가 이 옷은 원상복구가 힘들 거라는 말을 했어. 속상한 마음에 옷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나 마음에 들고 좋아했으면서 왜 아껴서 입을 생각을 안 했을까?, 왜 한 번도 드라이클리닝을 맡기지 않았고 보풀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떼어내지 않았던 걸까?, 진심으로 그 옷을 사랑하고 아꼈더라면, 적어도 옷이 늘어나지 않게 입는 방법이라던가 옷의 색상이 바래지지 않게 보관하는 방법 정도는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물어보려는 노력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편하고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옷을 아무렇게나 방치했던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언제까지나 나한테 딱 맞는 편하고 예쁜 옷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을 하면서 말이야.”


지수는 10초 만에 생각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자신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정완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지수는 녹음기를 들고 오늘 날짜와 시간을 짧게 말한 후 녹음기의 전원을 껐다. 사실, 논문에 이런 내용을 실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정완과 선영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나름의 편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연출도 없었고 각색도 없었다. 그저 담백한 솔직함 그 자체였다. 즉흥적이어야 한다는 트랩이 기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며 지수는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온 경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어지럽게 놓여있는 A4용지들을 정리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안전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경미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현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 봤어요. 아까 사무실 밖으로 나가신 분.., 애인이에요?, 싸웠어요?”

“아니에요 정말.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거짓말 같은데요?, 누가 봐도 애인 사이인 것 같은데..”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순간, 경미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그것도 낯선 남자 앞에서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현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수의 머릿속에 있던 시나리오에는 경미가 화를 내며 우는 장면 포함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다른 수강생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현수와 울고 있는 경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만 가보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됐으니까 그만 가시라고요.”


현수는 경미가 왜 울어야 하는지, 왜 하필 그 타이밍이 지금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경미 앞에 계속 얼쩡거리면 경미가 더 크게 화를 낼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오늘의 궁금함은 일단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현수는 사무실 전면을 감싸고 있는 통유리 너머로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경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현수는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일축했다. 경험상 오해는 풀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만약, 어떤 오해가 발생했다면 가능한 빠르게 푸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찝찝한 기분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현수는 무작정 경미가 사무실의 불을 끄고 퇴근하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사무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정완은 지수가 주문한 먹음직스러운 피자가 테이블에 놓이자 아차 싶은 느낌이 들었다. 경미와의 저녁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던 정완은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미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간단하게 전화로 약속을 취소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경미에게 미안한 행동을 꽤나 많이 했다고 생각한 정완은 지수에게 의뢰가 들어온 일을 핑계로 작업실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정완의 말과 행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애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좀.”

“너 미친 거니?, 아니면 돌은 거니?”

“아무튼 나중에 전화할게. 먼저 간다.”


지수는 한입 베어 먹은 피자가 목구멍에 걸린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선영과의 일로 실컷 떠들어 놓고 그깟 어린 여자애 때문에 자리에서 헐레벌떡 뛰쳐나가는 정완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청승맞게 혼자 피자와 맥주를 먹는 것은 지수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지수는 언제나 그랬듯 병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병준도 언제나 그랬듯 지수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직 사무실의 불이 꺼져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정완은 더욱 속력을 내며 뛰기 시작했다.


“경미야, 미안. 아직 퇴근 안 했어?”

“오빠..”

“미안, 정말 미안!”

“집에 간 줄 알았잖아요..”

“나는 왜 매번 너한테 미안한 일만 저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경미의 양 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급하게 눈물자국을 지운 두 눈 역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경미는 눈물과 화장품이 뒤엉킨 휴지를 손에 꼭 쥐고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는 쭈뼛거리는 정완을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빵끗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울었어?”

“안 울었는데요?”

“운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배고파서요. 배가 너무 고프니까 신경질 나서 울었어요.”

“그랬구나..”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그래, 그러자.”


마침내 사무실의 불이 꺼졌지만 현수는 경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정완과 함께 있는 경미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서럽게 울고 있던 경미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주인을 기다리던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퇴근이 조금 늦은 주인을 반겨주듯,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미는 정완에게 자연스레 메모지를 돌려줄 구실이 생겼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 울었으면 반성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완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메모지를 돌려준다면 어떠한 미움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행복한 기억은 나쁜 기억으로 덮고 나쁜 기억은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익숙했던 경미였다. 그 익숙한 행동들은 정말 누군가에게 미움받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용서받고 싶어서였을까. 혹은 그 언젠가처럼 상처받고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오빠. 우리 저기 가요. 아직 문 안 닫았네요.”

“어디?, 포장마차?”

“네. 저기서 파는 떡볶이랑 꼬마김밥 엄청 맛있거든요.”

“진짜 떡볶이로 괜찮겠어?, 비싼 거 먹으러 가도 상관없는데.”

“아니에요. 떡볶이랑 김밥이면 돼요. 아 맞다, 우동도.”


경미는 끝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쭉쭉 뻗어 올라오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했다. 정말 다쳐도 좋은 것인지, 진심으로 상처를 받아도 괜찮은 것인지 상관없을 만큼 행복할 뿐이었다. 경미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면 심하게 다쳐도, 혹은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 터져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 나란히 앉아 떡볶이와 꼬마김밥,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근데, 정말 배고파서 울었어?”

“네. 저는 배고프면 눈물부터 나와요.”

“참 특이하다. 역시 일반적이지 않아.”

“전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요.”

“아, 습관이야 습관.”

“오빠는 제가 이상해 보여요?”

“이상할 리가 있나. 경미는 예쁘고 착해. 그리고 능력도 있고. 맞다, 특이하기도 하지.”

“특이하다는 게 특별한 거랑 비슷한 거예요?”

“비슷하지.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경미는 엇박자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행여나 들릴까 싶어 우동을 덜어내는 척하며 정완과의 거리를 벌려 앉았다. 그리고 정완이 애타게 찾고 있던 메모지를 돌려줄 타이밍이 가까워졌음을 인지했다.


“오빠. 아까 뭐 급하게 찾던 것 같던데..”

“어제 선영이가 주고 간 상자에 있던 건데.., 잃어버렸나 봐.”

“선영언니 가요?”

“응. 근데 그건 왜?”

“혹시, 이거예요?”


경미는 두 손으로 메모지를 내밀며 정완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정완은 경미가 메모지를 갖게 된 경위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 메모지를 네가 갖고 있는 거야?’라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일단 자초지종을 먼저 듣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경미야, 이거 어디서 났어?”

“강의실 앞에 떨어져 있었는데, 버리려고 보니까 오빠 이름이 보이길래 물어보고 버리려고 갖고 있었어요.

“근데, 왜 말 안 했어?”

“우리 오늘 말할 시간이나 있었나요 뭐, 나갈 때 말도 없이 나갔으면서.”

“참, 그랬지.., 미안..”

“아니에요. 저는 당연히 저녁 먹으러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때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어요.”

“어째 나는 너한테 미안한 짓만 골라서 하는 것 같네.”

“괜찮아요. 어쨌든 찾았으면 됐잖아요.”


경미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 구역질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정완은 분명 이해해 주었을 텐데. 정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구겨질까 봐 그랬다고, 혹시라도 구겨졌으면 깨끗하게 펴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했어도 정완은 이해해 주었을 텐데. 경미는 야간수업 종료 후 몇 시간 동안 울었던 일이 허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거짓말을 할 것이었으면 굳이 울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업 종료 후 대뜸 말을 걸어왔던 현수가 떠올랐다. 경미는 모든 것이 현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구멍을 결코 타인으로 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미는 모든 일의 시작과 지금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일에 대한 원인을 전부 현수의 탓으로 돌렸다. 어쩌면 이것 또한 미움받기 싫어하는 경미의 일관된 행동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상처받기 싫어하는 경미의 특이함 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작업은 다 끝냈어요?”

“아니.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도입부 정도만 했어.”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니에요?, 곧 마감이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오늘부터 야간에도 작업해야겠는데?”

“그럼 이거 다 먹고 같이 사무실에 가서 야근할까요?, 저도 아직 할 일이 좀 남았는데.”

“웬일이래?, 경미가 잔업이라니.”

“별로 급한 일 아니면 자주 미루는걸요, 뭐.”

“이따가 마실 것 좀 사고 사무실로 가면 되겠다.”

“네, 그래요.”


떡볶이가 이렇게나 달콤했던 적은 없었다. 꼬마김밥이 이 정도로 풍미가 가득했던 적은 없었다. 혹시 지금 먹고 있는 이 우동은 일본 현지에서 삼대 째 가업을 이어온 우동의 명인 ‘오오타니 키츠네’ 씨가 만든 우동이 아닐까. 경미는 마냥 행복했다. 늘 먹던 똑같은 음식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최고급 호텔에서 최상급 재료만 엄선해서 만든 값비싼 음식처럼 느껴졌다.


정완과 경미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과 안주거리를 사들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경미는 다용도실에 있는 냉장고에 맥주를 넣어놓고 정완은 기지개를 켜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경미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남아있지도 않은 잔업에 열심히 몰두하는 척했지만 딱히 무얼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경미는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이 혹시 꿈은 아닐까.’


경미는 한참 동안 꿈이라는 단어와 개연성이 있는 예쁜 문장과 단어를 신중히 골라냈다. 몇 가지 문장들 중, 마음에 쏙 드는 문장들을 몽글몽글하게 적어놓고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원색의 마커펜을 손에 쥐고는 몇 번씩이나 수정을 해가며 정성스레 색을 칠했다. 반 정도 채색을 마쳤을 무렵, 경미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경미는 혹시라도 지금 꾸고 있는 이 꿈에서 깨어버릴까 싶은 마음에 쏟아지는 잠과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자고 있을 때 꾸는 꿈만 꿈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현상을 종종 꿈만 같았다고 말한다. 가끔은 각자가 소망하는 일들을 꿈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꿈은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루고 싶은 간절함.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 그리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꿈이라 부르곤 했다. 믿기지 않는 현상과 굳은 의지, 지금의 행복함이 어느 순간 사라질까 싶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하는 바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영원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 역시 꿈이다. 꿈은 언제나 그랬다. 누구나 쉽게 꿀 수는 있었지만 누구나 쉽게 이룰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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