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 누군가의 이별, 상처.
episode 3.
다음날, 경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들고 출근을 했다. 어제보다 한층 높아 보이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경미는 아직도 어젯밤처럼 밝은 조명들이 불을 뿜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본능적으로 정완의 작업실로 향한 경미는 망설임 없이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작은 소파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깊이 잠들어있는 정완을 확인한 경미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잔뜩 어질러진 책상 주변과 전원이 켜있는 컴퓨터 그리고 찌그러져있는 맥주 캔과 반쯤 열려있는 상자를 차례로 둘러본 경미는 어젯밤 정완에게 불어 닥친 바람의 세기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흐트러진 정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경미는 지금 정완을 깨우게 되면 왠지 모를 서먹함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미는 정완의 손끝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구겨진 메모지를 살며시 집어 들고는 작업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간밤에 일어난 일들이 매우 궁금했지만 섣불리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그러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은 경미는 오전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씁쓸함 때문일까. 아니면 어젯밤 자신이 마음속으로 읊조렸던 그 말 때문일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경미는 아무래도 자신이 상상했던 말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이별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일까?’
‘누군가의 상처는 누군가에게는 행복일까?’
경미는 정완에게 미움받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음이 모두 녹아서 싱거워진 커피를 내밀었다가는 괜히 미움을 받을 것 같아 불안했다. 경미는 정완을 위해 사온 커피가 싱거워지지 않도록 냉장고의 가장 안쪽 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어젯밤, 잠시나마 얄궂은 생각을 했던 자신을 용서해주기를 바라며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내려 했다.
불안함과 죄책감으로 온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때, 누군가 사무실을 찾아와 경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정완이 안에 있어요?”
“네, 근데 누구세요?”
“이지수라고 해요. 여기 입주할 때 우리 만난 적 있죠?”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지금 정완 오빠 자고 있는데..”
“네?, 자고 있다고요?”
“어제 집에 안 들어간 모양이에요.”
“어쩐지, 전화도 계속 안 받더라니.”
지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정완의 작업실로 곧장 들어가려 했지만 이를 본 경미가 지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한데요, 지금 깨우기가 좀 그런데.., 이쪽에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네?, 아니에요. 그냥 다음에 다시 올게요. 정완이 일어나면 지수 왔다 갔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이만.”
“안녕히 가세요.”
돌아오는 길에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린 지수는 기분이 굉장히 언짢아졌다. 두 사람이 딱히 나쁜 의도로 사무실을 같이 쓰는 것은 아닐 테지만 친밀도가 제법 높아 보이는 호칭과 예사롭지 않은 말투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선영과 정완이 헤어졌다는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여자의 직감으로서는 썩 좋지 않았다. 지수는 이 사실을 선영과 병준에게 동시에 알렸다.
-선영아, 정완이랑 사무실 같이 쓰는 여자애 알지?-
-경미 씨?-
-방금 전에 정완이네 사무실에 갔었거든?-
-글쎄, 그 계집애가 막 눈 동그랗게 뜨고 뭐라고 한 줄 아니?-
-안 궁금하거든?-
-지금 바쁘니까 이따가 연락할게.-
-끝까지 좀 들어 봐.-
-근데, 네가 왜 정완이를 찾아가?-
-나 정말 괜찮아 지수야.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지수 네가 이러면 내가 더 힘들어.-
-무슨 뜻인지 알지?, 퇴근하고 전화할게.-
-아니, 난 그냥..-
선영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지수에게 병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글보다는 말로 대화를 풀어가는 것을 좋아했던 병준은 지수가 이럴 때마다 늘 전화부터 걸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듯 외출 준비를 했다. 지수가 있는 곳이라면 병준은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야?”
“어쩜 그럴 수 가있지?”
“뭐가 문제인데?”
“선영이 생각을 들었으니까 정완이 생각도 좀 들어보려고 간 건데..”
“그걸 왜 네가 하는데?, 보호자도 그렇게는 안 할걸?”
“너, 말이 좀 그렇다?”
“그래서 어디야?,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사실, 지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핑계였다. 병준은 지수에게 아주 사소한 고민이 있어 보이거나 별 볼 일없는 시시콜콜한 푸념이 조금이라도 들려올 때면 언제나 지수를 찾아갔다.
굳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어도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차를 마실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지수가 힘들어할 때, 간혹 지수가 눈물을 보일 때도 병준은 지수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곁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유지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 이제 지수가 하고 싶은 말 좀 들어볼까?”
“그 애, 처음 봤을 때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그 애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정완이를 막 허물없이 부르고, 깨우면 안 된다 그러고.”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걸로 왜 화를 내고 그래?”
“혹시 그 애.., 정완이랑 선영이랑 헤어진 것도 알고 있을까?”
“선영 씨는 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모르겠어 나도. 너무 침착하니까 다른 사람 같아.”
“선영 씨가 뭐라고 했길래?”
“괜찮다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데, 왠지 그게 너무 불안해.”
“그럼 됐어. 당사자가 괜찮다고 했으면 된 거야. 불안해하지 마.”
“정완이도 같은 생각일까?”
“정완 씨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둘이 진짜로 헤어질 것 같아서 불안해 죽겠단 말이야.”
“그렇게 불안해?”
“당연하지. 정완이도 선영이도 내 친구인데. 나는 어느 쪽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상처받기 싫은 건 아니고?”
“무슨 말이야?, 내가 왜?”
“아니야. 그럼 이따 저녁에 정완 씨 만나러 같이 갈까?”
“너는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할 때가 있어.”
“이해하지 않아도 돼. 나도 거기까지는 안 바라니까.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너, 안 바빠?, 나는 괜찮은데..”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지수는 병준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선영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을 붙잡고 병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 남자,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라는 일관된 답변만 듣기 일쑤였다. 지수는 병준이 말했던 아리송한 말의 정확한 풀이를 알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지수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다. 정작 지수가 궁금해하는 문제의 본질적인 풀이는 끝끝내 들을 수 없었다. 그 답은 오직 병준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만 점점 커져갔다.
이미 지수는 병준에게 차였던 과거가 있었다. 아주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지만 병준은 지수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당시에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지나간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투정을 부리거나 볼멘소리를 실컷 해도 들어줄 상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씩 마음속 어딘가가 아플 때, 그럴 때면 자신을 안아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 상대가 병준이라서 다행이라는 것은 지수 역시 병준과 같았다. 더는 마음속으로만 해야 될 말들을 섣불리 뱉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지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은 함부로 뱉지 말자며 본인 스스로와 타협했다.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만큼은 결코 조바심을 내지 말자는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균형이 무너지면 누군가는 반드시 물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기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던 지수는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경미는 오후 네 시가 돼서야 정완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완의 기척이 느껴지자 경미는 재빨리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정완의 작업실로 갔다.
“밤새 작업했어요?”
“응. 그랬지 뭐.”
“여기 커피요. 출근할 때 사온 건데, 오빠 자고 있어서 냉장고에 넣어놓았어요.”
“고마워. 잘 마실게.”
“싱겁지 않아요?, 얼음 때문에 조금 싱거워졌을 것 같은데..”
“아니야, 딱 좋아. 근데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괜찮아요. 나중에 맥주도 사줄 거고, 밥도 사줄 거잖아요.”
“아참,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조금 전에 오빠 친구 왔다 갔어요.”
“누구?”
“지수라고 하던데요. 오빠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는다고..”
“아, 충전하는 걸 깜빡했네.”
“아무튼 저는 커피랑 전달사항이랑 잘 전해드렸으니, 이만 물러가 볼게요.”
“경미야, 혹시..”
“네?”
“아니야.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요.”
“그럼 오빠가 저녁 살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놔.”
“진짜예요?, 비싼 거 먹어도 돼요?”
“당연하지.”
경미는 정완에게 용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칭찬과 선물까지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금세 마음속에 쌓여있던 죄책감의 일부분을 덜어낸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완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인 경미는 오늘 아침 정완의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정완의 손끝에 간신히 붙어있던 꼬깃꼬깃한 메모지도 말끔하게 펴서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겨진 메모지를 반듯하게 펴주듯, 정완의 마음 역시 말끔하게 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완은 경미가 건네준 커피를 냉수 마시듯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밤새 켜져 있던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위치가 뒤바뀐 소파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적당히 깔끔해진 작업실을 훑어본 후, 어젯밤 선영에게 받았던 상자를 챙겨 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경미는 야간수업 준비로 분주했다. 정완은 어차피 작업실로 다시 올 것이기에 경미에게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정완은 배터리가 아슬아슬하게 충전된 휴대폰의 전원을 켰지만 지수가 보낸 메시지의 알림만 있을 뿐, 선영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다. 딱히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던 정완은 선영을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매듭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완은 곧장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믹스커피를 한 잔 타놓고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메모지’
불현듯 선영이 남긴 메모지가 떠오른 정완은 상자와 지갑 그리고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메모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완은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초조해지고 다급해졌다. 선영이 남긴 흔적이 바로 선영의 진심이었음을 깨닫게 된 지금, 그 메모지는 정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흔적이었다. 정완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아 작업실로 향했다.
같은 시각, 경미는 야간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강생들과 삼삼오오 모여 머그컵과 액자, 텀블러와 즉석사진에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서체로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정완은 차를 세우자마자 곧장 계단을 올라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어제 앉아있었던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역시나 그곳에서도 메모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작업실을 살펴보았지만 정완이 애타게 찾던 메모지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정완이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정완아. 일어났어?”
“응, 지수구나. 잠깐만 내가 다시 전화할게.”
“바쁜척하기는. 어쩜 니들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똑같니.”
“미안해, 금방 다시 전화할게.”
정완은 지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다시 메모지를 찾기 시작했다. 온종일 움직였던 동선을 집요하게 따라 걸으며 찾아보고 소파와 가구들의 작은 틈새까지 찾아보았다. 쓰레기통을 열고 봉투를 꺼내 찢은 후 그 속의 내용물을 이 잡듯 찾아보았지만 선영의 진심이 담긴 메모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완은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큰 허탈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경미는 정완이 작업실과 옥상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정완을 찾아 작업실에 발을 들였을 때 정완의 손끝에 붙어있던 그 꼬깃한 메모지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경미는 메모지에 적힌 내용을 읽지 않았다. 굳이 읽지 않아도 정완이 저렇게 애 끓이며 찾아다니는 것을 보게 되니, 정완에게는 어떤 의미로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는 것쯤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돌려줄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경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애초에 미움받을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경솔하게 행동하기 전인 오늘 아침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만에 하나, 허락도 없이 그 메모지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정완이 알게 된다면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경미는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멍하니 강의실 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경미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괜찮아요. 마무리 다 하셨어요?”
전역 후, 취업의 문턱을 가뿐히 넘지 못했던 현수는 지난달 경미가 운영하고 있는 켈리그라피 학원에 등록을 했다. 마침 유튜브 편집자에 관련된 직업을 권유받은 터였고 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현수는 켈리그라피를 응용해 톡톡 튀는 문구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학원을 알아보던 중, 자신의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미의 학원을 선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