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이별 그리고 눈물.
episode 2.
맥주가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한 경미는 곧장 정완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빨리 왔네. 한 캔만 하자더니, 네 캔이나 사 온 거야?”
“네 캔에 만원!, 요즘은 이렇게 사는 게 싸개 먹힌다고요.”
“가만 보면 참 알뜰하다니까.”
“오빠. 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본 적 있어요?”
“아니.”
“잘됐다. 그럼 옥상으로 가요. 탁 트인 하늘에 야경도 제법 봐줄 만해요.”
“경미는 올라가 봤어?”
“저요?, 단골이에요.”
경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장서서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미의 뒤를 따르던 정완은 출입금지라고 거칠게 써진 래커 스프레이 자국이 왠지 눈에 거슬렸지만 자꾸만 재촉하는 경미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내 옥상에 발을 딛게 되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야경은 오가는 자동차들의 빨갛고 노란 보잘것없는 불빛들뿐이었다. 그러나 경미가 손짓하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조금 달랐다. 골목 사이로 반듯하게 뻗어있는 가로등의 질서 정연한 모습이 차분함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하지만 바라볼수록 점점 시야가 답답해지고 주변이 어둑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완은 그것이 닦지 않은 안경 때문인지, 안경과 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먼지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앉을 곳이 없네?”
“괜찮아요. 서서 마시면 되죠.”
“불편하지 않아?”
“오빠는 불편해요?, 저는 여기가 지정석이에요.”
“맞다. 단골이라고 했지?”
옥상 외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맥주캔을 세워놓은 경미는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정완에게 건넸다.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거품이 새어 나오는 캔 입구에 재빨리 입을 가져다 대던 경미에게 정완이 물었다.
“경미는 친구들 안 만나?, 한 번도 외출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친구들 만나서 시끌시끌하게 노는 건 참 좋은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왠지 더 외로워져서요. 그래서 친구들은 아주 아주 가끔씩 만나요.”
“특이하다 특이해. 일반적이지 않아.”
“특이하다고요?, 저 이상해요?”
“아니야. 뭐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뭐예요 진짜. 아저씨 같은 소리나 하고.”
“미안, 미안.”
경미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담장에 팔을 괴고 맥주를 마시는 정완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적응하는 정완이 마냥 신기했다. 스물네 살 경미가 바라보는 정완은 매우 어른스러웠다. 작년 이맘때쯤 헤어진 경미의 남자 친구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한창 투정을 부리고 심술을 부려도 될 나이였다. 전부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고, 모든 것을 받아 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러이러하여 힘들다.’라고 말했을 때 작은 위로만이라도 들려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경미는 언제부터인가 위로를 받는 쪽보다는 위로를 하는 쪽이 되어있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쪽 보다는 하는 쪽이 되어있었다. 이기심과 거짓, 가식과 변명으로 똘똘 뭉친 그 남자를 떠올린 경미는 아물어 가던 상처가 조금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완은 경미에게 오늘 의뢰가 들어온 곡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곡 자체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여흥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멜로디만 들었을 때와 가이드보컬의 허밍이 섞인 멜로디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 가이드보컬이 말도 안 되는 가사를 막 붙여가며 흥얼대는데..”
“그래서요?, 그래서 어땠는데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를 깨고 정완의 휴대폰에서는 요란스러운 전화벨이 울렸다. 방금 전까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정완은 하던 말을 멈추고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 경미는 그런 정완을 보자마자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지금 사무실 앞이야.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응, 선영아. 금방 내려갈게.”
정완은 경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마시던 맥주 캔을 내려놓자마자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경미는 은근슬쩍 자리를 옮겨 사무실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정완이 마시던 맥주 캔을 다른 손으로 꼭 쥔 채, 사무실 앞에 뻣뻣하게 서있는 선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선영아. 어떻게 된 거야. 왜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안 했어?”
“이거, 네 물건들이야.”
선영은 투박한 상자 하나를 정완에게 내밀었다.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차례 다투고 난 뒤에 정완을 만나면 눈물부터 쏟았던 선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로 냉정했다. 선영은 상자를 건네는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나머지 정완의 가슴팍에 상자를 밀어 넣었다.
“나, 엄마네로 들어갈 거야.”
“왜 그래 진짜. 나랑 얘기 좀 하자 선영아.”
“아빠가 편찮으셔. 엄마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선영아.”
“내 짐은 우리 집으로 보내던지, 회사로 보내던지 편한 데로 해. 설마 7년씩이나 만났는데 주소도 모르는 건 아니지?”
“잠깐만 선영아. 얘기 좀 하자니까.”
“너랑 할 말 없어.”
“선영아,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선영은 정완의 손을 뿌리치고 시동이 걸려있는 자동차의 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던 정완을 본체만체하고는 그대로 차를 몰아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선영은 정완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부정당할 것만 같았기에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매번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자신이 싫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털어버릴 것 같은 자신도 싫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한 결정에 이견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정말 끝인지, 끝이 아닌지, 선영은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항상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머물러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음에 화가 났다. 선영은 서른이라는 나이와 7년이라는 시간을 조금, 아주 조금 원망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 아주 조금 울었다.
선영이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정완의 옆에는 어느새 경미가 와 있었다.
“오빠. 언니랑 무슨 일 있어요?”
“미안.., 급하게 내려온다고 말도 못 했네.”
“괜찮아요. 저 이제 졸려서 집에 가려고요.”
“미안, 미안..”
“옥상에 맥주 남겨놨어요. 필요할 거 같아서요.”
“그래, 고맙다. 나중에 내가 맥주 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언니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요.”
“그러니까 그게..”
“내일 봐요. 저 먼저 갈게요.”
경미는 정완의 기분이 괜찮아질 때까지 정완의 곁에서 조잘조잘 말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정완과 선영을 내려다본 경미는 함부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왠지 크게 다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는 다치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놓인 짧은 횡단보도를 건넜을 때 경미는 조금 전까지 정완이 서있던 사무실의 입구와 옥상을 번갈아 보았다.
‘다쳐도 좋아.’
‘상처받아도 괜찮아.’
순간,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싶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그날 밤, 경미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누군가의 이별은 누군가에게 기회일까. 누군가의 상처는 누군가에게 행복일까. 경미는 안 된다고, 그러면 정말 안 된다면서 몇 번씩이나 얼굴을 꼬집었다. 그러나 입가에 사뿐히 내려앉은 미소와 독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듯한 미묘한 감정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 시각, 정완은 작업실에 앉아 선영이 주고 간 상자를 열어보았다. 별로 무게감이 없는 상자에는 별 볼 일 없는 물건들만 있었다. 정완과 선영이 주고받았던 편지나 선물,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들은 없었다. 그냥 말 그대로 선영의 집에서 정완이 쓰던 물건들뿐이었다. 정완은 완벽한 타인이 되지는 않았다며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자를 뒤적이던 정완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해 보이는 노트 한 권에 자연스레 시선을 집중했다. 작사에 관심을 갖기 전에 시를 쓰거나 혹은 명언, 격언 등을 적어놓았던 노트였다. 노트를 펼쳐보니 낯부끄러운 글들이 여기저기 쓰여 있었다.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그리고 교훈과 감동마저 느껴지는 수 세기 동안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주옥같은 글귀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노트를 집어 들고는 옥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옥상에 올라온 정완은 자신이 마시던 맥주캔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반쯤 마시고 남겨두었던 맥주 캔은 그 자리에 없었다.
늦여름, 아직 가시지 않은 습기를 응결시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금의 정완과 아주 쏙 빼닮은 맥주 두 캔만이 제멋대로 세워진 담장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온도차가 극명하게 갈려 수증기가 액화되어 물방울이 맺히듯, 정완과 선영의 온도 차이 역시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완의 눈과 안경 사이의 공간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굵직한 물방울이 맺혔다. 굳이 온도를 따지자면 차가운 쪽은 정완이었고 뜨거운 쪽은 선영이었다. 서로가 그 역할을 맡겠다고 나선적은 없었다. 정완은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과 선영의 입장을 바꾸어볼 생각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미처 깨닫지 못한 아둔함에 스스로를 원망했다.
정완은 천천히 노트를 한 장씩 넘겨가며 빼곡하게 적혀있는 수많은 글귀들을 읽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적었던 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따듯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처럼 포근한 이부자리 같았다. 그때는 반드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거침없이 달려드는 현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공포감을 떨쳐주는 존재가 바로 선영이었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정완을 용감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역시 선영이었음을 깨달았다.
살다 보면 인생은 동화처럼 줄곧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정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완은 가끔 예쁜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동화 속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배경처럼 만이라도 살고 싶었기에 정완은 마주한 현실을 도피하는 쪽보다 맞서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 자신의 선택이 선영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그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들쑥날쑥한 심경으로 마지못해 노트를 덮으려 할 때,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나풀거리며 정완의 발 앞에 떨어졌다.
정완아. 요즘 힘들지?, 말 안 해도 알아. 나는 네가 짓고 있는 표정만 봐도 네 기분이 어떤지 대충은 알 수 있으니까. 있잖아, 네 말대로 생각처럼 쉽게 살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꿈만 쫓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룰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나는 너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힘들어. 그때마다 나는 ‘그냥 나랑 같이 힘들어하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해. 나랑 한숨도 나눠 쉬고 걱정, 근심, 고민도 사이좋게 나눠 갖자. 그리고 아주 가끔씩 눈물이 날 때면 그것도 반씩 나누면 안 될까?, 네 속마음, 네 진심이 뭔지 내가 완벽하게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네가 정말 좋아. 네가 너무너무 좋아. 정완이 너는 내 인생에서 언제나 1번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 때, 그때는 꼭 가장 먼저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을래?, 행복해지자 우리.
PS. 사실 지금도 무지 행복해. 나는 이 행복도 너랑 사이좋게 나눠 갖고 싶어. 사랑해.
메모지를 읽자마자 정완은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남겨진 선영의 메모였다. 정완은 아직도 선영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메모지를 손에 꼭 쥐고 하염없이 울었다. 왜일까. 어째서일까.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모른척하다가 상처를 준 것 일까. 정완은 선영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던 그날도 단순히 결혼 이야기에 브레이크를 걸어 잠시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영의 말에 딴죽을 걸며 진심을 토해내지 못했던 그날이 자꾸만, 자꾸만 아른거렸다.
정완은 헤어지자고 말하며 현관문을 나서던 선영의 얼굴 표정을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그날의 상황만큼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일의 결과에는 항상 과정이 존재했다.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과정까지 똑같을 수는 없었다. 선영이 헤어지자고 말하기 바로 직전 상황까지 거슬러간 정완은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무릎에 처박았다. 맨 땅에 웅크려 앉은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눈물을 흘렸다. 들썩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정완은 그저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흥분이 가라앉고, 심박 수가 정상수치로 돌아오고, 떨림이 멈추고, 눈물이 마르기를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아직 가을이 왔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곧 계절이 바뀔 것임을 암시했다. 연신 불어대는 바람이 선영을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지만 정완은 선영이 바람에 떠밀려 그대로 날아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의 마침표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