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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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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May 27. 2019

EP 1) 서른, 그리고 7년.

episode 1.


“헤어지자.”


정완은 늘 그래 왔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현관 쪽으로 향하는 선영에게 되물었다.


“왜 또 그래?”


둘만의 공간이 비틀어지고 있음을 이미 눈치챈 정완이었지만, 퉁명스레 내뱉은 뾰족함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정완의 소맷자락을 힘주어 잡던 예전의 선영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현관 앞에서 침착하게 신발을 신고 있던 선영에게 정완은 끝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선영이 현관문을 나선 후, 두 시간 남짓 동안 정완은 휴대폰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냥 단순한 오류쯤으로 여겼다. 계산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완은 이것이 치명적인 오류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가도 선영은 침묵했다. 정완은 짧게는 삼사일, 길게는 한 달 정도 서로의 곁을 비워두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번 다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수야. 혹시 선영이랑 같이 있어?-

-아니, 왜?-

-선영이랑 또 싸웠어?-

                                                                                                                   -아니야, 아무것도.-

-작작 좀 싸워. 징그럽다 니들 진짜.-


정완은 선영의 단짝 친구인 지수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지수 역시 선영의 행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만남과 헤어짐이 거듭될수록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던 마음 한 편에는 그동안 느껴본 적 없던 불안함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정완은 가슴을 두드리며 불편한 속을 달래 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불편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완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했다.


서른, 그리고 7년.

정완은 선영과의 모든 일들을 저장했다고 믿었던 머릿속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하던 선영의 표정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나이에 접어들면서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문구가 새겨진 높다란 장벽만이 보였다. 7년 동안 정완은 정완만의 언어로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견고하다는 표현을 했고, 선영은 선영만의 언어로 그 사랑의 견고함에 금이 가고 있음을 표현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고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였다.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임에 틀림이 없었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정완과 선영이었다. 하지만 늘 언젠가가 문제였다. 그 언젠가를 위해 정완은 부단히 노력을 했고 그 언젠가 때문에 선영은 노력을 포기했다.


서른, 그리고 7년.

반짝거림은 빛을 잃었고 따스함은 온기를 잃어버렸다. 설렘과 두근거림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생각과 대화, 그리고 표현마저도 엇나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10여 년간 선영의 곁에 있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선영이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지수는 매사가 적극적이다 못해 호전적이었다. 침착했지만 조급함을 숨길 수 없었고, 솔직한 반면 거짓을 일삼고, 밝지만 어두웠던 선영은 자신과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지수를 동경했다. 그렇기에 선영은 날이 갈수록 그런 지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두터워졌다. 지수도 때로는 선영 부러워했다. 감정을 절제하는 방법, 표현을 억누르는 방법, 가슴속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놓는 방법,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척하는 방법, 남에게 의지 하는 방법 등 자신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선영의 그런 능력을 가끔씩은 부러워했다.  


                                                                                                               -선영아. 지금 어디야?-

                                                                                                              -전화는 왜 안 받는데?-                                                               

-미안. 집에서 쉬고 있었어.-

                                                                                                                -정완이랑 또 싸웠지?-

-정완이가 그래?-

                                                                                                     -말도 마. 진짜 지겨워 죽겠다.-

                                                                                        -그러지 말고, 그냥 이참에 결혼이나 해.-

-나도 그러고 싶었어..-

                                                                                                      -싶었다니?, 왜 과거형이야?-                                                                

-지수야. 정말 미안한데, 나중에 통화하자.-

                                                                                                                             -왜?, 바빠?-

-아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지 말고 나와. 지금 너희 집 근처니까.-

-정말?, 누구랑?-

                                                                                                                               -병준이랑.-

-알겠어. 나가서 전화할게.-


선영은 그날 현관문을 나서며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잡아주길 바랐고 안아주길 바랐지만 정완은 늘 그래 왔듯 선영의 바람을 외면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풀려버린 다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선영을 주저앉혔다. 풀려버린 다리에 나사를 조이고 풀고를 반복하던 선영은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스스로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더 이상 7년이라는 시간을 운운하며 그 시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부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기만을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선영은 집 근처 사거리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지수와 병준을 만났다. 병준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지수 옆에 꼭 붙어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해 보이는 선영의 표정눈치챈 병준은 지수에게 사인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준의 배려를 단번에 알아챈 지수는 선영에게 길 건너에 있는 부침개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며 겉옷과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수와 선영은 카페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병준을 배웅하고는 부침개 집으로 향했다.  


“이모. 여기 감자전이랑 소주 한 병이요.”

“지수야. 모둠 먹으면 안 돼?”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응. 그럼 꼬막무침이랑 달걀말이도 시킨다?”


지수가 예상했던 대로 아이처럼 해맑았던 선영의 표정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몇 번이고 쓸어 넘기기만 하던 선영이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는 진짜야. 좋아하는 마음 감추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좋아했고, 사랑하는 만큼 표현하라고 해서 한도 끝도 없이 표현했어. 근데 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걸까?”

“바뀌는 게 없다는 건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좋은 뜻일 수도 있잖아.”

“아무래도 정완이는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우리 벌써 서른인데, 7년이나 만났는데.., 내가 결혼 얘기만 꺼내면 정완이는 얼렁뚱땅 피하기만 해.”

“피하려는 게 아니겠지. 아직 준비가 덜 된 건 아닐까?”

“좋아한다는 말도 내가 먼저 했고, 사귀자는 말도 내가 먼저 했고, 뽀뽀까지 내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 결혼 얘기마저도 먼저 꺼내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지?”

“말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말하면 되지, 그게 그렇게 비참할 일이야?”


주문한 소주와 안주가 테이블에 하나씩 놓일 때마다 선영의 손톱은 점점 더 짧아졌다. 지수는 손톱을 물어뜯는 선영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 좀 해. 다 큰 여자 손톱이 그게 뭐니?, 그래서 요점이 뭔데?,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결혼하자는 말만큼은 먼저 듣고 싶었다고. 얌전히 바라보고 착하게 기다리면 결혼하자는 말은 정완이가 먼저 해줄 줄 알았거든?, 근데 한 번을 안 하더라. 솔직히 그동안 화도 많이 났고 정말 섭섭한 적도 많았어. 그래도 좋아하니까, 그래도 사랑하니까 하면서 몇 번을 참았는지 알아?, 어쩌다 한번 내가 먼저 결혼 얘기 꺼내면 흐지부지 이상한 말만 꺼내는 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 내가 이상한 거야?”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아슬아슬 떨어지려 하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열변을 토하던 선영의 말이 끝나자 지수는 말없이 선영 앞에 놓여있던 투명한 잔에 소주를 반쯤 채웠다.


“어째서 우리는 늘 제자리인 걸까.., 7년이나 지났는데 왜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걸까..”


지수는 오래된 연인들의 뻔하디 뻔한 그런 닳고 닳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혼이라는 초현실적인 주제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눈앞에 놓인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이 선영에게 가장 위로가 될지 쉽게 생각해 내지 못했다. 선영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몇 번이고 지수를 의지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모양새가 아니었다.


서른, 이르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지수였다. 여자 나이 서른과 남자 나이 서른의 관점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려했다. 그러나 선영과 정완이 7년 동안 질서 있게 쌓아온 시간과 지금 상황을 겹쳐 보니 선영이 하는 말과 사고방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무엇 하나 잘못된 것이 없었다.


“선영이 너, 노력 많이 한 거 나도 알아. 그때도 지금도 너는 정완이에 관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정완이부터 챙겼잖아. 정완이가 싫다고 하면 좋아하는 것도 참고, 정완이가 좋다고 하면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살았잖아. 몇 년을 만났는데 걔는 아직도 그걸 모른다니?, 그만큼 했으면 이제 됐어. 그게 사랑 이래?, 정완이 걔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 말이.., 나도 진짜 알고 싶다. 쌓을 때는 그렇게 집중하고 조바심 냈던 7년이었는데, 무너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네. 변하는 것 하나 없이 꾸준하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이제는 7년이라는 시간조차도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정말 모르겠어.”

“근데 선영아. 결혼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해?, 나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 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판단하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돼. 사랑했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지수 네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투정 부리는 건 아니야. 예전에 사람들이 사랑에 유통기한이 2년이라고 말할 때, 나는 믿지 않았어. 권태기 때문에 헤어졌다는 커플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안 믿었어. 정완이랑 나랑은 특별하다고 부득부득 우기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정완이랑 한 공간에서 살고 싶다, 24시간을 통째로 정완이랑만 보내고 싶다, 정완이랑 나를 반반씩 닮은 아기도 낳고 싶다. 뭐, 그런 생각. 그래서 한 번은 농담 삼아 슬쩍 떠봤는데 정완이는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더라고. 처음에는 당황해서 그럴 수 있다 치고 넘어갔는데, 그런 상황이 자꾸 반복되다 보니까 아니라고.., 남들과는 다르다고 믿고 지냈던 내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더라. 사랑만 있으면 된다면서 행복해하던 내 모습도 점점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우리는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곳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냥 나 혼자만의 착각처럼 느껴졌어. 결국,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만나는 걸까?라는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끼어드니까, 뭐랄까?, 이건 아니다. 이건 진짜 내가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어.”  

“참 빨리도 깨달으셨다 윤선영. 진작에 헤어지라고 할 때 좀 헤어지지. 근데 선영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네 말대로 진짜 정완이랑 헤어졌다고 치자. 그럼 너는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정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하기 위해 또 무언가를 내놓을 자신 있어?”

“글쎄,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근데 무슨 배짱이야?, 너 정완이랑 7년이야. 어차피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할 거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 난 매번 너희 둘 이럴 때마다 진절머리가 나.”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내가 알아서 할게. 이게 정말 끝인지.., 아니면 나한테는 정완이밖에 없는지 스스로 답을 찾고 싶어. 가능하다면 나 스스로 알아내고 싶어. 이건 내 진심이야.”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나서 또 헤어지고, 내가 너였다면 이런 감정 소모는 진작 끝냈을 거야. 이건 분명 잘하느냐 마느냐, 하고 싶냐 아니냐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봐. 항상 결과가 두려워서 뒷걸음질 치는 네 모습 보는 것도 싫고, 남들 사랑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응. 이번에는 분명히 할게. 나 이제 울지 않을 거야. 울어도 소용없고, 탓해도 소용없다는 게 현실이니까. 지수야,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지수는 선영이 진심으로 내민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악당에게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있던 선영을 매번 달래주던 지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정완에게 빼앗긴 사탕을 선영의 손에 다시 쥐어주며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무언가 답을 찾아 나서겠다는 선영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고 절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영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의 끝이 새로운 길인지, 혹은 막다른 길인지, 아니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수는 선영이 의지하는 길잡이로써 나침반을 손에 쥐고 정확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길의 끝을 찾는 것은 온전히 선영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서른,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찾아보려 한 적도 없던 지수였다. 자신감과 솔직함, 강직함과 뚝심 하나로 지금껏 잘 살아왔다고 믿어왔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부딪혀보고 뒷일을 생각했다. 똑 부러졌다는 주변의 평판이 자자했으나 사랑만큼은 예외였다. 그저 곁에서 자신만을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보고 싶을 때 나타나 주고 생각날 때 연락해주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것이 사랑이던 우정이던 지수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선영을 집까지 바래다준 지수는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선영이처럼 사랑하고 싶다.’


정완과 선영의 7년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몇 해가 바뀌어도 좀처럼 시들어버릴 기색이 없던 선영의 오롯한 사랑이 부러울 뿐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꾸준히 좋아하고 사랑해 본 적이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손에 꼽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떠오르는 첫사랑과 그 후로 잠시 스쳐갔던 몇몇 사람들의 윤곽만 희끗하게 보일 뿐이었다.


‘사랑도 재능일까?, 그렇다면 선영이는 사랑에 재능이 있는 걸까?’


억지로 똘똘 뭉친 생각을 해보았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해봤냐는 질문만 되돌아왔다. 지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은 재능이 있는 사람을 결코 부러워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합리화시켜보려 해도 스스로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지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병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준아, 자?-

-아니, 아직. 어디야?-

                                                                                                    -선영이 바래다주고 집에 왔어.-

-선영 씨가 뭐래?-

                                                                                                       -정완이랑 또 싸운 모양이야.-

-이번이 몇 번째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너는 다 알 줄 알았지.-

                                                                                                       -심란하다. 불안하기도 하고.-

-네가 왜?-

                                                        -이번에는 진짜라는 선영이의 단호함마저도 사랑처럼 느껴져서.-

-선영 씨는 진심으로 헤어질 생각이래?-

                                                                                                                           -잘 모르겠어.-

                                                                                           -병준아.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글쎄. 그게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

                                                                                         -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게 있네.-

                                                                                                                         -근데, 병준아.- 

                                                   -나이 서른에 아직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이상할게 뭐 있어?-

-근데, 뜬금없이 웬 사랑?-

                                                                                                                                    -그냥..-

-갑자기 왜 이러실까?-

                                                                                 -나 오늘 선영이한테 조금 모질게 군 것 같아.-

                                                               -감당할 수 있겠냐, 내키는 대로 해라, 이딴 소리나 해대고.-

-별일이네.-

                                                                                                      -그치?, 네가 봐도 이상하지?-

-너무 신경 쓰지 마.-

-가끔은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한때도 있는 거니까.-

                                                                                         -정신없이 채우다 보니 넘쳐버린 걸까?-

                                                                                               -채우려 하지 않아서 비워진 걸까?-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병준아. 너는 사랑을 믿어?-

-그냥 사랑이 눈에 보이는 거라면 보여주고는 싶다.-

-눈에 보이는 거라면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보여줘?, 누구한테?-

-늦었다. 먼저 잘게.-

                                                                                                      -뭐야?, 갑자기 왜 딴소리해?-

-잘 자.-

                                                                                                         -야, 김병준!, 말해주고 자!-

                                                                                                                    -야!, 내가 귀찮니?-


휴대폰을 내려놓은 병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병준은 오래전부터 지수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꺼내면 어디론가 날아갈까 두려웠고 안으면 깨어질까 두려웠다. 바라보기만 해도 닳아 없어질까 싶어 애지중지 할 뿐이었다. 오래전 지수가 병준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지만 병준은 지수를 거절했다. 병준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사랑은 식어버린 후에는 반드시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내재되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준은 영겁의 시간이 반복되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우정이 올바른 선택지라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병준은 무거운 쇳덩이를 온몸에 두르고 행성 주변을 일정한 속도와 궤도를 지켜가며 맴도는 인공위성 같은 존재가 되기로 결심했다.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거나 경로를 이탈한다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그대로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온몸이 바스러질 것은 두려움도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겁이 났던 병준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엄격하게 지켜왔다. 가능하다면 그저 엔진의 수명이 다 될 때까지 지수라는 이름의 행성 주변만을 맴돌다 자연스럽게 추락하고 싶었다. 그곳이 지수의 품 안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먼 훗날 그 행성을 감싸던 위성의 이름, 혹은 추락한 잔해에 붙어있는 숫자만이라도 기억해준다면 병준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각, 정완은 작업실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결과에 잠시 항복을 선언하고, 꼿꼿이 세웠던 의자의 등받이를 길게 뉘어 몸을 쭉 뻗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연락도 없는 선영의 SNS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프로필 사진도 간간히 올라오던 게시물도 선영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던 날이면 애꿎은 선영에게 짜증을 내던 모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면 양손 가득 반찬을 만들어서 집으로 가져오던 모습,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 장난스레 노트북을 빼앗았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러다 말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완은 며칠 전부터 선영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보았지만 선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정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작업실을 빠져나와 곧장 선영의 집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3층 계단에 멈춰 선 다음 굳게 잠겨있는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일단은 헤어진 사이었음을 의식했때문이었을까. 혹은 무심코 누르고 들어간 선영의 집에 낯선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단 몇 초 만에 불길한 추측들이 정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정완이 인터폰을 누르려는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히 받아 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선영이 아니었다.


“오빠. 지금 어디예요?”

“응, 잠깐 나왔어. 왜?”

“좀 전에 사무실에 어떤 사람이 와서 오빠 찾았어요.”

그래?, 지금 바로 갈게.

“아니에요, 천천히 와도 돼요. 오빠한테 전해주라면서 명함이랑 이것저것 주고 갔어요.”


정완은 곧장 계단을 내려와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선영의 집 앞까지 가놓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들어온 일거리에 그 아쉬움은 잠시 동안 미뤄두기로 했다.


메이저에 포진한 유명한 작곡가들의 곡에 누구에게공감되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가사를 입혀 보는 것이 정완의 오랜 숙원이었다. 한때 시를 쓰고 글을 썼던 정완이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원곡을 재해석한다는 기이한 이유로 기존에 나와 있던 유명한 노래들을 개사하면서부터 작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흥미로 시작했던 일은 어느새 생업이 되었고 기회라던가, 운이라던가 하는 것들에 가려져 그 생업은 점차 고단함과 절망감, 상실감과 무기력함을 차례로 불러왔다.


아직 서른, 꿈을 접기도 다른 꿈을 펼치기도 모호한 나이라고 생각했던 정완이었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처음 마주친 현실의 냉혹함을 일찍부터 경험했던 정완은 서른 즈음엔 아등바등 대며 살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수시로 했다. 최저가를 검색하고, 공과금을 아끼고, 와이파이를 찾아다니고, 가계부를 쓰고, 아침과 점심을 굶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때마다 정완이 살고 있는 현실은 정완의 꿈을 멋대로 좌지우지하게 만들 만큼 정완을 괴롭혔다. 하지만 정완은 이대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미야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오빠. 근데 문까지 꽁꽁 잠그고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아.., 선영이한테.”

“왜요?, 언니랑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아니야.”

“잘 좀 해요. 삐딱선 타지 말고요.”

“그나저나 누가 찾아온 거야?”

“오빠한테 낮에 이메일이랑 문자 보냈다던데요?, 보냈다던 메일에 첨부파일도 있겠지만 혹시 몰라서 USB에 다운 받아놨어요. 그리고 의뢰 내역이랑 스토리 같은 것도 메일에 적혀있겠지만 편하게 보시라고 프린트도 해놨요.”

“고마워. 나중에 경미 남자 친구 생기면 오빠가 근사한 데서 밥 한 끼 살게.”

“그럼, 이번 생은 글렀네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직 20대면서.”

“몰라요. 아무튼 저 먼저 퇴근할게요. 내일 봐요.”

“응, 고마워. 조심해서 가.”


정완의 작업실과 경미의 작업실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었다. 정완은 작사를 할 공간만큼, 경미는 소규모 켈리그라피 강의를 위한 공간만큼 사무실을 나눠 쓰고 있었다. 정완과 경미는 사무실 쉐어링 광고를 보고 찾아온 부동산에서 처음 만났다. 혼자 쓰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둘이 쓰기에는 이만한 가격대의 사무실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동시에 입주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밀린 월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 소득을 얻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되어도 두 사람은 좌절하지 않았다. 경미는 나름대로 꿈을 가꿔가는 단계 정도로 여겼고 정완은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끔 한 번씩 불편함과 불만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뿐이었다. 그저 가끔씩 거쳐가는 것일 뿐 그것들이 인생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편과 불만은 그저 불편과 불만일 뿐, 불우하다거나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미와 정완은 아직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았지만 각자의 꿈을 향해 정주행하고 있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정완은 작업실로 돌아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미에게 받은 USB를 PC에 연결하고 첫 번째 파일을 열어보았다. 간결한 마우스의 클릭음이 끝나자마자 반주만 실린 멜로디가 정완의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따스하고 풍요로운 소리는 밝은 느낌의 가사 어울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의 달콤한 향수 같은 이야기로 콘셉트까지 순조로게 잡았다. 첫 번째 파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분명 밝은 느낌의 가사가 지배적일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했다. 자연스레 두 번째 파일이 재생되었을 때, 정완은 방금까지 꼭 그렇게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보컬이 뱉어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이 노래는 반드시 정완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적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 이별의 초읽기에 접어든 순간을. 7년간의 사랑과 작별을 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을 말이다.


정완이 복잡한 심경으로 손등에서 연필을 리며 가이드보컬의 음성이 담긴 파일을 반복해서 듣고 있 그때, 휴대폰울렸다.


                                                                                                      -오빠. 아직도 작업실이에요?-

-응. 이거 꽤 어려운 곡이 들어온 것 같네.-

                                                                                                   -왜요?, 오빠 가사 잘 쓰잖아요.-

-글쎄.., 이번 곡은 필이 딱 꽂히지가 않네.-

                                                                                                -그럼, 저랑 맥주 한 캔 하실래요?-

                                                                                           -집에 도착했는데, 영 잠이 안 와서요.-

-그럴까?-

-나도 오늘은 멜로디만 들으려던 참이었거든.-

                                                                                                                             -잘 됐네요.-

                                                                                                              -제가 작업실로 갈게요.-


늦여름, 습한 기운도 눅눅한 바람도 천천히 물러가고 있었다. 예전보다 부쩍 짧아진 가을이기에 더욱 기다려지는 것일까. 경미는 편한 차림으로 맥주를 사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정완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무언가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긴 것이 아니었음에도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은 기분이 마냥 좋았다. 경미는 그냥, 그 기분이 한없이 좋기만 했다. 


경미는 언제부터인가 출근을 할 때 커피 두 잔, 아침을 거르고 나온 날이면 샌드위치도 두 개, 예쁜 펜을 발견하면 그것도 두 개씩 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완을 의식하게 되고 정완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경미는 분명 선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 그리고 깊게 패인 상처에 새살이 돋고 있다는 기분만 느낄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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