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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솔 Oct 30. 2024

수술을 해야 되는 건지

내가 장군이라면


  6월 25일, 평소와 다름없이 산책했던 장군이는 하루 만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장군이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병원에서 상담받은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장 종양 중에서도 혈관육종이 높은 확률로 의심됨.

수술을 하지 않으면 1개월, 수술을 할 경우 2~3개월의 기대여명.

3개월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며, 수술을 해도 평균 기대여명에 못 미칠 수 있음.

장군이와 비슷한 상황의 보호자들은 대략 50:50으로 수술 또는 호스피스를 선택함.


  장군이는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즉시 입원했다. 남편과 나는 다음 날 다시 주치의 선생님을 뵐 때까지 수술 여부를 결정하여 답변드려야 했다. 당황스러움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 강아지가 몇 개월 뒤 옆에 없다는 상상은 말이 안 되는 느낌이다. 비현실적이다.


  스트레스 상황과는 별개로, 나는 사실 수술에 대해 불과 몇 시간 만에 확고한 결심을 내렸다.



  임상 간호사로 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인들로부터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의 수술 또는 치료 결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아픈 상황만으로도 힘든데, 즉각적인 치료나 수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은 아무리 고민해도 어렵다. 환자가 고령이거나 다른 질환이 있는 경우 등 부차적인 요소들이 결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일관되게 적용하는 대화 방식이 있다.


“환자의 생각은 어때요?”


  치료 결정 과정에서 환자 본인의 의사를 묻기보다는, 가족들이 상의하여 결정하는 경우가 예상외로 빈번하다. 이는 환자의 정신적 충격을 우려하거나, 고령의 환자라 판단하거나, 실질적인 돌봄 책임이 보호자에게 있다는 인식, 또는 불행한 소식을 완곡하게 전하려는 우리나라의 정서 등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치료 결정 과정에서 환자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 적다는 것이다.

  임상 간호사로 일하면서 '환자 본인의 의사가 좀 더 존중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이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타인의 상황에 대해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라고 여기며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장군이의 수술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 내 안에 간직했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장군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의 생각을 물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장군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때, 장군이의 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진단받기 전날, 장군이는 정밀 초음파를 위해 다른 병원에 하루 입원했었다. 큰 병원으로 전원해야 하는 당일, 나는 아침 일찍 장군이에게 갔다. 엄마와 갑자기 떨어진 장군이가 너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해서 엄마를 발견하면 반가움과 흥분이 섞여 달려올 줄 알았던 장군이는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장군이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아 양팔을 벌려 부르는데도, 장군이의 눈은 여기저기를 바쁘게 훑었고 움직임은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정신없어 보였고 무언가를 급히 찾는 듯했다.

  장군이는 가슴줄을 잡고 있는 나를 힘으로 끌듯이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가더니, 골목을 지나 어제 잠깐 들렀던 공원으로 달려갔다. 풀숲에 코를 여기저기 박아대더니 이내 한쪽 다리를 들고 ‘쉬——’ 했다. 얼마나 오래 하던지 보는 내가 소변 마려워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방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내가 익숙한 모습의 장군이'로 돌아왔다.



  나는 장군이의 이 모습이 번뜩 떠올랐다. 엄마만 보면 환장하는 장군이가 엄마도 다 제쳐두고 “어제 갔던 데 가서 쉬해야 돼”라는 듯한 모습. 장군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변이 마려우면 당연히 급하게 보고 싶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장군이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고, 이유도 모른 채 차갑고 좁은 낯선 공간에 남겨졌으며,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아프게 했다. 다리에 아픈 것이 꽂혔다. 엄마가 사라졌다. 아빠도 없다. 장군이는 비장종양이 뭔지 모를 것이고 관심도 없겠지만, 하루아침에 보호자와 떨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군이는 충격에 휩싸여 기력이 쇠했을 수도 있고,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소변을 지리는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는 혼비백산한 상태에서도 엄마를 이끌듯 자기가 결정한 곳에 가서 소변부터 해결한 뒤 엄마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것이 장군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장군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가 생리적 불편을 해소하고 편안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친구라고 해석했다. 물론 이는 내 해석이다. 하지만 표현한 것은 장군이가 맞다. 사람도 저마다의 성격이 있고 각자의 선택을 하듯이, 장군이는 강아지들 중에서도 이런 성향을 가진 친구이며,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만약 이런 성향의 장군이가 자신의 수술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남편에게 그날 우리가 함께 본 장군이의 모습에 대한 내 해석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장군이의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었고, 장군이와 함께할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지기를 바랐다.


수술 전날, 면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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