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그 너머, 다섯 번째 계절_ 시간을 쓰는 법

허전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 : )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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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구위에서 중심 잡는 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크고 작은 다채로운 색감의 구, 누구나 그 위에서 살아간다. 누구나 불균형 속에서 삶을 메꿔간다. 한결 공평하게… 그렇게 믿으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울어진 저울 위에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신이 제법 공평히 나눠준 것이 있다면, 숨결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구도 같은 시간 안에 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계절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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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약속 시간에 늦는 나. 뻔뻔하지 않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매번 서둘러 준비한다. 내 유리병 속 모래알들에 누군가 기름칠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이리저리 쪼개어 분초로 채비해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간다.

완벽한 세팅의 완벽한 실패.

이리저리 궁리하고 다 챙기고 사방팔방 참견하며 두서없이 하다 보면, 뭐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집 시계는 오분이 빠르다.

그럼에도 이 오분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시간이 충분하다 여기는 날을 오히려 더 늦어버리는 기묘한 째깍째깍.


조용히 앉는다.

안락함에 안겨 눈을 감으면 부산하게 움직이는 내가 보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종종걸음에 발바닥은 불이 나고, 해야 할 일들이 어깨 위에 올라타 나를 누른다. 머릿속에서 와글거리는 알림들이 사방에서 나를 부른다.

‘내가 먼저야!’

‘넌 저리 가! 나부터!‘

’ 중요한 건 나라고.‘

사탕에 몰린 개미무리처럼,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물결은 늘 조용했지만, 나만이 늘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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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이 소비된 수많은 내 순간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리는 당연하다 여기고 흘려버린다. 얼어붙은 흙껍질을 녹여 새 움을 트게 도와주는 봄의 햋 숨결, 서로의 눈망울에 맺히는 연둣빛 물방울의 맑음. 투명한 생명으로 맹렬히 외치는 매미는 여름을 달군다.

위잉위잉위잉— 더 타올라라. 더 살아내라.

시간은 그렇게 계절을 밀고 당긴다.


떨어진 잎새는 그 봄의 생을 보내며 황금빛으로 타올라 뒹군다. 귤껍질의 콤콤한 향이 손끝에 머문다. 지는 겨울의 다이어리는 여백기 가득하고, 그 빈칸엔 아쉬움이 눌러앉는다. 계절의 한 해 살이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태초의 호흡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렇게 남은 마지막 한 장이 무력하게 흔들린다. 아롱거리는 색들이 무지개를 건너 내게 온다. 다시 피어날 시간들은 고귀하다. 이를 쉬이 여기는 나는 무릎으로 흐느낀다. 간간히 떨리는 티셔츠 자락이 내 대신 입을 연다.


돌이켜보면 헛되이 소비한 나의 나날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마트에선 1+1을 찾아 헤매고, 최저가를 고르느라 가격표를 붙일 수 없는 시간을 흘려버린다. 이불속에서 반복되는 알람을 지워가며 ‘5분만 더’를 외치고, 빠른 길을 찾겠다며 들어선 골목이 막혀 돌고 돌아 날려버리는 찰나. 이모티콘을 찾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고, 책장을 넘기다 멈춰버린 문장 위에서 한참을 맴돈다. 입었다 벗어놓은 옷들이 침대 위에, 한 짝씩 신어본 신발들을 현관 앞에 뒤집어진 채 여기저기. 서랍을 정리하다 말고 추억을 되새기며 해는 저물어간다.

머뭇거리다 돌아서고, 두려워 시작 못하고, 그 사이 계절은 묵묵히 나를 넘어간다. 얼룩진 티슈의 커피 향처럼 아쉽게, 질겅질겅 씹어 단맛 빠진 껌처럼 질기게. 오래되어 흐릿한 안부만 남은 편지는 답이 없다. 손을 넘어 흘러간 강물은 두 번 다시 비빌 수 없는 물결이 된다. 지나간 날들은 노트 뒷장에 남은 연필 자국처럼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노을로 물든다.

가치를 논할 수 없어 턱 하고 안겨진 숨결은, 돈이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함이다. 아난시가 엮어내는 실들은 한없이 여리고 곱다. 그러나 그 실들이 모여 씨실과 날실이 되어 결국 삶이라는 문양을 짜 올린다. 새벽의 이슬처럼 가녀린 순간은 결국, 내가 되고, 나는 내일로 이어진다.

유한한 시간을 살고 가는 우리는 무한한 흐름 속에서 숨결을 이어간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생명 그 자체다.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분명한 나의 본질이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사거나 팔 수 없는 생명의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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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빛이 여름을 달구고,

가을은 열리고 겨울의 쉼으로 이어진다.

그 쉼에서 다시 싹 틀 호흡으로,

나는 또 한 계절의 문턱에 선다.


내 맘에 허전함으로 젖는다.

허전함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모래알이 아닌,

뭉쳐질 흙덩이다.

빛이 사라진 곳에 온기가 일렁이고, 흘러간 시간은 잔에 마음을 채운다.

한 잔의 숨은 새 계절 안에서 자라난다.


그렇게 허전함은 내 안의 순간들이 다시 숨 쉬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사라지지 않은 채 흐른다.

나로 피어나, 다시 일어섬이 되기를 바라며.


결국, 시간을 쓴다는 건

삶이 익어간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다음 계절에서 함께 익어갈 테니,

웃으며 안녕, : )


월, 화, 수, 목,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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