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숨결이 모여 울창해진다.
풀꽃 하나는 작은 비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의 미미함이란.
봄바람처럼 순간 나를 지나가는 관계가 있다. 약속 장소를 향하는 내 곁을 스쳐 가는 수많은 발걸음은 나와 어떻게 엮여 있을까? 책상을 정리하다 발견하는 작은 메모지에서 떠오르는 사람. 올해처럼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여름이 있었던가? 그날 하루, 우산 없이 외출한 나는 두 손으로 머리만 겨우 가린 채 근처 아무 카페로 뛰어들어갔다. 가볍게 여기저기를 털고 스산해진 속을 달래러 따뜻한 라테를 한 잔 주문했다. 앞뒤로 서서 각자의 주문을 하는 이들도 젖은 몸을 흔들어 댄다. 스치듯 마주한 한 여학생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뜨거운 한낮을 식히는 빗속에 우리는 삶의 한 점을 공유하고 기약 없이 스치며 재스민 향기를 한 방울 떨군다.
찰나에 빛으로 내게 떨어지는 별똥별.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내 안에 남아 큰 빛으로 모인다.
집 앞 편의점, 컵라면 끓어오르는 매콤한 냄새와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가득 앉아있는 곳. 넓은 형광등 아래 고개를 쑥 떨군 그가 말은 던졌다. 1년 넘게 봐왔지만, 그와 눈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달은 다른 할인이 있어요.” 짧은 말에 묘한 끈이 묶였다. 모래시계 안의 모래알처럼 오가는 존재로 우리는 항상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빛났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처럼 의식하지 무던히 지나가는 관계들이 있다. 당연하게 여겨 소중함을 알기란 쉽지 않다. 의식하지 않으면 감사함을 놓치고 만다. 가까이 있지만 깊이 알지 못하는 무심함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배경 음악 같다.
작은 음 하나도 빠지면 온전한 교향곡은 울릴 수 없다.
다양한 음색을 지닌 악기들이 소리를 모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가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넓게 흩날리는 햇살에 가슴을 연다.
바람이 스친 자리에 온기가 차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계절 안에서 호흡을 나눈다.
대학 동창들과의 만남은 웬만한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한다. 서울, 제주, 중국, 베트남으로 흩어져 각자의 삶을 보내고 있기에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렵다. 새해가 되어 인사말을 남기다 그녀들이 떠오를 때면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대화창을 누군가 두드린다. 이런 인사조차 심지어 삼사 년 만에 한 번 있기도 하다. 각자의 삶의 빛을 태우느라 여념이 없기에 그럼에도 그 빛은 바다를 건너와 내게 닿는다. 멀리서 흘러온 강물은 결국 우리라는 바다에서 만나곤 한다.
밤 11시, 핸드폰이 울린다. 알림 하나.
‘ 저도 님과 비슷한 일을 경험했어요. 오늘 글을 읽으니 생각이 나요.’
어디에 사는지,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이의 댓글, 푸른빛 너머의 그와 같은 시간 위에 있다.
온라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온기를 전하는 관계들이다. 내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성장을 지지하는 지기들이 있다. 우리가 알아온 관계가 자라나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다가온 그들은 오히려 내 삶의 중앙에 가까이 와 있다. 공기와 바람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나를 지탱해 주는 배경이 된다. 계절을 함께하고 낮과 밤을 주고받는다. 생과 사를 공유하고 감정을 맞댄다. 처음 온라인 통신을 접속하던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기계음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낯설지 않다.
별은 하나의 점으로 마음에 담기지만 그 점을 이어 보면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진 별자리가 된다.
거리를 떠나 우리가 맺은 인연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각자의 결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하나로 모인다. 스쳐 간 인연, 무심한 만남, 멀리 있는 연결, 보이지 않는 끈마저도 나와 닿아 있다. 산과 들에서 온 재료들이 우연히 한 그릇에서 만나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처럼. 모든 인연은 저마다의 맛을 내며 삶을 풍성하게 한다. 관계라는 그릇에서 만나 우리를 채우고 깊은 맛을 낸다.
나는 우주라는 너른 들에서 나부끼는 풀꽃 한 송이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숲 속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흙 아래로는 지구의 나이만큼의 뿌리의 흔적들이 뒤엉켜 자양분을 나눈다. 서로를 단단히 잡아준다. 그 힘으로 단단한 땅을 밀고 올라왔다. 흐르는 계절이 주는 희로애락의 멜로디에 맞춰 흔들거린다. 비바람에 꺾여 숨을 다할 순간도 함께하는 이름 모를 수풀과 함께 이겨낸다. 그리하여 군락을 이루고 석양에 물들어 다음 생을 이어간다. 살아 있는 내가 이름 모를 당신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이것이 관계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칼릴 지브란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나무의 가지다.”
인디언 속담은 전한다. “우리는 모두 땅속뿌리로 이어진 숲의 나무다.”
우리는 가지이고 뿌리이며, 숲이다.
멀리서 찾아온 바람이 잎새들을 흔든다. 바스락바스락, 포개진 숨소리 속에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