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품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빛의 응어리의 울음소리,
억만 겹의 둑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물방울,
아직 푸른 불씨에 태양의 불길을 불어 줄 한숨의 호흡,
하늘을 찌를 듯 쌓이던 눈더미가 마지막 눈송이로 무너질 때,
바다는 파도를 삼켜 스스로로 돌아간다.
지구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던 물의 조각들이
인어공주의 진주알이 되어, 하늘 너머로 반짝임이 번졌다.
그런 자연의 이치들이 바로 임계점이다.
하나가 그 자신으로 가득 차올라 다른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물질적 정황이다.
찰나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
이 순간을 위한 기다림은 새삼 지루하다.
짧게는 몇 분에서 수억 년 동안의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어떤 것은 인간의 오감이 낚아챌 수 있지만,
대부분은 공백을 걸치고 있어 쉬이 지나치곤 한다.
올여름의 해는 누렇게 타버린 온돌처럼 오늘을 아지랑이 타게 만든다.
뜨거움을 꽤 잘 참아내는 나도 임계점을 넘은 듯하다.
고집하던 따스한 물 대신 얼음컵을 꺼내고 정수기의 찬물 버튼을 누른다.
물이 컵으로 빨려 들어간다.
흔들리며 차오르는 물 건너로 내 손이 아른거린다.
한낮 더위가 터져,
멍한 손이 실수를 한 듯하다.
크고 작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팝콘 터지듯 튀어 오른다.
여백이 보여 흘러넘치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
맑음은 순수하다.
솔직한 임계점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이 물컵처럼, 우리의 하루 속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이 포개져있다.
인식하지 못하는 숨과 고를 수 있는 숨이 있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멈추게 하던
_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옹기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에는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수고가 있다.
욕심을 채우면 이내 넘치고 마음을 깎으면 차오른 정도를 가늠하기 힘들다.
옹기 항아리의 숨구멍 사이로 세상이 들락거린다.
그 숨에 희로애락이 묻어있다.
나를 만드는 임계점들 대부분이 함께 호흡한다.
올려다보면 공허하고,
내려다보면 허망하다.
채우려 하면 지치고 포기하기엔 아쉽다.
두려움과 희열이 묻혀 있다.
파멸과 가능성이 닿아 있다.
무너짐과 전환이 공존한다.
시작과 끝이요, 나아가며 멈추진 지점이다.
열리지도 닫혀 있지도 않은 문의 정점 - 야누스의 항아리다.
야누스의 항아리는 모순이 아닌 전환 그 자체이다.
반대의 의미는 서로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 개의 얼굴을 모두 품어야 한다.
비어 있는 항아리에서 희망을 건져 내고,
흘러넘치는 물살을 버텨 내야 한다.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 유와 무,
희망과 절망,
진실과 허위, 가능과 불가능,,,
성공과 실패,
생과 사.
질서와 혼돈.
결국 어긋나듯 썰리는 찰나들의 반복.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순간은
텅 빈 공간에 잠시 머물 뿐이다.
삶은 이 경계를 흐르듯 지나갈 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무한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놓인 우리는 과정에 있다.
긍정과 부정의 감정 한쪽에 매몰되지 말고,
경계에서 흔들리며 나아가기를 꿈꾸는 것이
우리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엔딩씬이 아니다.
살아 있기에 왕자와 공주를 그리며 씨앗을 품는다.
다양한 감정과 상태의 씨앗을 옹기 항아리에 심는다.
버티고, 이겨 내며,
항아리를 채운다.
모두가 나이기에.
문지방은 늘 두 얼굴을 품고 있다.
야누스는 말한다.
“시작과 끝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이다.
너는 지금 문지방에 서 있다.
어느 방향으로 문고리를 밀고 나아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