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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Aug 19. 2020

마흔 넘어 강원도가 좋아지는 이유


강원도라는 지역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건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부터다. 어린 아가를 데리고 다닐만한 여행지 중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바다가 그곳이었으므로. 묵직한 푸른빛이 감도는 강원도 바다는 육아에 지친 내게 언제나 곁을 내주었다.




태어나 엄마 역할이 처음인 나는 하나부터 아홉까지 무척 서툰 엄마였다. 그나마 열 번째, 방긋방긋 웃는 아기와 눈 맞춤하며 교감하는 게 좋아 오롯이 사랑의 힘으로 10년을 버텼나 보다. ‘존버’는 육아에 있어서도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도 여전히 허둥지둥 하지만 마흔에 접어들어 엄마라는 이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그때의 모습은 30대를 통과하고는 있지만 엄마도 어른도 아닌, 모든 게 참 어설픈 시기였다.    


엄마 역할을 잘하고 있는 중인지,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오고 의뭉스러울 때마다 강원도 바다는 늘 변함없이 나를 감싸 안고 토닥토닥 위로해주었다. 밀물과 썰물을 살랑살랑 거리며 마음속으로 들어온 파도가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밖으로 깨끗하게 씻겨 보냈다. 철썩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보낼 마음은 너울지는 물결에 보내버리고 지켜야 할 마음은 먼지를 털고 곱게 접어 마음 한 구석에 남겨두었다. 그러다 보면 뾰족해진 감정들이 어느덧 동글동글 해지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개운하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바다를 보며 마음을 다독이다 보니 강원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언제든 찾아가도 묵묵히 너른 어깨를 내어주는 든든한 애인 같았다. 잘생기고 튼튼한 소나무가 군집을 이루는 낙산해변, 카페거리가 형성된 이국적인 안목해변, 바리스타 1세대 박이추 카페가 자리 잡은 사천해변, 포토존에서 사진 찍는 재미가 쏠쏠한 강문해변 등. 가만히 살펴보니 자기 자리에서 몫을 다 하는 강원도 바다는 요란스럽지 않아 마음이 더 끌렸다.     


몇 년 간 강원도의 매력에 흠뻑 취해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비행기를 제대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강원도를 찾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다른 나라의 바다는 나름의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나를 유혹했다. 마치 새로 만난 현 남자 친구가 너무 멋있어 전 남자 친구와의 추억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강원도에 대한 마음이 미안스럽게도 자연스레 식어갔다.    




“호텔 패밀리 스위트룸 잡았는데 조카 데리고 같이 가자.”    


남동생네 가족이 엄마 아빠와 함께 강원도에 간다고 한다. 몇 개월 바람을 못 쏘여 답답하던 찰나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유독 장마가 길고 연신 비 피해 소식이 전해졌지만 주저 없이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이 예약한 호텔은 겉보기는 조금 시시했는데 속에 들어가 보니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내실 있는 곳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괌 투몬 비치 호텔 못지않은 멋진 오션뷰를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 쪽에 난 격자무늬 창을 통해 바라본 강원도 바다는 마치 그림 같았다. 거센 비바람이 할퀴고 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차분하고 은은하다.      


“복어회 먹어본 적 있냐? 이번에 그거 한번 먹자.”    


복어찜, 복어 지리는 먹어봤어도 복어를 회로 먹은 기억은 없다. 복어가 회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는 것을 아빠 말 듣고 처음 알았다. 맛집 취재 덕분에 다양한 국적의 다채로운 음식을 경험해본 터였지만 복어회는 먹어본 적이 없다. 혹시 맛의 기억을 까먹은 건가,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동생이 엄마 아빠를 모시고 주문진 시장에 가서 회를 떠 왔다. 새하얀 속살을 자랑하는 먹음직스러운 회 두 접시가 식탁에 놓였다. 서비스로 받아온 세꼬시까지 세 접시다. 도톰하게 썰어진 회와 그보다 조금 얇게 썰어진 투명한 회. 개수를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겹쳐져 있지 않고 얇게 썰려진 회가 복어회란다. 나무젓가락을 들어 간장에 살짝 적셔 입에 넣었다. 광어회도 쫄깃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몇 배로 쫀득쫀득 거리는 식감이 생경하다. 입에서 우물우물거려보니 처음 접해보는 식감임에 분명하다.     


“어떠냐? 맛이 괜찮지? 서울 고급 횟집 가면 대패처럼 얇은 몇 점의 복어회가 가격은 훨씬 더 비싸.”    


아빠는 미식가답게 음식 맛은 물론이거니와 도시에서 유통되는 가격과 현지 가격을 잘 알고 있다. 옆에 있는 광어회를 집었다. 복어회를 먹다 광어회를 입 속에 넣으니 부드러운 건지, 흐물거리는 건지 그날따라 기억 속에 저장된 식감과 사뭇 다르게 씹힌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복어회를 입에 넣고 옹골지게 꼭꼭 씹어 넘겼다. 이런 식감이 다 있나. 그냥 쫄깃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쫀득쫀득한 식감의 신세계다. 씹으면 씹을수록 코로나로 쌓인 스트레스가 싹 날아간다.    


입이 짧아 먹는 양이 많지는 않지만 의외로 나는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타입이다. 매콤한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처럼 바삭바삭하거나 아삭아삭하거나 쫀득쫀득한 식감의 음식으로 맛보다 씹는 것에 초점을 두고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 면에서 복어회는 몇 점만으로도 몇 개월치 스트레스를 잘도 날려준다. 박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충분히 제 값을 한다. 만약 도시의 고급 횟집에서 복어회를 처음 맛보았다면 이렇게까지 호들갑은 안 떨었을 것 같다. 제아무리 복어라 해도 대패처럼 얇게 썰어 나온 한 점이 그리 강렬한 쫄깃함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찾은 강원도는 푸르른 바다를 눈앞에 두고 복어회 맛을 본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훌쩍 자란 커다란 강아지 같은 아들과 재잘거리는 귀염둥이 아가 조카들이 형제애를 다지며 하룻밤을 보낸 것도 뜻깊은 추억이다. 여러 가지 이유 덕에 갈대 같은 내 마음은 다시 강원도가 좋아진다. 처음엔 바다 덕분이었고 이번에는 복어회와 가족 덕분이다. 나이 마흔에 접어들어 강원도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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