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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Nov 03. 2021

가끔 동화책을 보는 이상한 어른이


가끔 동화책을 읽는다. 언니 2명에 그녀들의 자녀가 각각 2명씩 있다 보니 물려받는 동화책 양이 꽤 많다. 아이가 자라나는 속도보다 물려받는 책의 속도와 양이 가파르게 증가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책꽂이에 꽂을 자리가 부족해 방 한구석에 쌓아놓다 읽을 시기를 놓쳐버린 동화책이 여럿 되더라. 그 책들을 다시 동생네한테 물려줄까 하다 세월의 흔적이 깊숙하게 묻어나 솎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무작정 폐품으로 버리기에는 우리 집까지 들고 온 언니들의 노고가 아까워 나라도 읽어보자, 는 마음에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허투루 봤던 책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고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귀여운 의성어 의태어와 함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육아서적보다 동화책을 읽는 것이 미취학 아동을 키우기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본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낼 줄 모르는 엄마였다. 느릿느릿한 아이의 행동은 거북이 같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말이 더디고 발음이 불분명한 말투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주변에서 걱정을 해도 생일이 느리다는 핑계로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을 바이블로 삼으며 잔소리하는 엄마 대신 기다려주는 엄마로 방향을 잡았다.        


요즘 엄마 같지 않은 느긋한 마음으로 아들을 키우는 스스로가 대견한 듯 착각 속에 살았다. “남자애 엄마라 다르네요”, “점잖으신 분”이라는 유치원 원장의 말을 은근히 즐기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우아한 엄마 생활은 아이가 유치원 때까지만 이었다.      


“아이가 생일도 느리고 외동이라 조금 느리죠?”

“네. 느리긴 해요.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동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4월, 1학년 담임과 상담 후 그녀로부터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앞에 앉은 친구와 자리싸움을 했다던가, 다 먹은 우유갑을 구석에 쑤셔놓았다는 등. 선생님 선에서 충분히 타일러도 될 법한 내용 같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엄청나게 큰 일을 저질렀다는 듯 살짝 흥분한 톤으로 수화기 넘어 낱낱이 간증하기 바빴다.      


“어머니, 일 하시죠? 일을 계속해야 하나요?”     


아이가 친구와 티격태격 한 건 사실이지만 엄마가 일을 관둘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 풀어보고자 기사 마감으로 몸부림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들 모임에 나가봤다. 알고 보니 담임의 전화를 받은 엄마들이 여럿 있었다. 그녀 눈에는 남자아이들의 40%가 문제아였고 그 범위 안에 우리 아이가 껴있었다. 심지어 밤 9시 30분에 전화를 받았다는 엄마도 있었다. 아이의 성향에 큰 문제가 있으니 심리 상담을 권유했다고 한다. 담임의 전화를 받고 깊은 고민에 빠져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며칠 뒤 그녀로부터 전혀 다른 내용의 전화를 받았단다.      


“00가 영재성이 보이네요. 영재 테스트를 한번 받아보세요.”     


아이 엄마는 그 전화를 받은 후 우리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담임의 문제라는 것을 파악했다고 고백했다. 여러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린 결론은 세심함이 넘쳐흐르는 담임의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방과 후 직접 학교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어머니, 글쎄 00가 다른 반 친구에게 ‘너를 잡아먹겠다’고 했다네요.”     


그 멘트는 아이가 초등학교 전 문화센터 다닐 때 그곳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어흥, 널 잡아먹겠다. 꿀꺽!” 아이는 그 부분이 인상 깊었던지 나에게도 몇 번 이야기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멘트가 일하던 엄마를 헐레벌떡 달려오게 만든 합리적인 이유가 될까.      


담임의 예민함이 나에게로 스며들었는지 2학기 즈음부터 그녀로부터 걸려온 휴대폰 속 번호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1년을 보냈다.

     



겨울이 지나 새싹이 파릇파릇 돋고 만물이 소생하는 꽃피는 춘삼월이 돌아왔다. 전쟁 같던 1년을 보내고 나니 이맘때 맞이했던 마음의 온도와 다르게 엄중한 분위기로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2학년 담임과 상담 시간이 찾아왔다. 지난해 호된 경험을 했기에 바짝 긴장을 하고는 고개를 최대한 떨구고 교실 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2학년 담임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주었고 아들이 씩씩하게 학교생활 잘하고 있다고 전했다. 1학년 담임과는 결이 다른 2학년 담임의 상담 스타일에 사뭇 놀랐다.      


“우리 아이가 손이 많이 가죠?”

“우리 반 아이들 25명 모두가 손이 많이 가요. 아직은 어리잖아요. 25명 아이들이 성격이 다 달라요. 얘한테는 이렇게 맞춰주고 쟤한테는 또 다르게 맞춰주고, 제가 다 맞춰주면 크게 문제없어요.”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배려에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따뜻함이 묻어나는 한마디에 지난 1년의 고단함이 위로받은 느낌이다.

      

아이 키우는 엄마는 한결같아야 한다는데 아이 담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상한 모습에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또래를 키우는 동네 언니의 토닥거림에 엄마라는 무거운 옷을 세탁기에 넣어 묵은 때 탈탈 털어내고 햇볕에 바짝 말린 후 다시 고쳐 입기로 했다.

       

“자기도 엄마가 처음이고 아들도 초등학생이 처음이잖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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