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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성 Jan 29. 2019

직업으로서의 에디터

프라다를 입고 불볕더위에 닭 머리를 구하는 게 에디터의 일입니다

잡지 에디터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에디터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시스턴트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작문 시험과 객관식, 몇 차례 면접을 거쳐 어시스턴트로 합격할 수 있었다. 나름 힘겹게 어시스턴트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한 일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닭 머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레시피를 비틀어 유머러스하면서도 다소 크레이지한 요리를 소개하는 컬럼에서 '닭머리 젤리'를 만들기로 한 선배의 지령이었다.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닭 머리가 단번에 그려지지 않았던 나는 "네? 닭 목이요?"라고 반문했고 그녀는 "닭 머리, 닭 머리 말이야. 희성씨."라고 말했다. 아아, 소위 말하는 닭 대가리를 뜻하는 건가? 핼러윈 데이를 맞아 기획한 기사를 위해 나는 평생 보지도 못한 닭 머리를 구해야 했다. 닭 목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닭 머리는 대체 어디서 파나요? (작문 시험은 왜 보셨나요?)

하지만 어떻게든 구해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첫 미션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편집장이 비서에게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해리포터 원고를 구해오라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닭 머리 구하기는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고 여러 마트와 시장에 전화를 돌리다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닭 머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가락 시장을 헤매다 생닭 파는 곳을 발견했다. 오오, 그곳엔 닭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장님, 닭 머리 얼마예요?' 같이 간 어시스턴트 2가 물었다. 사장님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답했다. '닭 머리는 안 파는데. 이런 걸 뭣에 써?'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사장님, 학교 숙제 때문에 닭 머리가 정말 필요해서 그런데 몇 개만 파시면 안 되나요?' 사장님은 우리를 흘끔흘끔 쏘아보다 정 그렇다면 사가라고 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이 업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아직 닭 머리를 팔아본 적은 없던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8개에 1000원!’ 찌는 듯한 무더위 속, 검은 비닐봉지에 한데 뒤섞인 닭 머리들이 어찌나 징그럽던지. 나는 그 날 이후로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닭 머리만 구하러 다닌 건 아니다. 촬영장의 단골 소품, 꽃을 구하러 고속터미널에도 자주 간다.


에디터라는 직업에 많은 이들이 호기심을 가진다. 덕분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많다. 잡지 에디터란 직업이 신기하다며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오면, 상대방이 인사치레나 형식적으로 물었겠지 싶어 슬그머니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하지만 진짜 궁금했던 모양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진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거다. '정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나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프라다를 입고 불볕더위에 닭 머리를 구하는 게 에디터의 일입니다'

잡지 에디터는 신제품과 유행의 최전선에 있다.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신제품이 출시되면 앞다투어 초대장을 보내온다. 구찌, 루이비통에서 어떤 컬렉션을 선보이고 까르띠에, 티파니에서는 어떤 주얼리를 선보이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는 어떤 전시를 할 예정인지도! 출근하면 메일함에 쌓인 신제품 정보나 보도자료를 쭉 훑어본 후 그 날 잡힌 론칭 행사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다. 피처 에디터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전시를 한가롭게 볼 수 있다는 것. 보통 전시가 공개되기 하루 전날 미술 담당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간담회를 진행해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서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 투어를 하며 아티스트에게 직접 작품 설명을 들을 기회도 많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궁금했던 점을 직접 질문할 수 있어서 좋다. 일을 하면서 풍족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고 절로 소양을 키울 수 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진이 찍힐 때도 있음 ㅋ...


좋아하는 시간 @아뜰리에 에르메스


국내에도 드디어 콩카페나 쉐이크쉑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는 이미 다녀온 뒤였다. 마찬가지로 정식 오픈 전 미리 가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 좋은 것,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접할 수 있는 일이라니 정말 좋은 것 투성이인걸요?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에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신제품이 많이 나올수록, 가야 할 전시가 많을수록 더 바빠진다. 10월에 이미 12월호를 만들고 있는 형편이니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면 ‘뭐야, 아직 크리스마스가 안된 거야?’하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날에도 무뎌지고 새로운 것을 봐도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이것은 에디터로서 경계해야 할 자세다. 하지만 천성이 호기심 천국이라 그래도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 투성이로 보이는 덕에 지금도 이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잔에 담긴 새로운 레시피의 칵테일을 맛볼 때도 마감의 피로가 조금은 가신다. @핀란드 대사관저


하지만 마감이 닥치면 이 모든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료 먹듯 밥을 먹는 나날이 계속된다. 미식은 포기한 채로. 졸려도 잠을 참고 그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욕구만 충족하며 미친 듯 키보드만 두들겨 댄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에디터에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일은 전체 해야 하는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도 처음에 글을 쓰고 싶어서 잡지사에 왔는데 닭머리부터 구하러 다니지 않았던가. 섭외 전화를 하고 화보 촬영을 위해 스태프를 꾸리고 화보 한 컷 찍는데도 배경은 어떻게 할지, 의상은 어떤 걸 입힐지, 헤어와 메이크업은 어떻게 할지 직접 만나거나 전화통을 붙들고 얘기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셀럽 인터뷰나 촬영이 있을 때는 간식부터 챙겨야 하는 게 에디터의 일이다. 가끔은 불가능해 보이는 소품도 구해야 하고 바닷가에서 촬영을 하다 실수로 옷이 오염돼 물어줬던 일도 있다. 비싼 의상이나 소품을 협찬받은 날에는 신경이 더 날카로워진다. 화보 촬영이 끝나면 사진 셀렉을 하고 추가로 수정할 부분을 몇 번에 걸쳐 요청하고 나면 또 날이 어두워진다. 자, 이제 또 키보드를 두들길 시간이다.

그렇게 새벽녘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다 보면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피곤에 지쳐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을 때도 많다. 그러다가도 인터뷰이의 주옥같은 한 마디의 말, 걸음을 멈추게 한 작품 한 점, 취재를 통해 얻은 소중한 인연들 덕분에 피곤함과 고생 따윈 잊고 또다시 일터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직장, 첫 번째 퇴사... 처음은 모두에게 어렵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내일은 소담한 하루 작가님이 '당신의 빛나는 처음을 응원합니다'라는 주제로 성장담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몇 달 전 인생 첫 번째 퇴사를 감행한 경험을 토대로 따스한 조언을 건넬 것입니다.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7명이 펼쳐내는 성장 스토리. 매일 오전 8시 발행되는(주말 오전 11시) 성장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매거진 구독을 눌러주세요. 한 뼘 더 성장할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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