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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송인 Feb 18. 2021

THE SELF-EFFACING SOLUTION

Neurosis and Human Growth(pp. 214-238)

이미지 출처: https://bit.ly/3s4XIRO


self-expensive 유형과 self-effacing 유형은 외현적 자기애와 내현적 자기애처럼 겉으로는 명확히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듯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양립불가능한 성격 특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정체성의 통합은 잘 유지하되 어느 한 쪽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고 때에 따라 유연하게 그 특성들을 오가는 것이 건강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두 유형은 각기 과대한 자기와 무력한 자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인간 본연이 지닌 복합성을 단순화하고, 결과적으로 개인 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두 잘 기능하지 못하는 양상을 보이기 쉽습니다.

self-effacing 유형을 다루는 9장을 2주 동안 읽으면서 행복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불행은 저마다 다르다고 한 어떤 대문호의 말이 떠오릅니다. self-effacing 유형은 expensive 유형과는 또 다른 괴로움을 지닙니다.

self-effacing을 무엇으로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 사전에 넣어 보니 '표면에 나서지 않는', '겸손한' 정도로 번역되는데 이 장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도식치료에서 말하는 과도한 순종 혹은 굴종과 비슷합니다. 카렌 호나이는 인간의 대처 양식을 크게 moving toward / moving against / moving away from 3가지로 분류했는데 단순하게 각각의 전형적 성격을 떠올려 보면 의존성 / 반사회성 / 분열성 정도이고, 호나이 분류로 self-effacing은 moving toward 양식, 즉 의존성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실 이렇게만 이야기해서는 호나이가 9장에서 self-effacing을 자부심 체계가 작동하는 한 양상으로 설명한 것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애성 성격을 논할 때 DSM에서 그러하듯 외현적 자기애 특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기애성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self-effacing의 전면에는 의존적이고 굴종적인 자기가 우세하지만 이는 self-effacing 역동의 단면일 뿐입니다.

어떤 자부심이나 야망, 공격성도 부인하고 그 어떤 것도 소망하지 않는 일견 금욕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태도는 그 자신을 acceptable하고 lovable하게 만듦으로써 주요 타인으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전혀 내세우지 못하고 누구가의 그림자처럼 살게 되는 발달력에 관해 호나이가 한 문단 정도로 짧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마는, 어찌 됐든 간에 보호와 사랑, 즉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유용했던 self-effacing 대처 양식이 성격으로 굳어져서 성인기에도 지속됩니다. 

하지만 이런 대처 양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어떤 것을 억압하면 그것은 마음 속에서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이들은 자부심이나 야망을 부인하지만 내현적 자기애와 유사하게 무의식적 수준에서는 사실 누구보다 과대한 자부심과 야망을 지닙니다. 일례로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때로는 학대적인 관계에서조차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예를 들어, 가학적인 알코올 중독자 남편이 그래도 본심은 착하다며 감싸는 경우) 그러한 관계 안에서 순교자로서의 자신의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감이 충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누군가 그랬죠. 억압된 공격성도 그렇습니다. 굳이 프로이트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공격성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납니다. 공격성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힘이고 이게 없으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공격성을 탑재하고 태어나게끔 됐는지 모르죠. 

이런 기본적 공격성의 억제는 보호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가 자기 보호 욕구를 이기는 데 기인하는 것이긴 해도, 폴리아나 같은 태도(pollyanna attitude)로 다른 사람의 '선함'에만 몰두하다가 기만이나 착취를 당하기 쉽게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실제적 가학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투사된 공격성이나 적개심이 가학적이지 않은 상대방도 가학적으로 변하게끔 자극하며 그 자신에게 되돌아 올 수 있고요. 

순교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든 투사된 공격성이 가학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감내하든 간에 이것은 self-effacing 유형을 지닌 사람의 학대당하는 느낌(feeling abused) 혹은 괴로움(suffering)을 지속시킵니다(p. 232). 이는 1.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하고(호나이는 순교자의 왕관이라는 비유를 듭니다) 2.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적 공격성을 합리화하고(즉,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괴롭고 네게 화를 내진 않겠지만 너에게 화낼 권리가 있다') 3. 적대적 공격성을 위장(disguise)하는 역할을 합니다(즉, 화를 직접적으로 낼 수 없으니 자신을 더 채찍질하는 식으로 괴로움 표현하며 상대의 죄책감 유발). 

윗 문단의 내용은 이번 챕터의 중요한 논점인데 사실 잘 이해는 안 됩니다. 그리고 self-effacing을 통해 무의식적 자기혐오(self-hate)를 완화시킨다는 내용도 이번 장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인데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겉으로 봤을 때는 스스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며 때로는 피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런 행동들도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사랑과 보호라는 특권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생존 전략의 일환이며, 자기의 양립불가능한 특성이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일환임을 배웁니다. 아울러 표면에 나타나는 한 사람의 행동은 그의 발달력, 그가 현재 처한 상황, 개인 내 심층적인 역동을 통해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당연한(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사실을 되새깁니다.


덧. 2021.02.19 추가

아들러의 인간이해 5장 열등감과 인정 욕구(111쪽)를 보면 self-effacing 유형이 괴로움을 통해 자신을 우월성을 드러내는 부분을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일부 발췌해 옵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그런 비난을 할 수가 없어요. 만일 내가 점심 식사를 제때 차릴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정신없이 바쁘고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이런 방법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녀의 정신적 삶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비교적 나쁘지 않은 방법으로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비난에서 벗어나고 항상 따뜻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하며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중략) 그녀는 항상 상황을 너무 과장되게 생각하면서 수많은 걱정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드려내고 싶어 하는 욕망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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