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팜팜 팜팜파라팜 배경음악이 흐르며 이완 맥그리거가 "추즈 라이프"로 시작하는 나레이션을 읊는 오프닝으로 유명한 영화 <트레인스포팅>을 아실까?
강한 악센트와 반복되는 어구, 왁자지껄 배경음악이 우릴 두들겨 패는 동안 이완 맥그리거는 누군가에 쫓겨 바지가 돌아가도록 달린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동차에 부딪혀 보닛 위를 구른다. 떠올려보라. 그 시절 이완 맥그리거의 파쇄석 같은 눈동자와 하얗게 달뜬 얼굴을.
두 번째 데이트 상대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내겐 인간도 콘텐츠의 일종이라 새 국적의 인간을 만나면 새 나라의 문화를 스터디한다. 나는 이십 대 초반에 끝없이 도피하는 청춘 <트레인스포팅>에 심취했었다. 가능한 선에서 모방해보기도 했다. 도달하지 않을 것, 직면하지 않을 것, 염세적일 것, 외치는 그들이야 말로 진짜 반항이자 청춘이라 생각했다.
왜 사계절 아름다운 나라 한국의 남산 타워 아래 대딩이 북유럽 정키의 병나발 알콜홀릭 기찻길에 심취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영국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됐다. <트레인스포팅>은 영국 영화로 공표되지만 정확히는 스코틀랜드 영화였다. 이완 맥그리거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영화의 촬영지부터 캐릭터들, 억양, 정서 등 모든 문화가 스코틀랜드를 묘사하고 있었다.
십 년도 더 지난 과거에 흠모했던 키워드를 마주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 정확히 고쳐 다시 돌아왔다. 본래 스페인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 날씨는 아일랜드보다 훨씬 난해했다.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잠에서 깨는 것 같지 않았다. 끝없는 꿈속, 끝없는 어지럼증 같았다. 나는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말했다. "와, 너네 나라 진짜 우울하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는데 통창에 속이 비치는 거무스름한 커튼이 달려있었다. 나는 대체 호텔 창문에 왜 이런 커튼을 다느냐고, 한국인의 열에 아홉은 크림색을 고를 거라고, 이 커튼은 물미역인지 팀버튼의 유령 신부 드레스 자락인지 알 수가 없다고 중얼댄다.
상대는 웃으며 자기네 나라에 왜 수많은 정키와 알콜홀릭이 있는지 알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다. 이제야 트레인스포팅을 이해하겠다고.
많은 순간에 나는 서슴없이 자신을 한국인이라 명명하고, 아시아와 연관 지어 농담한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런다. 한국에선 절대 나의 성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케이스로 분리하려 했고, 나를 둘러싼 전체가 나를 포획할까 두려워 달렸다. 매 순간 싸우고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와 스코틀랜드의 어느 카페에서 "그건 네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냐, 너이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순진한 얼굴의 유럽인을 제지하며 말한다. "아냐, 난 존나 한국인이야. 나는 매 순간을 너무 개별적이고 복잡하게 생각함으로써 삶을 단순화해 왔어." 그러고 나니 좀 더 자유로워졌다.
이제야 걸핏하면 냅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날뛰는 나를 주저앉혔다. 나는 지나온 과거를 닮은 얼굴을 가졌고, 결코 내가 자란 환경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며,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에도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될 거란 걸 인정했다.
한국을 떠날 때, 공항버스 창머너 한강을 보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던 밤이 떠올랐다. 15년 만에 이번엔 고향이 아닌 모국을 떠나게 되었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좀처럼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한강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보기만 해도 넘실대듯 온 마음이 자유로웠다. 더 이상 한강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이제 새로운 강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을 떠났다.
아일랜드에는 리피강이 있다. 늘 염원했던 이국적인 유럽의 풍경. 드라마에서 마주치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지만 상실한 것 같았던 그리운 멜랑꼴리.
더블린 중심가는 좁고 나는 자주 그곳을 오간다. 2주 전 억울해 눈물 흘리던 카페에서 친구와 웃으며 통화하기도 한다. 리피강은 천천히 흘러간다.
어느 날 해 질 녘 다리 위에서 리피강이 더는 이국적이거나 생소해서가 아니라 차츰 익숙해져 마음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나는 뒤돌아 리피강을 바라보고 알게 된다. 이곳의 거리와 바람을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나는 이 풍경을 경험했고 더는 가짜 노스탤지어가 아닌 진짜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리움이 찾아올 거라고. 그런 구체적이고 오래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