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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Nov 02. 2024

일기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일기장을 다 채우지는 못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일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쓰고 싶은 친구들만 쓰고 제출하라곤 했었는데, 하루에 2~3명, 어떤 날엔 한 명도 내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아마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였던 것 같은데, 성장속도가 남들보다 곱절 빠른 나 역시도 아주 사적인 일상(?)을 타인, 그것도 선생님과 공유하는 게 싫었다. 그런 내가 일기를 한 달에 한번 정도 써서 제출하는 날이 있었는데, 반에 남자아이들이 놀리거나, 친구들과 어떤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다. 선생님께 하소연, 다른 말로 고자질을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통로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반 남자애 중 유독 살에 대해 놀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참고 참다가 터져버린 나는  그 남자아이의 만행과 저주를 씩씩거리면서 작은 일기장에 다 퍼부었던 일이다.


나이는 먹어가는 시점에서 어른들은 '30대가 되면 돈은 있어도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셨다. 물론 나는 둘 다 없지만 돈이야 그래도 어찌어찌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 흐른다. 여기에 기하급수적으로 소진되는 나의 에너지는 작년 이맘때만큼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을 좁혀버렸다.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돌보고 괜찮은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시간들을 꼭 가져야 하는 나이지만, 바쁘고 정신없단 이유로 그저 하루하루 살기 급급했더니 '아 이러다가 좀 큰일 날 것 같다.'라는 직감에 맞닥뜨렸다. 육체의 피로보다 나의 정신건강의 안녕이 너무도 걱정됐다. 하루하루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갖은 부담과 스트레스들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계신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달리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흑염소를 지어주겠다, 한약을 지어주겠다 하신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일기를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예쁜 노트를 샀다. 마치 2000년대 일본 하이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파란색 노트. 여기에 실타래처럼 얽힌 나의 잡생각들과 고민, 일에 대한 부담들을 한숨에 쭉 나열했다.  남들에게는 말 못 할 나만의 사정, 일에 대한 마음 가짐, 이번 달 긴축재정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못한 카드 내역서를 마주하고 시작하는 반성 등등 주제도, 분량도 정해진 건 없다. 그렇게 두서없이 감정들을 막 써내려 가다 보면, 그 행위 자체만으로 부담이 덜어지는 효과가 생기고, 조금 더 반복적으로 써 내려가면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가 된다. 고민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가 되고, 힘을 줄 곳과 안 줘도 되는 부분들에 대한 구별 감각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일기는 간헐적으로 찾게 되는 나의 숨통과도 같은 존재다.


 2024년을 단 두 달 정도 남겨놓고, 다음 달엔 꼭 일기를 꾸준히 쓰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내 인생 데이터상, 얇은 일기장을 사더라도 절대 다 채우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힘들고 생각의 뭉텅이들이 나를 잠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나를 보호해 주고 고민들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장치, 일기장은 나의 생필품 중 하나다.


다음 주 교보문고에 가서 내년 일기장 후보들로 어떤 게 있는지 동향을 좀 파악하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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