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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Apr 01. 2024

임용고시 준비 중인데 미드로 밤을 새 버렸다

그런데 최종 합격을 했습니다

 임용고시 1, 2, 3차를 차례대로 거쳐왔지만 최종 합격자 발표날 0.33점 차이로 불합격한 후, 또다시 1년의 지난한 고시생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임용고시를 처음 준비할 때의 마음만큼 단단하진 않더군요. 힘이 빠졌습니다. 아무도 꽃길을 보장해주지 않는데도 자갈과 흙으로 거친 길을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처한 현실이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제 다리를 억지로 끌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시험공부를 하다 보니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럼프 말이죠.




강력한 슬럼프가

찾아오다


 '이렇게 날 좋은 날 독서실에서 뭐 하는 짓일까'

 '학원이나 갈까'

 '하 정말 못 해 먹겠다. 너무 하기 싫어 미치겠어'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나는 무엇인가' 등의 철학적인 질문까지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더군요. 정말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이유가 있겠지. 도대체 어떤 소명으로 태어난 것일까. 아무 쓸모없진 않을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겠지' 하면서요.


 '그 이유가 내가 공교육에 이바지하며 좀 더 힘든 환경에 있는 학생들에게 꿈과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오해하고 있나'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데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거 아닌가'


 오만가지 잡생각과 '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돌아다니느라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독서실에 앉아 있어도 작년 최종에서 탈락한 억울함, 제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의심, 대학 졸업하는 해에 치른 첫 임용고시, 최종에서 탈락한 두 번째 임용고시로 이어온 2년간의 수험생활에서 오는 피로감과 지루함 등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슬럼프가 쉽게 물러서지 않더군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답니다. 3, 4월 정도부터 6, 7월까지 약 4개월 동안을 방황한 것 같아요. 하루 공부시간이 3시간은 될까요? 그렇게 잡히지 않는 공부를 어기적 어기적 하다 친구와 놀러 나가기도 하고, TV 시청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휴대폰으로 미드를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안에서 일어난 번뇌를 그렇게 회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네 명의 너드 과학자의 우정, 연애, 인생을 그린 코믹 시트콤이다. 시즌 12까지 방영되었으며 2019년 5월 완결되었다. (출처: Sonja Flemming / CBS)


 그때 빠진 미드가 <빅뱅이론>이었는데요. 너무 재미있어서 독서실에서 보다가 집에 돌아와서 방문을 꼭 닫고 잠도 잊은 채 몇 시즌을 갈아치우며 봤었답니다. 여성을 사귀어본 적이 거의 없는 네 명의 과학도들이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자신의 전공 분야에 있어서 내보이는 당당함과 자신감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멋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시트콤 안에서는 그런 멋짐도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곤 합니다.


 당시 방영되었던 시즌까지 다 시청 후 끝이 아니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배우들의 인터뷰, 예전 작품들, 배우들의 플래시몹 영상, Comicon에 참여한 빅뱅이론 팬들의 영상까지.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파는 성향 덕에 슬럼프를 물리칠레야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뭐, 빅뱅이론뿐이겠습니까. 당시 예능,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시간을 영상에 내맡긴 채 공부를 놓은 기간이었습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말이죠.


 정말 심했을 땐, 독서실도 가지 않고 집에서 TV만 볼 때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출근하실 때 TV를 보고 있는 저에게 나간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공부 좀 해라 “는 말씀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요. 부모님께 공부도 안 하고 영상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그런 저를 보고 타박하고 눈치 주셨다면 제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던 저는 임용 1차 시험이 4개월 정도 남았을 때쯤 곰곰이 제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직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교직만을 위해 달려왔고, 다른 분야에 대한 재능이나 적성은 찾아볼 생각도, 찾은 적도 없었습니다. 교직은 마치 저에게 천직과도 같았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더 도전해 보자’

 ‘이번에도 안되면 깔끔하게 임용고시 포기하자. 학원이든 아얘 다른 길이든 찾아보자’


 슬럼프로 어영부영 보냈던 시간들을 뒤로하니 이제 해야 할 것들만 눈앞에 남아 있었습니다. 머릿속을 헤집던 수많은 잡생각과 고민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    


 정말 다행히도 그 해에 임용고시를 합격했습니다. 긴 시간 슬럼프에 빠져 공부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빅뱅이론 때문에 불타오른 통합적 동기

 제 인생 미드를 뽑으라면 단연코 <빅뱅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드, 영드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만, <빅뱅이론>이 저에게 베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부만 할 줄 아는 너드남들이 코믹하게 그려지는 시트콤. 미드를 보면서 그렇게 웃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너드남들이 연애와 우정,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지만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에서 각자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가끔은 너무 지나치지만 똑똑해 보일 때도 있답니다.   


 <빅뱅이론>에 너무 빠진 나머지 미국 Comicon에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맛집이나 핫한 카페 등 줄 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아무리 긴 줄을 서더라도 배우들을 직접 보고 짧지만 대화도 하고 싶었습니다.


 영어 등 외국어를 잘하기 위한 동기로 통합적 동기라는 것이 있는데요.

 The integrative side described learners who wished to integrate themselves into the culture of the second language group and become involved in social interchange in that group. (출처: <Principles of Language Learning and Teaching> by H. Douglas Brown, chapter 6. Personality Factors, 170쪽)

 <빅뱅이론>을 보며 통합적 동기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영미권 문화에 녹아들고 싶었고, 그 문화권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진하게 일었으니까요. 그렇게 <빅뱅이론>을 보면서 배우들의 대사와 제스처를 똑같이 따라 하고 보고 또 봤습니다.


 역설적이게 <빅뱅이론>을 보며 슬럼프를 보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점점 더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싶어 졌습니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 졌고, 그 좋아하는 영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살고 싶다는 마음, 가끔 영미권 문화를 여행, 책 등을 통해 경험하며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영어 학습 동기를 이끌어 줘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2. 단권화와 새는 항아리 메꾸기

 대학 졸업과 동시에 치른 첫 임용시험과 최종에서 소수점 차로 탈락한 두 번째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정리해 둔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즉, 시험을 치기 직전까지 이 책 한 권만 보면 합격할 수 있도록 단권화를 해둔 겁니다. 슬럼프 이후 남은 약 4개월간의 기간 동안 단권화 자료만 수십 번, 수백 번을 보고 외웠습니다.


 또, 시험이란 무릇 밑 빠진 독으로부터 새어나가는 부분을 막는 것이라 생각해 왔기에 마인드맵 학습 전략을 활용했습니다. 오늘 목표한 부분을 공부한 후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공부한 내용을 최대한 상세하게 떠올려(더이상 적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적어나갔습니다. 그 후 다시 책을 펼쳐 아얘 떠올리지 못한 개념과 마인드맵에 적었지만 다르게 표현된 부분들을 색깔펜으로 다시 마인드맵 위에 보충,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인드맵을 보며 외우고, 집에 돌아가 자기 전에도 다시 마인드맵 속 내용을 반복해서 암기했습니다.


 마인드맵을 통한 공부는 특히 서답 및 서술형 문제를 대비하기에 좋았습니다. 직접 흰 백지 위에 공부한 내용을 가지를 뻗어 쓰다 보면 핵심 개념과 이론의 키워드를 살짝 다르게 외우고 있을 때가 종종 있고, 아얘 떠올리지 못한 내용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만약 이 부분이 서술형 문제로 출제되었다면 다른 개념어나 아얘 작성하지 못한 부분들로 제 답안이 작성되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죠. 그러니까 마인드맵으로 밑 빠진 독을 계속 체크하고 막아나가는 작업을 한 겁니다.


 시험은 문제가 요구한 내용에 적합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정확하게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것이니 마인드맵을 통한 공부방법이 딱 맞았습니다. 만약 객관식 시험만 본다면 마인드맵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객관식 문제 안에 이미 답이 주어져 있고, 그걸 잘 골라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죠.

  


 3.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믿음

 임용시험 준비 기간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더 사무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그렇게 해이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뻔히 보시면서도 눈치 한 번, 잔소리 한 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그저 저를 믿으셨다고,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욱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자식이 어떤 모습을 보여도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믿음을 보여주시는 것. 결국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아주 큰 사랑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만약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자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개월을 딴 짓만 하는 것을 본다면 부모님처럼 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니 쉽게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시험 합격만큼 중요한 것은 슬럼프로 이름 지어졌지만 그동안 지친 딸의 휴식과 마음의 안위를 생각하신 게 아닐까요.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께서 몇 번이고 지원해 줄 테니 될 때까지 해보라고 담백하게 하신 말씀. 이번에 떨어지면 더 이상 임용고시를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저를 끝까지 믿어주시는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든든했습니다. 가슴이 묵직한 무언가로 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긴 슬럼프 기간을 보냈음에도 그해 합격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 내어주신 버팀목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묵묵히 고요하게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마지막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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