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횟집 수족관 앞을 지나갈 때면 열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수산시장에 갔던 기억이 가끔씩 떠오르곤 했다. 얕게 첨벙이는 시멘트 바닥으로 물이 흘러 넘치는 수족관에 광어들이 빼곡히 들어차 서로에게 몸을 포개어 쌓여있었다. 어릴 때 나는 횟집 수족관을 볼 때면 물고기들이 마음껏 헤엄치지 못해 답답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엄마, 물고기들 불쌍해.”
“그치... 근데 그렇게 하나하나 다 생각하면 어떻게 사니. 원래 다 그런거야.”
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원래 다 그런거야’를 먹고 자랐다. 편식하지 않고, 부지런히 받아먹었다. ‘물고기가 불쌍하다’라고 말하면 ‘어른스럽지 못하고,’ ‘불필요하게 감상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배워갔다. 그렇게 세상의 규칙을 학습하며 모나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세상은 다수의 믿음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매일같이 확인시켜주는 안락한 곳이었다. 비좁은 수족관에서 광어들이 느낄 고통보다는 광어가 싱싱해서 맛있겠다는 다수의 욕구에 공감하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원래 다 그런거야’로 감춰둔 불편함은 운동화 속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돌멩이 같았다. 걷다가 멈춰 신발을 벗기는 번거로우니 무시하고 지내다가도, 불현듯 발바닥의 예민한 곳에 밟힐 때면 내 걸음은 한없이 더뎌졌다. 스물이 훌쩍 지나서도 나는 가끔 횟집 수족관을 보며 저 광어들이 바다에 있었을 땐 어떻게 헤엄쳤을지가 궁금해지곤 했다. 그 마음을 도무지 어떻게 설명할 지 몰라 매번 우물쭈물 지나쳤다. 그리고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밥상에서 마주했다.
우리는 종종 강렬하게 스친 감정과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마주칠 때가 있다. 그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어디서 기원하는지, 그 경험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세밀한 언어로 이름 붙일 때, 그 과거의 순간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포개어진다. 비거니즘은 내게 설명할 수 없던 감정과 경험에 이름 붙일 수 있는 언어를 들여오는 과정이었다. 20년이 흘러서야 어릴 적 수산시장에서의 생각이 동물권에 대한 감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거니즘을 만나며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운동화 속 돌멩이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원래 다 그런거야’는 ‘원래 다 그런 건 없어’가 되어갔다. 안전하고 견고했던 내 세계가 와르르 무너졌다. 내게 무해했던 평범한 일상들이 돌연 뾰족한 바늘이 되어 나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식당 간판의 웃고 있는 소 그림,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정육점, 친구의 인스타그램 속 삼겹살 사진처럼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걷던 골목을 다시 보니, 이젠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언어로 내 세계를 다시 쌓아올리는 일은 종종, 아니 사실은 자주, 힘에 부쳤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록 나는 더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꼈다. ‘원래 다 그런거야’로 도려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자, 원한 적 없던 것을 원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 없는 밥상으로 허기를 채우고 싶어졌고, 싱싱한 채소를 씻고 만져보며 내가 딛고 사는 이 땅과 내가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나의 삶은 더 많은 욕구와 감각으로 풍족해졌다.
내가 비거니즘 선언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내게 비거니즘은 ‘너처럼 자신에게 엄격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비거니즘은 엄격한 규율이 아니라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끼고 관대한 시선을 갖는 방법이었다. 비거니즘이라는 언어를 손에 쥐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보도록 만드는 세상의 규범을 빗겨나가며 무한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상상력을 할애하는 법과,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비거니즘이란 세계로 횡단해가는 모든 여정은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길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 친구, 애인, 동료, 그리고 교실의 아이들. 그들에게 나를 설명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과 고기를 먹지 않는 일로 갈등을 겪을 때, 나는 비거니즘 유튜브와 책을 숱하게 보았어도 그들처럼 논리정연하고 똑똑하게 말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숨이 찼고, 얼굴은 빨개졌고, 결말은 늘 어딘가 찝찝했고, 때로는 침묵했고, 하고 싶었던 말은 불편한 대화가 끝나고서야 더디게 떠올랐다.
그 비틀거림 역시 실천의 일부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준 이들의 부드러움뿐만 아니라, 나의 실천을 의심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정다운 날카로움 덕분에 난 실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비거니즘으로의 여정 안에서 겪은 갈등과 고민은 내 실천의 위기가 아니라 더 지속가능한 실천을 고민하도록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위태롭고 황홀한 경험을 나누고 싶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는 “비건 앨라이” 개념을 제안한다. 비건 앨라이는 비건을 실천하지 않아도, 비거니즘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연대이다. 모든 사람이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세상은 아직 우리에게 너무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비건 혹은 논비건’이라는 양자택일적 분류가 아니라, ‘비건 그리고 비건 앨라이’로 구성된 세상은 조금 더 상상하기 쉽다. 그건 내가 비거니즘을 시작하고나서부터 내 주변에 만들어진 세상의 자그마한 일부와 아주 닮았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수족관 앞에서 던졌던, 나의 유예된 질문을 다시 방문하고 응답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실천하고 싶지만 망설여지는, 혹은 주변에 실천하는 누군가를 이해해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살포시 스며들길 바란다. 이 책을 닫을 때면 비건이 아니더라도, 비건 앨라이부터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그마하게 피어오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