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에 희망이 없다고요?
"무망감이라고 합니다."
진로를 상담했는데 상담선생님은 낯선 단어로 답변했다.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희망이 '없을 무'라니. 내 스스로 내게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니.
희망을 찾아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이건 아니고 싶다.'하고 잠시 몸부림쳤다.
내가 상담하고 싶었던 건 그저 딱히 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백수생활이 권태롭고 사회생활도 하고 싶긴 해서 진로를 고민했는데 어떤 선택지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 가지 진로 선택지
1. 업계 복귀
(장점) 경력직. 현재 경제적 효율이 가장 높은 방안
(단점) 번아웃과 재회 가능성 높음 & 수명 짧음
2. 전문직
(장점) 경력 단절 가능성이 낮고 수명이 길다
(단점) 최소 2-3년의 수험기간 동안 가능성에 베팅
3. 새로운 진로 : 관심사를 반영한 직업 모색
(장점) 덕업일치를 꿈꿔볼 수 있음
(단점) 석박사 해서 불혹에 신입으로 진입하면 연봉 삼천만원... 뀨
모든 선택지는 노력을 거대하게 요구한다. 취업이라는 과제 앞에 의심 없이 달려들었던 20대의 열정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지라 노력이라는 필수 연료를 꾸준히 투입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또한 나는 사회생활 10년을 통해 이미 노력의 결과물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학습했다. 노력이 늘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개인과 사회의 한계는 존재하며, 내 앞을 곧잘 막아선다는 것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운칠기삼'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진리임을 배웠다.
그래서 선택지들의 성공 가능성 역시 미약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느껴졌다. 더불어 한단계 성공해도 그 이후에 노력하고 노력할 것들이 첩첩산중 있을 것이 분명했다. 대학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승진을 하고 그리고 또또또! 해야할 것들. 이미 경험해 본 레퍼토리 아닌가?
미래의 불확실한 것을 위해서 현재의 거대한 노력을 투입한다? 이미 소진되어 얼마 존재하지도 않는 나의 에너지와 젊음과 시간을? 그렇다면 조금 부족하지만, 조금 권태롭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희망] 무망감 이론 (Hopelessness Theory)
- 김향숙 교수
(중략) 개인은 어떤 경우에 희망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일까? 무망감 이론(hopelessness theory)은 학습된 무력감 이론(learned helplessness theory; Seligman & Maier, 1967)에서 비롯된다.
즉 통제할 수 없는 부정적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개인은 해당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우울에 취약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Abramson과 동료들 (1978)은 부정적 생활 사건 자체의 영향에 더하여 개인이 그 사건의 원인을 해석하는 방식, 즉 귀인(causal attribution)의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예컨대, 친밀한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그러한 갈등의 원인이 나의 대인관계 능력의 부족에 있고(내부적 귀인), 이는 특정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전반, 나아가 업무나 학업과 같은 삶의 전체적인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반적 귀인), 이렇듯 부족한 대인관계 능력은 앞으로 변하거나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믿을수록(안정적 귀인), 무망감, 즉 희망이 없다는 인식이 심화되고 우울증과 자살에 취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위 정리에 따르면 무망감은,
1) 외부적 요인 : 통제할 수 없는 부정적 환경에 대한 반복적 노출,
2) 개인이 사건의 원인을 해석하는 방식 :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고, 그것을 삶의 전반의 문제로 확장,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믿을 때 심화된다고 한다.
회사에 있을 때 나는 다채로운 좌절을 경험했다. 회사를 다녀보면 공부가 제일 쉽다는 어른들의 말을 얼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부는 혼자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반면 회사 생활은 종합적 운칠기삼의 세계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거의 없다. 누구와 팀이 되느냐, 타이밍, 프로젝트 등 대부분은 운으로 결정되므로 통제 불가능한 변수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받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드센 여자로 찍히지 않을 수 있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노골적인 평가에 의연하게 장점을 드러내고 세련되게 단점을 감추며 응수해야 한다. 사회의 불합리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이 또한 피할 수도 개인의 노력으로 개선시킬 수도 없는 부분이다.
남 탓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자괴감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온갖 방식으로 나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능력이 부족한 탓, 뭣도 없는 게 정의롭고 싶은 탓, 공정해주길 바라는 탓, 순진한 탓, 대범하지 못한 탓 등.. 그 부분을 바꾸려 노력해 보고 아닌 척도 해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가진 계란이 모두 소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위에 많이 던졌는데 바위가 금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에 남은 계란은 없었다.
퇴사 후 1년, 나는 번아웃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해 진로 상담을 시작했다. 무척 권태로웠고 진로 판단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였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은 내게 '무망감'이란 뜻밖의 과제를 던져줬다. 진전이 없는 것 같아 조금 답답했다.
그래도 계란 대신 내게 남겨진 '무망감'이란 감정을 잠시 바라봐 주기로 했다. 상담을 통해 얻고자 했던 진로 판단에 대한 조언은 어쩌면 무망감을 이해함으로서 해소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며 마르크스의 말을 되뇌었다.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