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는 첫 3일을 울었고, 그 다음 2일을 쭈뼛대다가, 6일째부터는 어린이집에 언제가냐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 3일은 내가 너무 무리했나, 어린 아이를 너무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적지않게 몸부림쳤다. 저녁마다 봄이를 재우고 남편과 식탁에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다시 취소를 해야 할까, 집에서 5시간씩 뽀로로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역시 엄마와 지내는 게 좋을까 하는 조금 이상한 방향의 토론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5일이 지나고 주말이 왔다. 아침에 일어난 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름 충격적이었다.
"엄마, 어린이집 언제 가?"
봄이는 주말을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집에 오면 심심해서 견디지 못하기 시작했다. 봄이의 적응을 위해 애써주시는 선생님들 덕에 봄이는 데릴러 오는 엄마를 보면 도망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음, 그래. 다행이야. 아주 다행이야. 사실 죄책감을 많이 덜었다. 섭섭한 마음이 정말 1도 들지 않았다는 건 비밀이다. 비밀인데...
아무튼 봄이가 그렇게 어린이집에 가고 난 뒤에 나에게는 아침 4시간이라는 귀한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이 시간은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못 다한 집안일을 하고, 재택 중인 남편의 점심을 차리고, 함께 점심을 먹고 나면 끝나는 아주 허무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다. 눈을 돌리고 보면 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집에서 놀고 있는 '방탕한 주부'라는 다섯 글자가 내 마음속을 괴롭혔다. 봄이가 가고 나면 나도 모르게 거실 쇼파에 앉아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데, 봄이가 옆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그 멍때리기가 지금은 한없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며 괜히 마음이 찔리기 시작했다. 뭔가 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을 가면서 계획에 없던 지출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간간히 원고를 보내고 이것저것 하면서 용돈을 벌기는 하지만, 정말 용돈수준에 그치는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집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조금 버거운 외벌이 가족이었다.
봄이를 보내고 나서 남은 시간을 쪼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꽤 장시간 사회생활을 안 한 나는 감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이력서를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나를 어필할 수 있는지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할 수 있는 걸 다 썼다. 그래도 봄이를 보는 와중에 틈틈이 새벽시간에, 낮잠시간에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든 경력을 채우려 했던 시간들이 있음을 믿으며 이곳 저곳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30을 넘은 아줌마를 채용하려는 곳은 없었다. 많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봄이를 봤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 여성경력단절녀를 요하는 곳이나, 파트타임으로 글을 쓰는 곳 등을 위주로 집어 넣었다. 나름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나처럼 경력이 단절되고 아이를 보면서 일을 할 곳을 찾는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것을 간과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나를 찾는 이들은 아직까지 없다.
'구직 중'이라는 구간은 인생에 있어서 고달픈 순간 중 세 손가락에 꼽는 순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 당하는 기간, 순간도 아니다. 꽤 오랜 시간을 평가당하고 점수매김 당해야 한다. 자존감이 한 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나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 잡는 우울의 끝을 달리는 시간이다. 20대에 한참 고생한 뒤로 이런 순간은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또 오고야 말았다. 또.
남편은 뭐가 그렇게 급하냐고 나를 채근했다. 일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스스로 동굴로 들어가냐며 한 소리를 했다. 처음엔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집에서 놀고 있는 여자라는 인식을 주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이력서 넣기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나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사실은 가장 도망치고 싶지만, 또 맞서고 싶었던 이중적인 마음이 계속해서 다투고 있었다. 봄이를 키우면서 희미해진 나의 존재를 나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나보다.
이런 마음이 지속되면 의외로 혼자서 견디기가 버거워진다. 나는 마음을 비우려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글자가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글도 써지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몇 차례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말을 하면 할 수록 내 마음이 더 공허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이력서를 쓰고 집어 넣었다. 또 거절을 당한다. 또 공허해지고 책은 안 읽히고 입으로 떠들다 마음이 비고의 반복이었다.
이 순간을 견디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국 나는 이곳으로 와서 속에 있는 말을 또 주저리 주저리 뱉어내고야 만다.
남편이 주1회 출근하는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없으니 점심을 할 힘도, 기운도 여력도 없었다. 굳이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 점심부터 굶은 상태였다. 뭐라도 먹지 않으면 곧 올 봄이를 돌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을 하다 김밥을 사러 나갔다. 내 주제에 돈을 주고 밥을 사먹다니. 집에 있는 냉동밥에 김치나 먹을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자존감은 이미 저 지구 지각을 뚫고 멘틀에 처박혀 있었다. 꾸깃꾸깃 가끔씩 잔돈을 모아뒀던 현금을 모았다. 이 금액을 넘기는 밥은 먹지 않겠다며 스스로에게 결심을 하고 바깥을 나섰다.
웬걸, 아파트에 장이 들어섰다. 눈 돌아가게 많은 걸 팔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앞만 보고 김밥집을 향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메뉴들이 내 눈을 미친듯이 홀렸지만, 눈 돌리지 않고 잘 버티고 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보고야 말았다. 스시집.. 스시집.. .스시집....
스시를 보는 순간 안 고프던 배에서 갑자기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금액은 만 원이었다. 만원. 나는 삼천원만 들고 왔는데. 참치김밥도 사치라고 생각하고 일반 김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만원짜리 스시라니. 안 될 일이다, 안 될 일이다, 머리속에서 계속 나에게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 만원이라니! 점심에 만원을 쓰다니! 가지마!! 멈추라고!!!
내 머리와는 별개로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 입에 뇌가 따로 달려있나. 나는 이미 연어초밥을 주문하고 있었다. 카드결제도 아니고 계좌이체씩이나 하는 수고로움을 다하여 나는 결국 만원이나 하는 연어초밥을 주문하고 말았다. 원래 지출하려던 금액의 세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원래도 먹는 데에 돈을 많이 안 쓰는 편이다. 작정하고 먹으러 가면야 미친듯이 먹어대지만, 이렇게 각오 없이 충동적으로 먹는 걸 잘 하는 편은 아니다. 대충 김치에 밥으로 때우는 일이 빈번하고, 그마저도 잘 먹지 않는다. 집에서 빵쪼가리나 만들어서 대충 먹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내가 먹는 데 돈을 쓰는게 그렇게 아깝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44~45키로그램의 몸무게를 자랑했는데, 그게 다 배고픔을 귀찮음이 이겨서 나온 결과였다. 그 정도로 나는 먹는 데 참 진심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어초밥을 시키고 있었다. 계좌이체 비밀번호를 누르고 난 뒤 안돼! 안돼!를 외치던 머리는 멘트를 바꿨다. 괜찮아.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잖아. 이정도는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구. 자격이 있어. 연어먹고 힘내서 이력서를 더 열심히 넣자! 좋아! 그래! 그런거야! 힘을 내! 망고야 힘을 내라구! 내가 생각해도 정신병자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외쳤다.
"아주머니 락교 많이요!"
두근대는 마음으로 달려와 뚜껑을 열었다. 요즘은 트레이더스에서 파는 초밥도 꽤 수준급인데다가, 우리집이 자주 먹는 초밥도 7~8000원 수준이지만 두툼한 연어를 자주 먹었던 터라 마음이 정말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거렸다. 하앗! 두근! 두근! 너무 떨리고 설레고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두근두근두근두ㄱ...
아주머니 락교 많이라고 제가 크게 외쳤는데 그 랬는데 왜 왜 때문에 락교 구석에 고꾸라져 있냐구욧.. 연어가 왜 종잇장이냐구욧... 우리집 이면지보다 얇은 거 사실이냐구욧..ㅠㅠ
....
내가 보이는 게 와사비 맞나요. 왜 연어 뒤에 와사비가 눈에 비치는거져. 연어는 주황색인데 왜때문에 와사비 보이는 거냐구욧..!?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생각한 그런 연어가 아니었다. 왜 얇디 얇은 종잇장같은 연어만 덩그러니 있는 건지. 젓가락을 쥐어 들고 5초간 묵념을 했다.
나의 만원. 안녕. 고마웠어. 그렇게 내 계좌를 스쳐 지나간 그 만원. 안녕...
솔직한 마음은 그랬다.
너 같은건 이런 초밥도 과분하다! 만원을 냈지만 어디 그런 주제에 만원이나 주고 초밥을 먹으려 드냐, 집에서 냉동밥에 김치나 먹어라! 김치도 비싸니 단무지나 먹어라! 뭔 단무지냐 간장에 밥이나 비벼 먹어라! 맛간장도 사치다 조선간장에 한스푼이면 충분하다! 뭔 간장이냐 그냥 맨밥이나 먹어라! 니 입으로 들어가는 쌀이 아깝다 그냥 물이나 마셔라! 물 부족 국가에서 뭔 물이냐! 그냥 잠이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