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30
커튼을 젖히니 그제야 햇빛이 온 방 안을 밝힌다. 이 나라는 백야 때문인지 대부분 숙소 침실에는 빛을 차단할 수 있는 암막 커튼이 설치되어 있다. 알람 설정 없이 커튼을 빈틈없이 치고 자다가는 늦잠 자기 십상이겠다. 평소 아침잠 많은 아내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 곳 아르나르스타피에서 케플라비크 공항까지는 3시간이 소요된다. 오후 4시 1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은 이 아침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 마지막 날의 분주함과 아쉬움은 다행히 아내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게 했다. 조식을 먹기 위해 서둘러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너무 부지런했는지 레스토랑에 아직 우리뿐이다. 덕분에 어제저녁 식사 때는 사람이 많아 아쉽게도 앉지 못했던 시원하게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몇 시간 전, 저 밖에서 오로라를 보았었다. 어젯밤 극광의 향연이 수놓았던 하늘에는 지금 얕은 구름이 가득하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오전 계획을 세워본다. 차를 반납하고 비행기 수속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사진을 찍을 시간까지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실패했던 표지 사진 말이다. 분주한 일정 속에 괜한 사진 타령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아내와 나는 그 사진을 꼭 찍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 책 중에 종이 낱장만으로 제책 된 것이 존재하는가. 그것을 대표하는 제목과 함께 주제를 제시하는 이미지로 반드시 덮여야 한다. 영상 클립의 섬네일이나 전시회의 안내 포스터의 역할처럼 말이다. 그래야 기억 속에 이 방대한 이미지와 복잡한 에피소드들을 한 이야기로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중에 꺼내고 싶을 때 손을 대기 쉽도록, 안의 내용들을 기억하는데 어렵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안을 좋은 콘텐츠로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이를 하나로 정리하는 표지 작업도 그만큼 어렵고 중대한 작업일 것이다. 이를 위해 사전에 계획도 해야 하고 짐도 많이 꾸려야 한다. 직접 연출하고 촬영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까지도 훗날 재밌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름 괜찮았던 셀프 촬영의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의 의미와 준비 과정을 잘 담아보기 위해 꽤 오랫동안 웨딩 스냅 촬영을 진행했다. 로케이션 디렉팅과 소품과 의상 준비,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모두 발품 팔아 직접 준비했다. 이런 가내 수공업이 처음이다 보니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들 찍어준다고 깝죽대고 다닐 때는 쉽게 훈수 두던 연출들을 내가 모델이 되어 직접 포즈를 취하려고 하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찍은 사진들 중에서도 눈 감은 사진들이 다반사였고 그 새 헝클어진 머리 모양은 다 찍고 나서 알게 되는 식이었다. 아내도 수줍음이 많은 터라 매 컷마다 표정과 포즈가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고생의 결과, 좋은 사진들이 많이 ‘얻어’ 걸렸다. 사진의 기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당시 어설프고 허술한 우리의 모습까지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생의 정도가 높을수록 이야기가 풍성하고, 당시 느꼈던 감정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아이슬란드에서도 이렇게 표지 사진 타령을 부릴 수밖에. 과연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정리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와 배경이 있을까. 창 밖과 시계를 번갈아보며 레이캬비크 방향 1번 도로를 탄다. 애가 탄다.
인간은 선택적 지각의 오류(selective perception)를 범한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선택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람들의 편협적인 경향을 일침할 때 거론되는 유명한 이론이다. 하지만 이를 삐뚤게 생각하면 “보고 싶은 것은 결국 보인다”는 인간의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이름하여 선택적 지각 능력. 오늘 사진을 남길 만한 멋진 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나도 모르게 발동시킨 이 능력 때문에 마침내 우리가 찾던 좋은 장소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길 건너 산 끝이 둥근 산등성이 사이로는 저 멀리 눈으로 덮인 산도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이끼로 덮인 널따란 들판이 보인다. 낮은 채도의 대자연 속에 군데군데 생동감이 느껴지는 총천연의 작은 식물들이 수평선 끝까지 피어있다. 아이슬란드 특유의 쾌쾌함이 물씬 느껴진다. 더구나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인 듯하다. 쑥스러움 많은 커플의 셀프 촬영에서는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옷을 갈아입는다. 아내의 드레스는 웨딩 스냅사진 찍을 때 입던 옷이고, 내 옷은 장인, 장모님께서 결혼 선물로 사주신 정장이다. 가진 옷들 중에 결혼의 의미를 잘 담을 수 있는 옷이라 생각했다. 2주간 자동차에 잘 걸어뒀던 이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들판에서 마음껏 사진 찍는 우리를 보려고 도로 위에 잠시 멈추는 차들이 보인다. 외딴곳에서 예술의 혼을 불태우고 있는 이 아시아인 커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작품의 성공은 보는 이(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원작자의 의도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촬영한 사진 한 컷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이 사진을 고르고 싶다. 오늘 촬영을 모두 마치고 도로 위에서 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짐으로 가득 찬 자동차, 나의 돌아간 넥타이와 돌부리에 뒤꿈치 살갗이 까져서 접은 오른쪽 다리 바지 밑단, 고정시켰던 옷핀이 구부러져 매무새가 흐트러진 아내의 드레스. 이 한 컷에 우리의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한 신혼여행 느낌이 잘 전달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 꼭 잡고 행복해하는 우리 표정으로 말이다. 이렇게 아이슬란드를 떠나는 날 우리 이야기의 표지 사진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