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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y 04. 2022

퇴사했습니다

 2022년 4월 29일은 내가 첫 직장에 출근한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출근길. 새로울 것도 색다를 것도 없는 출근길이었다. 1호선은 언제나처럼 붐볐고, 지하철 특유의 냄새가 났으며, 사람들은 무표정했다. 다른 지하철 호선에 비해 유난히 회색빛이 도는 것처럼 보였던 1호선, 그리고 서울의 심장과도 같은 시청역. 1호선 계단을 올라와 시청역 밖으로 나오면 그제야 세상은 총천연색이 되는 것 같았다. 아침 햇살을 쬐는 순간 땅 밖으로 나온 두더지마냥 눈이 부셨다. 이 출근길을 십수 년 다녔다. 내가 다녔던 어떤 학교나 학원도, 내가 살았던 어떤 집도, 이렇게 오랫동안 머문 곳이 없다. 한때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보다 길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회사와 나와의 관계도 꽤나 운명적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 운명을 박차고 나올 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쉽지 않은지 물었다. 처음에는 무어라 답을 하기 어려웠다. 이 조직에 내가 쏟은 피와 땀과 노력이 얼마인데. 퇴사 직전, 가고 싶던 부서에서 제의가 들어왔었다. 아마도 남아있다면 원하던 부서에 갈 수 있는 길과, 조금은 빠른 승진의 길이 열릴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나는 이미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마음이 뜨려니까 이제 와서 잡으려고 하는 것은 조금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창 이 회사에 나의 애정을 쏟아부을 때는 본 척 만 척 하더니 이제와서 아쉬워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사람도 조직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상대가 나에게 최선을 다 할 때 함께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 타이밍이 인연, 혹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다.


아쉽지 않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래서 "아니"다. 할만큼 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세상도 있다는 것을 보고 싶다. 이 세상-회사-은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감사하고, 만족한다. 그렇지만 안주하고 머물러 있다가는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회사 밖은 전쟁터라지만, 그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더 피폐해질 수도 있지만, 언젠가 가야 하는 길이라면 더 늦기 전에 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일관되게 대답했다.

"구남친과 헤어지는 기분입니다."

정들었지만, 이별이 두려울 수도 있지만, 다시 사귀고 싶은 것은 아니다. 퇴사에 대한 나의 마음이 딱 이랬다.


이직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백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단 한번도 앞날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나 청사진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계획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탓이다. 대학은 수시모집 전형으로 입학했고,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했다. 물론 인생이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계획이 필요했다.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에 대비한 플랜 B도 필요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늘 모범생이었다. 되는 대로 살아가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 마흔에 아무 계획 없이 백수가 되었다.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떻게 되겠지. 지금의 나는 쉴 자격이 있다. 더 멀리 가려면 때로 잠시 숨을 고르고 갈 필요도 있는 법이다.


+ 저서 <퇴근할까 퇴사할까>를 실행하는 거냐고 사람들은 많이 물었다. 여기를 벗어나면 다른 문이 열릴 것 같기도 한데, 밥줄이 끊기는 것이 두려워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이 퇴사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회사가 한국 소비자 시장에서 발을 빼겠다는 선택을 한 덕분이었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진퇴양난의 출퇴근길을 반복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닫힌 문을 내가 연 것이 아니라, 그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디어 퇴사를 획득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이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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