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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함 속에 빛나는 색다른 얼굴

스파이 브릿지

by 이동기

스파이물을 접할 때면 묘한 긴장감을 느끼곤 한다. 그 매개체가 영화이건 소설이건 간에 화려한 액션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개가 매우 치밀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전에 소개했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와 같이 조금은 독특한 스파이물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예외로 하자. 필자가 스파이물을 접할 때 느끼는 긴장감은 서스펜스 혹은 스릴러처럼 스토리와 배경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감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긴장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007시리즈를 예로 들면, 이러한 특유의 매력은 그나마 ‘숀 코너리’와 ‘조지 라젠비’를 지나 ‘로저 무어’ 정도까지에서 마무리됐다고 본다. 사건을 대하는 침착한 태도, 본드걸로 대표되는 매력적인 향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의 특유의 여유 등 캐릭터가 가진 장점을 고스란히 살려 스파이의 매력을 흠씬 뿜어낸다. 이후 ‘피어스 브로스넌’부터는 그런 특징보다는 액션의 역할이 좀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스파이물의 매력을 한껏 뽐낸 건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로 잘 알려진 드라마 ‘제 5전선(국내 타이틀)’도 한 몫 했다. 요원들의 활동 하나하나가 각각의 캐릭터에 알맞게 잘 분산됐다. 필자는 또 하나의 재미로 소설과 영화 두 매체를 통해 접했던 ‘자칼(1997)’을 꼽기도 한다. 암살을 주제로 다룬 작품의 스토리 자체에 캐릭터의 매력을 듬뿍 넣었다는 점에서 타이틀 못지않게 날카로운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오늘은 이처럼 캐릭터의 매력이나 화려한 액션, 날카로운 재미 등은 없지만,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하는 스파이 영화 한 편을 얘기해볼까 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실화이지만 실화 같지 않은 영화, ‘스파이 브릿지(201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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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 긴장감은 실화답게 마치 영화 ‘아르고(2012)’를 연상시킨다. 속도를 급하게 내지 않고 차분하고도 명확하게 아벨(마르 라이런스 분)의 스파이 활동을 드러내는데, 그 과정이 꽤 세밀하다. 관객들에게 그의 스파이 활동을 강하게 인지시키는 건 마치 모든 관객들로 하여금 미국 국민의 감정에 동화되게끔 이끄는 작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이 체포되기까지의 초반 씬(scene)들은 긴장감을 제시하는 차원을 넘어 어쩌면 향후 벌어질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기 위한 떡밥을 깔아놓는 것과 같다.


이야기는 미국과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냉전 시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던 1957년을 배경으로 한다.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붙잡힌 루돌프 아벨을 두고 당시 보험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 분)이 그의 변호를 맡게 된다. 냉전 시대인 만큼, 적국의 스파이를 변호하게 된 상황에 대해 도노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거세지고 돌아가는 상황 또한 도노반에게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개인의 신변과 가족의 안전 등에 대한 불안과 여론의 압박 속에서도 변호사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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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과 구성은 이처럼 실화를 다루는 내용답게 간단명료하다. 일반적인 스파이 액션을 선보이지 않고 붙잡힌 스파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판결에 치중한다. 그래서 초반까지의 재미와 몰입은 영화가 중반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인물을 미국의 보험 전문 변호사가 법에 근거해 변호하는 행동에 대해 당연히 민심은 그를 외면하게 되고, 재판이 진행될수록 국민들이 그의 가족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필자의 시각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헌법정신에 임하는 한 인물의 곧은 심지에 초점을 맞추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영화도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와 같이 관객을 대상으로 스토리를 쥐락펴락하는 롤러코스터 태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자마자 여러 번의 내용 비틀기를 시도하며 관객들의 조금은 지루해진 관심을 다시 한 번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스타일의 연출을 좋아하는 편인데, 지나치게 늘어져버린 중반까지의 패턴은 누구나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사형이 아니라 30년형에 처해지는 아벨에 대한 최종 판결이었다. 영화가 미처 중반을 채 넘기기도 전에 결정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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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아쉬운 부분도 당연히 존재한다. 스토리를 끌고 가는 편집 과정에서 연출력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본다. 아벨의 재판과 이와 동시에 미국의 항공 촬영 스파이의 투입이 어딘가 어색한 건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실제 일어났던 팩트 그대로라고 해도 말이다. 기대에 못지않게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정찰기가 포격 몇 번에 추락하고 만다. 높은 고도에서 추락하는 비행기를 붙잡고 있는 비행사도 어설프지만 역시나 자폭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는 점은, 앞에서의 도노반이 판사를 설득할 때 남겼던 포로 맞교환을 위해 아벨을 살리려했던 대사가 강한 임팩트를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필자가 감독이었다면 이 장면은 무조건 삭제했을 거다.

결국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 포로들의 맞교환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때부터 떨어진 긴장감이 다시 상승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또 한 번의 사건 비틀기가 만들어지는데, 이번에는 미국 유학생이 동독에 붙잡히는 사건이다. 냉전시대, 1대1의 맞교환도 만만치 않은 시기에 주인공 도노반은 이제 1대2의 맞교환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 영화의 묘미는 알고 보면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초반 30분이 아니라, 긴장감을 풀어내는 후반 30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낼지 관객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책임을 안고 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의 맞교환 과정이 좀 더 세심하게 표현됐다면 어땠을까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소련과 동독 사이에서 1대2의 교환이 성사되는 과정에 좀 더 시간 할애가 주어지고, 이 긴장감이 보다 강하게 표출됐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미련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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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영화가 그렇든 실화를 다루는 영화는 연출의 한계를 가지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가능한 표현할 수 있는 연출력과 연기력을 모두 뽑아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 ‘스파이 브릿지(2015)’는 꽤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아르고(2012)’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부분은 영화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필자에게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숙제로 남았다. 사건이 만들어지는 배경 구성과 긴장감으로 초반 몰입도가 굉장했지만 점차 중반으로 흐르면서 영화가 조금씩 늘어지기 시작했고, 그 늘어짐을 해소시키기 위해 스토리의 비틀기를 여러 번 가했지만 결말은 너무나 도식적이라는 점이 매우 아쉽다. 어쩌면 모든 게 미국식 영웅주의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만을 골라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내셔널리즘에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 ‘스파이 브릿지(2015)’는 글의 서두에서 끄집어낸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는 분명 아니다. 그런 점에서 관객들의 기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다른 강점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가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평범한 변호사 도노반을 그들 못지않게 무게감이 분명한 캐릭터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등장인물 간의 역할 배치를 훌륭히 해내고, 사건의 비틀기로 관객들의 몰입을 적절히 조율시킨 감독의 연출력과 주어진 역할에 최고의 매력을 더한 배우 톰 행크스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올 여름, ‘스파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묘한 매력에 빠져보고 싶은 분들이 계신다면, 이 영화 ‘스파이 브릿지(2015)’를 강하게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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