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맞은 대학교수 정인(오달수)과 부인 현숙(장영남)은 시골 강가에 미리 구해둔 집으로 가 생활을 시작한다. 풍경이 좋은 이곳에는 쌍둥이처럼 똑같이 지어진 주택 두 채가 있다. 정인과 현숙은 옆집에 산다는 의사에게도 인사해야 하지 않냐며, 찾아가서 한 번쯤 차를 마시러 오라는 글을 남기고 돌아온다. 하지만 그 이후 그들의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된다. 옆집 의사 육남(김홍파)은 매일 오후 네시만 되면 찾아와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두 시간 동안 마시고 가버린다. 송정우 감독의 <오후 네시>는 제한된 공간, 제한된 인물들로 일상이 비틀리는 기묘한 이야기다.
영화는 시작부터, '너 자신을 알려고 하지 마라'라는 정인의 내레이션으로 경고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인 껍데기를 쓰고 있으며, 남에게 보이고 싶은, 혹은 보여도 될 부분들을 골라서 외모를 만든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그 껍데기가 바로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러한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나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이 영화는 침묵으로 인해 내 자신과 마주하게 한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침묵이 있다. 시끄러운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간 정인과 현숙은 옆집을 제외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정착한다.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침묵이다. 그곳에서 현숙과 알콩달콩 생활하며, 차를 마시고 오후 네시 즈음 명상을 시작한다. 그 명상도 하나의 침묵이다. 그리고 그 시간, 의사 육남이 찾아와 침묵 속에 차를 마신다.
침묵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압박이 될 수도 있고,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침묵은 자신의 내면을 꺼내게 만들고, 침묵하는 이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좋은 심리상담사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조언하려 들지 않고, 상대방이 자신의 깊은 곳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만든다.
<보통의 가족>처럼 이 영화도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오후 네시>는 미장센도 훌륭할 뿐 아니라 음악과 편집이 훌륭하게 어우러져, 정말 지루하고 별 것 아닐 수 있는 장면에서 관객에게 긴장감을 잘 전달한다. 이야기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그 기괴함에 빠져들다가, 결국 관객은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도시를 벗어나 테슬라의 전기차를 운전해 시골집으로 향하는 정인과 현숙. 그런데 뭔가 아주 약간의 위화감이 든다. 보통 이렇게 차를 운전하며 대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유리가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유리를 깨끗하게 닦고 촬영한다. 그런데 이들의 차는 비싼 최신형 전기차면서, 차 유리엔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다. 그래서 대화하는 부부의 모습이 뿌옇게 보인다. 그런데 현숙은 창문 밖을 보며, 미세먼지가 심한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이 모습은 자신들의 내면에 끼어있는 먼지를 외부의 것으로 투영하는, 내가 보려 하지 않는 내 마음의 진실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왜 하필, 쪽지에 '몇 시'에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육남은 오후 네시에 매일같이 찾아올까. 사실 오후 네시는 부부가 명상에 들고 있는 시간이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 명상하는 시간에 불쑥 찾아와 그들의 집안에 자리 잡는 육남은, 바로 그 존재가 정인의 또 다른 자신인 셈이다. 정인은 외적으로는 말을 수려하게 하고, 교양이 있으며 정도 많고, 여대 교수인데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고,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나 육남은 예의라곤 없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무뚝뚝하고 말을 단답형으로만 한다. 정인과 정 반대의 사람이다. 정인은 그의 침묵과 마주하며, 점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자신의 추한 이기심과 폭력성에 눈뜨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정인이 육남을 피하는 현실적인 갖가지 방법들'을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왜 저렇게 하지 않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들이 희석되어 버린다. 이 이야기는 현실적인 스토리라기보단, 어떤 사람의 심리변화 과정을 형상화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정인의 마음을 따라가 보는 게 좋다.
처음에 정인은 육남과의 대화를 어떤 게임으로 생각한다. 단답으로만 대답하는 육남이 장문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한다. 이상하게도 육남은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질문들이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이라서인지, 육남이 의도적으로 단답만 하려는 것인지 정인은 알지 못한다. 결국 한참 뒤에 육남이 뭔가 말을 하려고 실룩거리는 순간, 정인은 승리의 미소를 살짝 지으며 대화를 다른 데로 돌린다. 사생활을 묻는 것이 정정당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지, 그 침묵 속에서 진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인은 우쭐하며 육남을 배려하려 했다. 사실은 이기고 싶었고 그 자리가 싫었으면서. 갖은 수를 써 보지만 정인은 그의 방문을 피할 수가 없다. 싫다고, 그만 오라고, 꺼지라고 하면 될 것을, 싫은 소리 하고 말다툼하고 무시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이다. 자신은 교양 있는 지식인이니까.
정인과 현숙은 육남의 부인과 식사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육남의 비밀을 말게 된다. 육남은 병이 든 부인 세라(공재경)를 간호하며 살고 있던 것이다. 부인은 무슨 병인지 자세히는 안 나오지만, 고도비만이었고 운동능력 인지능력이 굉장히 저하된 상태였다. 부인을 케어하며 화를 내고 짜증 내는 육남의 모습을 본 정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육남이 부인에게 못하게 하는 그것을 하게 하는 방식으로 육남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그가 그런 사연으로 집으로 찾아온다는 생각도 자리 잡는다. 하루 종일 병든 아내를 돌보는 삶. 그것이 죽고 싶을 정도로 숨 막힌 답답한 삶이라는 것을 이해한 듯이.
이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교양 있는 척하려는 부부, 잘 지낸다고 둘러대지만 벗어나고 싶은 부부, 심장이 아픈 심장외과 의사, 딸인 척 하지만 작은 불화도 견디지 못하는 제자. 그 모습들은 점점 진실을 드러내며 불편해진다.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정인은, 거실로 돌아와 육남이 항상 앉던 그 의자에 앉는다. 육남은 바로 정인 자신의 다른 모습이다.
결국 육남이 자살을 시도한 걸 보고 정인은 그를 구해주지만, 다시 한번 딜레마에 빠진다. 그가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죽고 싶어 한 것 아닐까? 내가 그를 절망에 다시 빠트린 게 아닐까? 그것을 확인하려 정인은 육남의 부인을 찾아간다. 그 집은 시계가 가득하다. 그리고 부인과 아들과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무엇 때문에 자식은 없고 부인이 병에 걸렸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고 침묵한다. 집 안은 온통 육남이 부인을 간호하느라 피폐해진 모습이고, 고통으로 다가온다. 수없이 많은 시계들은 무언가를 재촉하는 듯이 들린다. 그리고 정인은 그 고통을 이해하고야 만다. 부인은 남편의 자살소식과 회복소식을 정인에게 전해 듣고 꺼이꺼이 울지만, 정인은 그 울음의 타이밍과 해석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 버린다. 즉, 처음 차창의 유리에 묻은 먼지들을 하늘의 미세먼지로 생각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추한 마음을 부인을 통해 정당화시킨다. 육남은 죽었어야 한다고.
육남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육남과 정인은 그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다. 육남은 계속해서 정인을 자극한다. 그리고 차 핸들을 잡고 죽으려 한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정인에게 육남은 고맙다는 말을 한다. 모든 정당성은 성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인은 살인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추한 모습을 드러내 준, '침묵의 또 다른 자아'를 죽여버린다. 마주하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 진실로 마주하고 보니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자신이 바로 그런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 제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교수, 부인에게 좋은 남편이고 싶은 모습까지도. 자살을 시도하고 살아 나온 육남에게 정인은 "자신이 살던 대로 죽는다"라는 속담을 말해준다. 그래서 질식해서 죽으려 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인은 결국 더욱 더럽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주변에 여성밖에 없던 정인은 여인의 무게에 짓눌려 육남의 부인에게 깔려 죽는다. 그게 그가 살았던 삶 그 자체인 셈이다.
그들은 어디까지 외부에 자신들의 추함을 투영시키고 있던 것일까? 쌍둥이 집이 있던 곳, 정인이 죽고 나자 의사 육남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한적한 시골동네라는 침묵이, 그들 자신과 마주하는 가족을 불러낸 건 아닐까.
나는 내 자신의 허울을 남에게 투영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