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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없는 날 다시 돌아올게요

@테이블 마운틴과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by 지수



여행지에서 랜드마크 하나쯤은 가지 않고 남겨 둬요.
그곳 때문이라도 다시 방문하게 될 테니까요.


페루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자는 마추픽추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페루까지는 비행만 25시간 이상을 해야 한다.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놓칠 수 없는 볼거리를 포기한다는 결정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파리에서 에펠탑을,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보지 않는 선택에 공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갸우뚱하며 동의하기 마뜩잖았던 결심을 오늘 내가 하게 되었다. 케이프타운의 상징인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을 눈앞에 두고 과감하게 비행기를 탔다. 테이블 마운틴 네 녀석 때문에라도 다음번에 꼭 오고야 말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말이다.


테이블 마운틴의 지붕은 새하얀 구름으로 덮여 있는 날이 많다.


“늦겠어. 서둘러!”

기나긴 여행의 끝자락에 이르니 늦잠이 생활화된다. 이미 많은 곳을 방문했다는 생각에 적당히 무감각해진다. 점심나절에나 무거운 몸을 끌고 나와 즉흥적으로 주변에 괜찮아 보이는 식당 문을 두드린다. 연신 셔터를 누르기 바쁘던 초반과 달리 촬영의 귀찮음을 눈으로 풍경을 담는다는 말로 대신한다. 카메라 배터리에 빨간 불이 반짝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여행도 길어지면 일상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실감해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오늘은 다르다. 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은 부산스럽다. 빵빵한 캐리어의 뱃속으로 차곡차곡 옷가지를 개어 넣고 먼지 구덩이를 뒹굴 때 입으려고 챙겨 온 너절한 티셔츠에는 사형선고를 내린다. 상자 안으로 고이 모실 게 뻔하지만 충동적으로 구매한 액세서리와 마그넷을 빈 공간에 욱여넣는다. 남은 재료를 몽땅 쏟아 넣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난간 이리저리 우당탕 부딪히며 짐을 내린다.


서둘러 우버를 부른다. 날씨예보가 처음으로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케이프타운에 일주일을 머물러도 녹록지 않았던 테이블 마운틴이 입산을 허락한다. 반도의 변덕은 여행자를 울고 웃게 한다. 날이 쨍쨍해도 1000m 남짓한 꼭대기에는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친다. 케이블카는 안전상의 이유로 취소되기 일수다. 파도가 잔잔하여 방문하면 구름은 뽀얀 거품이 되어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올라가 봤자 허연 눈밭이다. 불시에 열렸다는 소식에 달려가면 금세 표정을 바꾸어 언제 그랬냐는 듯 빨간 글씨를 띄운다. 어젯밤 기운을 잔뜩 불어넣은 덕분일까. 오케이 사인에 탭댄스가 절로 나온다. 오후 비행기라 시간이 넉넉지 않다. 그래도 서둘러 움직였으니 정상에서 대미를 장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찬 미래를 꿈꿔본다.


시그널 힐은 노을진 붉은 테이블 마운틴을 감상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다.


까마득하다. 콧대 높은 테이블 마운틴의 용안을 뵈려 몰려든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이거 심상치가 않다. 구렁이처럼 길게 늘어선 대열의 트머리에서 손톱으로 입술을 야금야금 뜯는다. 외국인들을 대개 느슨하게 줄을 서니까 금방 빠질 거라며 위안을 삼지만 앞쪽 대기선을 한참 벗어나 있다. 보도 가장자리 철조망에 몸을 기댔다가 쪼그리고 앉았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아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케이블카 대수는 한정적이고 오르내리는 데 일정한 시간이 걸리니 당연지사다. 속절없이 째깍대는 초침을 보니 속이 쓰리다. 이러다가 집에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 단숨에 뒤돌아설 수 없는 까닭은 기다린 시간이 아깝기도 하거니와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최남단은 아무 때나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여기까지 와서 얼굴마담인 테이블 마운틴의 정상을 밟지 못하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듯하다. 일단 최후의 순간까지 버텨보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두 시간 여의 갈등 끝에 무리의 선두에 선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기쁨도 잠시, 오 분 안에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잔혹한 현실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 발 딛는 순간 비행기 놓친다.

- 케이블카까지 탔는데 구경 안 하는 게 말이 되냐.

셋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이 샛노란 원통이 아가리를 벌린다. 꾹꾹 밀려오는 인파에 창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다. 테이블 마운틴은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이 이어지다 산머리에서 탁 트인 평지가 펼쳐진다. 동서로 3.2km 너비의 거대한 식탁을 마주하면 신이 빚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원기둥이 잽싸게 치솟는다. 1km를 대각선 꼴로 오 분만에 오른다더니 부딪히는 바람소리에 빠른 속도가 실감 난다. 이와 동시에 바닥이 조금씩 회전하기 시작한다. 질주하는 줄과 달리 몸체는 느릿하게 360도를 돌며 케이프타운의 전경을 아낌없이 뽐낸다.


수직에 가까운 테이블 마운틴의 옆면은 풍화를 견딘 단단한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 작은 초목과 수풀로 무성한 바닥과 달리 높이를 더할수록 야트막한 잡초와 야생화만 드문드문 보일 뿐 밝은 회색의 사암이 도드라진다. 걸어서 등정하는 무리를 위한 구불구불한 길 주위로 제각기 크기가 다른 암석 덩어리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흩어져 있다. 푸릇푸릇하고 잘 정돈된 알프스의 언덕과 달리 일 년 내내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고개는 파편들이 이리저리 휩쓸리고 뒹군다. 서편으로 테이블 마운틴의 어깨선이 제법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상부에 다다를수록 비대한 탁자의 골격이 시선을 압도한다. 동쪽으로는 테이블 마운틴의 척추를 타고 흐르는 라이온스 헤드(Lion's Head)시그널 (Signal Hill)이 묵직하게 자리한다. 독특한 윤곽선은 아침볕을 가득 받아 태양을 닮은 순백의 빛을 발산한다. 산책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난이도지만 날이 이리 좋은데 무엇이 대수겠는가. 자전하는 케이블카가 제멋대로 깎이고 부서진 암벽을 향해 돌진한다. 충돌하지 않을까 질끔 겁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꼴깍 침을 삼키자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진군하던 차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임이 멎는다. 산정이 코 앞이다.


- 바깥 상황보고 정하자.

마지막 날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행운을 얻었으니 또다시 축복이 내리지 않을까? 무겁게 닫힌 문이 좌우로 벌어지고 잠시 언어를 잃는다. 열린 유리 너머 쏟아지는 눈빛을 외면하고 싶다. 목을 빼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지친 동공은 화살표가 되어 망설임 없이 하나의 선택지를 가리킨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탑승객들과 달리 우두커니 목석마냥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안내원이 손을 뻗는다. 그 방향으로 누구보다 가고 싶지만 안 된다고요.

- 시간이 없어서요. 그대로 타고 내려가도 될까요?

비싼 입장료를 지불했는데 제대로 구경하지 않고 하산하는 손님이 처음이었던 걸까. 입술을 몇 차례 달짝 거리다가 애매하게 턱을 누른다.


사자의 머리를 닮은 라이온스 헤드의 위풍당당함은 테이블 마운틴 못지 않게 멋드러진다.


새로운 승객을 싣고 빙그르르 떨어지는 케이블카 안 공기가 텁텁하다. 울상을 짓다가 체념하다가 한숨을 쉬다가 입을 다문다. 십 분 간의 짧디 짧은 탐방으로 아쉬움의 소리가 맴맴 귓가를 울린다. 들뜨고 신난 표정의 다른 관광객과 달리 축 처지고 서글픈 세 마리의 매미들은 슬픔을 노래한다. 바닥이 동그랗게 회전하고 정면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케이프타운 시내와 해안선을 침범하는 대서양이 시선을 가득 메운다. 500원 동전 크기의 로벤 섬(Robben Island)도 안개를 걷어내고 얼굴을 드러낸다. 언제나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의 정경은 밸브를 돌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혀 준다. 창가에 손을 얹고 작별을 고한다. 찬란한 풍경은 미련을 고이 접어 가슴에 담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게 한다. 나는 랜드마크 하나를 일부러 보지 않는 어느 여행자와 다르다. 그러기에는 그리움으로 마음 한편이 먹먹하다. 그럼에도 그와 공유할 수 있는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바람과 구름 없는 날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확신 같은 것 말이다.


라이온스 헤드, 시그널 힐, 로벤 섬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케이프타운의 풍경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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