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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Apr 04. 2019

당신 때문에 휴직한 건 아니에요

내가 휴직하게 된 세 가지 이유

휴직서를 제출했다. 간단한 한 장 짜리 서류였지만 나의 오랜 고민이 담겨있었다. 내게는 어려운 결정이지만 타인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했다. MOT(Moment of Truth), 진실의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보여주는 표정과 행동으로 함께 일해온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꼭 갑자기 걸려온 배우자의 전화에서 '여보, 나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만 듣고 보여주는 본능적인 반응처럼 말이다. ㅋㅋㅋ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내가 조직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깝지 않아? 어쩌려고 그래? 아쉽지 않아?'


라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대다수가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외에 소수의 관계자가 보여주는 분노 섞인 반응이었다.

 

'아니, 왜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고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야?'


그는 왜 화가 났을까? 자신에게 피해가 있을 수 있음을 걱정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나를 통제할 수 없음에 화가 났을까? ㅋㅋㅋ


재미있게도 그는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괜찮은데, 두고 가는 후배들에게 미안하지. 그렇지 않아?'


평소에 후배들이 개인생활도 못할 만큼 가열차게 부려먹던 그는 갑자기 후배를 걱정하는 천사가 되어 나를 죄책감의 절벽으로 밀어버리려는 시도를 했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리더는 후배들이 바보인 줄 안다. ㅋㅋㅋ


숨겨진 동기를 수반하고 자주 반복적이며 표면상으로는 속임수를 내장한 일련의 흥정을 '심리게임'이라 한다. 이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초기 결정의 방식을 유지하는 형태로 삶을 구조화하는 수단이 된다.
- 에릭 번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후배들이 걱정이 되어 약 6개월 전부터 이야기를 해뒀었다.

 

얘들아, 내년 초가 되면 내가 잠시 회사를 쉬어야 할 것 같아. 이유는..


악독한 선배는 아니었는지 훌륭한 후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비밀을 지켜줬고, 나는 6개월 동안 차분히 휴직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조금 쉬려고요.


나는 휴직이 확정될 때까지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괜한 구설수를 원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내게는 왜 휴직하는지 직접적으로 묻지도 않던 그가 나중에 측근이 내놓은 자의적인 답을 진실로 믿었다는 후문이 들렸다. 역사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보 임금과 간신의 장면이 아닌가? 역시 역사의 묘미는 반복이 아닐까? ㅋㅋㅋ


불행하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유사한 사람과 만나는 것을 선호합니다. 정치적 관점, 경제 계층, 미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는 걸 좀 더 선호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서로 힐링하면서 위로를 얻거든요.
- 정재승


그가 회사는 일하는 곳이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할 때마다 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발 회사에서 위로받지 말고 일을 하라고. ㅋㅋㅋ 그래서 내 숭고한(?) 휴직 의도를 맘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휴직의 이유를 글로 솔직하게 이야기해 본다.



01 알아차림


때때로 출퇴근 외 시간의 지하철 인구가 궁금했다. 평일 아침 일찍 스타벅스로 출근하고 싶었다. 오전 10시에 핫 플레이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싶었다. 아이들 학교도 배웅하고 싶었고, 담임 선생님들과의 상담도 가보고 싶었다. 다음날의 일정을 걱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서 영화도 보고 싶었고, 오전에 열리는 문화센터 강좌도 참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내내.. 아니 며칠을 엎어져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너무 아까웠다. 그런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아까웠다. 할아버지가 되어 스타벅스에 가는 것과 지금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내가 동일하게 평가되는 것이 싫었다. 아이들의 2019년 담임은 지금만 만날 수 있는데 나중으로 미루라는 것도 싫었다. 비수기에 제주도를 여행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 일요일에 호텔에서 호캉스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ㅋㅋㅋ


사막에서 간혹 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탈수증으로 죽는 사람이 있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데도 몸이 갈증을 느끼지 못해서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몸에서 행복이 빠져나가고 사랑이 빠져나가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덜 중요한 것에 관심을 두느라 결핍을 방치한다.
- 림태주


내일은 뭐할까.. 아.. 행복한 고민이다. 갑자기 궁금하다. 그는 뭐 하고 있을까? 오늘도 회의에서 위로받고 있을까? ㅋㅋㅋ



02 진화와 멸종


멘토를 선택하는 방식에는 2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닮고 싶은 롤모델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절대 따라 하고 싶지 않은 Worst 인간을 멘토로 선정하는 것이다.

 

저렇게는 죽어도 되지 말아야지


솔직히 10년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전자의 롤모델 선정 방법보다 Worst  선정 방식이 더 유용했다. 최소한 욕은 먹지 않는 선배의 경계선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생겼다. 그나마 몇 안되던 롤모델들이 사라졌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닮고 싶었던 선배들과 어느새 같은 직급이 되어버렸다. 왜 그 이상의 직급에서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일까? 문득 같은 층의 상위 직급자들의 행동을 관찰해봤다.  


굽히는 법이 없는 A 부장은 B 상무의 말에 NO를 한 적이 없다.

B 상무는 C 전무가 부르면 빠른 강아지처럼 뛰어간다.

직원들 앞에서 웃는 법이 없던 C 전무는 사장님만 만나면 잇몸 미소를 보여준다.


아하 ~ 제야 깨달았다. 조직 내의 승진이 진화라면,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은 모두 멸종했다는 것을. 그런데 어쩌지.. 나도 저런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는데. ㅋㅋㅋ 지금부터라도 강아지처럼 뛰고 웃는 연습이라도 해야 되나.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심리적인 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아첨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첨하는 데 능숙해졌다. 또한 밤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상사를 씹어주기만 한다면 낮에 아무리 상사에게 아첨을 해도 사회적으로 얼마든지 용인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 데이비드 브룩스



03 정서적 미세먼지


사람의 정서도 감기처럼 전염된다. 친구가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확률은 25%~63%라고 한다. 반대로 우울한 친구가 근처에 있으면 자신이 우울해질 확률이 93%나 된다. 둘 중 어떤 것이 영향이 더 클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감정들은 파도를 타고 서로 모르는 사이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회사에 우울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것에 감염되고 그것이 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최근 들어 우울해 보이는 임원들과 자주 회의를 하게 되면서 이것이 걱정되었다. 사무실 안에 정서적 미세먼지가 꽉 차 있음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중국발 미세먼지보다 해로웠지만, 이것을 해소할 청정기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었다. 샤오미 도와줘! ㅋㅋㅋ 나름의 방독면과 마스크를 사용하면서 버티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열심히 털었지만 그 미세먼지는 집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자기야, 행복하지 않으면 쉬워도 돼.


다행이었다. 국내에도 중국발 미세먼지가 도달하지 않는 청정지역이 있다더니, 회사발 미세먼지의 청정지역은 우리 집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회사발 미세먼지 때문에 휴직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너무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ㅋㅋ) 다시 말하지만 당신 때문에 휴직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 논어, 위령공편


휴직을 하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도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은 정서적 미세먼지가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웃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그것을 망각하는 사람들 수도 없이 봐왔다. 가까운 곳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의 고혈을 짜고 사회에 기여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도 이대로 열심히 달리면 똑같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게 들었다.


자공이 말하였다. '저는 남이 저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일을, 저 또한 남에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사야, 그것은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논어, 공양장편


어쩌면 공자님 말씀대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될 바에야 일단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정서적 미세먼지가 되지 않을지. 그런데..


며칠 쉬어보니 누군가 왜 휴직을 해야 하냐고 물으면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냥 해라..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지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무것도 못했는데.. ㅋㅋㅋ 휴직해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병은 여전하다. 범국가적인 전염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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