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퇴사하기 전에 확인하면 좋은 체크리스트
딱히 급한 돈이 필요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동물원 내에도 배고픔을 이길 정도의 빵은 있었다. 다만,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두목 원숭이의 부름과 칭찬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초라했다. 때때로 받는 두목의 총애 조차 부담스러웠다. 총애가 다양한 대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수년간의 회사생활로 배웠기에 나는 더 불안해했다. (당신이 여기 에이스라고?)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두목 원숭이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 같이 동물원을 벗어났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야근과 치맥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저녁 시간을 최소화했다. 개인적인 이슈를 만들어서 매일 같이 강연과 워크숍에 참석했고, 없는 날은 자정까지 카페에 앉아서 내 콘텐츠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할 이야기가 생기자 이곳저곳에 제안도 하고 주위에 알렸다.
그렇게 시작된 투잡은 몇 년이 지나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연차가 부족할 정도가 돼버렸다.
코리님, 이제 회사 나와서 저희랑 함께 해요. 그 정도면 연착륙 가능하잖아요.
솔직히 어느 정도가 준비된 상태에서 퇴사나 독립을 해야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나는 주위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말린다. 이 글이 혹시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특히 아끼는 후배 H에게도.
우선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의 보수가 안정적인지, 선불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초기에 했던 투잡 중에 주말 과외는 선불제이면서 입금도 정기적으로 진행되기에 수입 예측이 확실했다. 이번 달에 이 정도 받았으니 몇 시간 일해야 하는지 예측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반면 강연 수입은 후불제이면서 입금도 비정기적이다. 심지어 중간에 이상한 에이전시를 만나는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입금을 지연한다.
아, 강사님. 기관에서 아직 입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투잡인 경우에는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있기 때문에 한 달이 넘게 들어오지 않는 한 문의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강연 수입으로만 생계가 유지되거나 금액이 적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겠는가. 마음이 급해지면 무리수를 두게 마련. 편안한 마음으로 선순환을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안정적인 시스템을 미리 준비하면 좋겠다.
모 기관의 강의를 정기적으로 담당하는 교수로 활동할 때의 일이다. 특이하게 이 강의는 수강신청을 받아서 진행되는 것이라 최소 인원이 채워지지 않으면 폐강이 되곤 하였는데, 강의 직전까지 폐강 여부를 알려주지 않아 연차 일정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27일 그 강의가 진행될까요?
계속 그 기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곤혹스러워도 먼저 일정을 확인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마침 다른 기업의 강의 날짜가 겹쳐서 전화를 했다. 괜한 거짓말이 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하게 다른 일정이 생겨서 조금만 빨리 알려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강사님, 여기도 내부 기준대로 일해요. 그냥 그 강의하세요. 강사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강사는 얼마든지 있으니'라는 말이 며칠 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갑자기 회사가 고마워서 야근과 치맥까지 달리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당신의 멘탈은 나보다 더 단단했으면 좋겠다.
회사에서 직급과 직무에 따라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분업화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잡무들은 후배들에게 몰리는 경우가 있다. 그 잡무를 자발적으로 하는 선배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좋은 선배가 되기도 한다.
이번 체육대회는 후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물론 자신은 등산을 하고 싶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선배들도 있지만, 나름 후배들의 노력으로 준비된 맛집과 아이템으로 마음 편하게 놀고 올 때도 있다. 회사에서는 감사하게도 이렇게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경우가 있다.
강사님, 부산의 E기업입니다. 강의 부탁드립니다.
강의안 준비, 교육 니즈 문의, 장소 확인, 교통편 예약, 준비물, 식사 등 짜치는 일들의 향연이 시작된다. 처음에 투잡 활동이 적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많아질수록 이것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소모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비정기적인 일을 위해 별도의 직원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분주한 꿀벌처럼 모든 일을 혼자 하던 어느 날 선배 프리랜서에게 노하우를 들었다.
4명 정도 프리랜서가 사무실 하나를 빌려서 직원 한 명을 공유하면 좋아.
프리랜서는 갑질 하는 고객은 있어도 그 일을 그냥 안 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두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은 지방의 사업을 하나 맡으면서 회사에 여름휴가를 신청하고 내려가 일을 했다. 10여 년 동안 혼자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적이 없었는데, 혼자 며칠간 일하면서 말이 없어졌다. 그 지긋지긋한 회의도, 신경 쓰이는 두목 원숭이도 없는데 뭔가 허전했다.
자기야. 오늘 말을 한 마디도 안 해서 전화했어.
회의와 두목은 없어서 좋았지만,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일하는 기쁨을 나눴던 동료들도 없었다. 외로웠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전시켜주고 피드백해 줄 사람이 없으니, 피곤하다고 누운 와이프를 붙잡고 그 이야기를 했다.
남편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미안해.
프리랜서는 생각보다 많이 외롭다.
한국은 지극히 회사적인 사회다. 조금 알려진 회사에 다니면 자기소개가 정말 쉽다. 어떤 컨퍼런스나 교육은 기업 메일만 입력하면 무료로 초대도 받는다.
어디서 무슨 일 하는 누구입니다.
추가로 별 이야기를 안 해도 누가 뭘 묻지도 않는다. 하지만 투잡 때문에 회사 이야기하기가 꺼려져서 밝히지 않았더니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다. 명함도 회사가 아닌 다른 명함을 내밀면 사람들이 무슨 회사냐고 묻고 설명하다 보면 나 자신이 낯설어진다.
레퍼런스가 없어서 모시지 못하겠어요.
몇 년 전 처음으로 만든 콘텐츠를 가지고 기업을 접촉할 때 들었던 이야기다. 대다수의 기업이 반응 조차 없었지만 그나마 반응이 있었던 기업들에서 온 회신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당신의 이름 세 글자를 구글링 해보면 아무 이야기도 없는데 뭘 믿고 당신을 쓰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회사일을 할 때 비슷하게 했었기에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퇴사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의 이름을 한번 구글링 해보자.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낄 정도의 브랜딩이 충분히 되어 있으면 좋겠다.
코리 선배, 그래도 회사가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퇴직 신청서를 일단 써서 가방에 넣어라. 그리고 칼퇴하고 퇴직을 준비하는 시간을 매일 가져라. 나갈 동물원에서 하는 바나나 파티 그만 가고. 떠날 동물원에서 주는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 다른 원숭이들이 당신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는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그게 신경 쓰이면 퇴직서를 다시 한번 쳐다봐라. 회사와 자신의 비전을 일치시키라고 말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도 지워라. 정체 모를 격차를 위해 열정을 다하라는 책도 알라딘 중고매장에 보내라.
그리고 회사원이 별로 없는 모임을 찾아다녀라. 동물원의 울타리가 없는 그들이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하고 맹수들을 어떻게 견제하는지 궁금해해라. 마지막으로. 그들이 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매일 조금씩 따라 하자.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퇴직서를 동물원의 파쇄기에 넣는 날이 온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날 밤도 동물원을 몰래 빠져나가 정글 사냥을 돌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우리가 원래 존재하는 곳이 정글이고 동물원이 잠시 머무는 곳임을. 착각하며 사육되다가 어느 날 정글에 나와서 객사하지 말자.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함께 보란 듯이 잘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