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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시를 만난 날

詩作 시작

by 니나

얼마 전 한국문학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강의에서 각자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는 시간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 에는 나름 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외우라고 하셨던 시도 열심히 외웠는데 최근에는 시를 언제 읽어봤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쩌다 접한 시는 너무 어려워서 '시는 나랑 안 맞는 것 같다. 이제는 시를 이해하고 싶은 열정도 여유도 시간도 없어.' 생각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시를 가지고 오라니 참 난감했다. 어떤 영화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대사가 떠올랐다. "진실은 시 같은 거야. 그리고 다들 시를 싫어하지."

나만 시를 싫어하는게 아니구나! 위안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 느꼈던 시에 대한 동경과 사랑은 고등학교 시절 꺾인 것 같다. 수능을 앞두고 작가의 의도로 알맞은 것을 고르라는 둥, 시에서 나타내는 현실인식을 맞게 설명한 것을 고르라는 둥 하는 문제들을 수없이 풀며 시를 '제대로'이해하지 못하면 틀린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나도 틀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예전에 쓴 글을 보면 어쩜 그렇게 유치한 지 차마 다 읽지도 못하고 버릴까 고민하게 된다. 사실 그래서 시를 포함한 모든 글을 남가지 않으려 애써왔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글씨를 썼던 때가 기억난다. 진한 B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써서 책받침을 하지 않으면 뒷장에 있던 종이 몇 장도 눌러쓴 흔적이 남았다. 너무 연필을 꽉 잡아서 손도 아프고, 손에는 땀이나 연신 허벅지에 닦지 않으면 손이 연필에서 미끄러졌다. 종이에 닿아 있던 손날은 연필심이 묻어 시커멓게 변했고 지우개로 지워도 흔적이 쉬 없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일 이학년 때 선생님은 한 단원을 두 번씩 써오라는 숙제로 당시에는 꽤나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글씨 연습을 시키셨는데, 앉아 쓰는데만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리는 고행 같던 숙제였다. 예쁜 글씨 상을 받으려고 꽤나 정성 들여 썼지만 한 번도 받지는 못했던 기억도 난다.

마키 아처의 <다니엘이 시를 만나다>의 원제는 <Daniel finds a poem>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다니엘이 시를 발견하고, 만나게 되는 책이다. 다니엘은 내가 처음 글씨를 배울 때 꾹꾹 눌러쓰듯 그렇게 매일 시를 만난다. 다니엘은 공원에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들을 잘 아는 아이다. 아마도 공원을 즐겨왔던 것 같다. 다니엘은 월요일 아침 공원에서 ‘공원에서 시를 만나요. 일요일 6시’하고 적힌 안내문을 보게 된다. ‘시’는 무엇일지 다니엘은 호기심이 생겨 동물들에게 물어본다. 동물들은 시가 뭔지 물어보는 다니엘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미에게 시는 반짝이는 아침이슬

청설모에게는 바삭바삭한 나뭇잎

다람쥐에게 시는 오래된 돌담이 둘러싼 창문 많은 집

개구리에게 시는 시원한 연못에 뛰어드는 것

거북이에게는 햇볕에 달궈진 모래밭

귀뚜라미에게 시는 하루가 저물 무렵의 노래

토요일 밤 창가로 온 부엉이에게 시는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별, 풀밭의 달빛, 어디로든 나를 데려다주는 고요한 날개


다니엘은 동물들과의 만남 속에서 시를 만난다. 나는 언제 처음 시를 만났을까 떠올려본다. 첫 기억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음악시간에 <섬집아기>를 배웠을 때다. 그때는 섬집아기가 시인지도 몰랐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 노랫가사가 시였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듣고 시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시절 교환일기가 유행해서 친한 친구와 셋이서 교환일기를 썼는데,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시와 넘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하는 글들을 썼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던 친구 아버지에게 내 시가 어떤지 선보였던 적도 있는데 답변이 없었던 걸로 보아 꽤나 유치했나 보다.


다니엘이 시를 만나는 이야기를 읽으며 <섬집아기>를 다시 흥얼거려본다. 중학교 때 꾹 꾹 눌러썼던 수많은 ‘유치’했다고 생각했던 겁 없고 순수한 마음을 떠올려본다. 맞고 틀렸다는 평가도 싫고 내 생각과 감정을 들키기 싫었던 마음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이제 시를 다시 만나보자고 나를 가만히 토닥인다. 처음 글씨를 쓰는 아이처럼 다시 연필을 들고 꾹 꾹 눌러써 보자 다독인다. 다니엘에게 용기를 받아 내 일상을 떠올려본다.


아침에 사각사각 쌀 씻는 소리

돌아가는 세탁기

타다닥 켜지는 가스레인지

하나 둘 가족들이 일어나는 소리

혼자 있는 집 안의 공기에 떠있는 먼지와 정적

집 앞 축구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공차는 아이들

삐빅 도어록 소리와 함께 돌아오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열정을 다해 노는 소리와 땀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내가 먼저 내가 먼저 하다가 싸우고 토라지는 아이들.




그래서 나는 어떤 시를 낭송했을까?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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