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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vis Feb 21. 2019

리베카 솔닛의 사회적 유토피아는 존속할 수 있을까?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읽은 후 나의 비판적 리뷰



※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서평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minchahng/9


이 책이 쓰인 연도는 2008년으로 정확히 10년 전이다. 미국에서는 한창 금융위기라는 사회적 재난이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 때 사회 전반에 이런 암울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물론 지금 한국도 암울하긴 하다) 이 책이 좀 더 주목을 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10년이라는 세월 차이를 감안하면서 계속 읽다 보니 맨 처음 드는 생각은 어떤 의문이었다. 인간의 본성이자 그동안 인간이 잃어버렸기에 지향해야 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고 타인과의 연대라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만연하고 지향되고 있는 개인주의, 즉 합리적 이기주의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지난 5년간 대한민국에서는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감상과 같은 취미생활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등 이전에는 당연히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행위라고 여기던 것들을 혼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꽤 빠르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창피하고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행위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당당하고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 타인이 자신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해 간섭하는 걸 싫어하고 대학이나 기업의 회식, 동아리와 같은 모임도 자발적으로 회피하고 혼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만약 이 책의 논리가 지금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면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시민의 힘과 시민들의 결속을 두려워하는 기득권들이 그것을 막기 위해 계속 미디어를 통해 개인주의를 긍정적으로 세뇌시켰고 현재 개인주의의 확산은 그 결과이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건 좀 억지스럽다. 나는 오히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인주의를 선호하고 국가는 그 현상을 좀 막아 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시대가 변하면서 틀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인 유토피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부족하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 책에는 질서와 혼돈이라는 개념을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작가는 핼리팩스 폭발사건과 멕시코시티 대지진 사건을 통해 재난을 기존에 권력자들이 유지해오던 질서가 전복되고 새로운 공동체와 상호부조적인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일종의 카니발로 보았다. 즉, 재난 직후부터 어느 정도 사태가 회복되어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까지의 카니발 기간은 기존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이런 질서들이 다 없어진 원시 사회이자 혼돈의 상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혼돈을 마주할 때 홉스가 주장했듯이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돌아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발생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 속의 사람들은 서로 연대의식을 느꼈고 즉흥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을 취했고 자본이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선행위를 하는 이타주의가 발생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이타주의가 인간의 본성이고 이런 상황이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있었던 것인 동시에 인간가 추구해야 하는 유토피아가 아닌가 조심스레 주장한다.


여기까지가 질서와 혼돈의 개념으로 풀어낸 책의 개요인데 석연치 않은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개인주의 즉, 이기주의를(원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지만 이 서평에서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자 이타주의의 반의어로서 이기주의라는 단어를 쓰겠다.) 완전히 배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5개의 재난 모두에서 작가는 모든 사람이 타인과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며 일상에서의 이기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난시와 일상은 큰 차이가 있다. 재난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직접적인 생존여부가 달려있다.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내가 살 확률이 더 높을지 즉각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다. 즉, 머릿속에서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게 더 좋을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게 더 좋을까 계산할 시간이 없는 특수한 상황이다. 인간은 특수한 상황(혼돈)에서 본능적으로 이타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게 나을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게 나을지 충분히 계산할 시간이 있고 계산한 후 행동한다. 인간은 일반적인 상황(질서)에서 이성적인 판단 하에 이기주의를 선택했고 현재 대부분의 나라의 시민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두 가지 상황 중 전자가 옳다고 주장하는 건 인정하겠으나 후자 또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틀리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난 속에서 탄생한 이타주의는 유토피아이기는 하지만 절대 지속될 수 없다. 작가 역시 어찌 됐든 재난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지속될 수 없는 일시적인 유토피아이기에 우리는 이 유토피아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에 필요 조건은 우리의 일상 즉, 질서 속에 이타주의가 성공적으로 편입된 상황에서 이기주의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석연치 않은 점 두 번째는 작가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거의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권력자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한 부분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자본주의라는 질서를 채택하고 있고 자본주의에서는 반드시 부르주아라는 권력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시민계급이 형성된다. 즉, 기존의 질서와 권력자들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작가는 기존의 질서라는 개념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건 아닌 듯하다.) 5개의 재난에서 시민들이 그토록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결속하여 시민사회라는 강력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존재로 설명하는 논리에도 국가와 정부라는 권력자들이 공공의 적이라는 대전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을 책을 읽으면서 간혹 받았다.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영웅과 악당처럼 말이다.

내가 받은 느낌이 어떻든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한 것일 테니 책에서 언급된 권력자들의 만행이 전부 사실이고 이해하기 쉽게 그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가정하겠다. 하지만 그들을 변화할 수 없는 절대악으로 취급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완전히 적으로 돌리고 시민들끼리만 뭉쳐 뭔가를 해보려는 생각은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질서가 존재하는 한 어찌 됐든 권력자들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정의한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질서 안에 권력자와 시민들이라는 계급이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네트워킹이 활발해져야 한다. 물론 계급 자체를 없애 버리자는 마르크스스러운 결론도 있지만 진부하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제외하겠다.

지금까지 나의 주장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구체적인 대안 제시를 해본다면 이러하다. 일단 이 표는 위의 이야기를 도식화한 결과이다. A는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선입견으로 작가가 근현대의 발생한 5개의 대재난을 응시한 결과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밝혀졌다. C는 작가가 발견한 것으로 사람들은 재난 이후 이타적이고 연대적이며 상호부조 하는 모습을 보였다. B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D에 적절한 개인주의가 섞인 사회가 이 책을 읽은 나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이다.

그렇다면 D사회가 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 표에 있는 그대로이다. 권력자들의 이타주의와 권력자와 시민들 간의 상호부조이다. 5개의 재난현장에서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은 명령 하에 움직이는 정부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기로부터 순수한 봉사의 마음으로 지원을 해준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자원봉사자들 혹은 자선단체의 단순한 물질적 원조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상호부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봉사자들이 재난 피해자들과 원조를 해주는 관계와 받는 관계로만 끝나지 않고 더 깊게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관계를 가졌을 때, 그리고 원조에 대한 답례로 피해자들 역시 자신들만의 공동체에서 봉사자들에게 유의미한 행위를 했을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것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윌리엄 제임스의 ‘도덕적 등가물’이다. 자원봉사자들처럼 권력자들은 뭔가 이득을 취하거나 지금의 질서를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보다 유연한 사고로 이타주의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 역시 국가의 지원을 받는 행위에서 끝내지 말고 국가가 무언가 선하고 좋은 의도로 프로젝트를 실행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받은 만큼 보답을 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 이외에도 권력자와 시민들 사이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등가물을 좀 더 구체화하는 모델이 현재 질서 내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가치이자 나 역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인 ‘신뢰’가 생겨난다. 시민들만의 이타주의가 아니라 기득권 내부에서 이타주의에 대한 움직임이 발생할 때 유토피아는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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