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톰포드
톰포드 매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준비가 필요했다. 들려오는바, 이 매장은 지나다가 들르는 곳이 아니었다. 목적지여야 했다. 몸에 꼭 맞는 핀스트라이프 수트를 차려 입었다. 좋은 구두를 신었다. 매디슨 에비뉴로 향했다. 톰포드의 플래그쉽 스토어에 들어서는 순간 그냥 웃었다. 말이 필요 없어서. 이게 끝이어서. 이 시대 최고의 '탐미주의자'가 만든 공간이었다. 톰포드가 내놓은 향수의 이름 그대로였다. “Fucking Fabulous”
구찌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정확히 10년이었다. 죽어가는 구찌에 메스를 댔다.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던 브랜드였다. 과감한 커팅의 의상, 간결하면서도 도회적인 악세서리가 구찌의 더블G 로고를 달고 출시 되었다. 섹시함과 품격, 레트로와 유행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들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73세의 구찌가 23세로 환생했다.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 이게 구찌라니. 모두가 새로워진 구찌를 이야기했다. 마돈나는 MTV 어워드 무대 위로 올라 "구찌 구찌 구찌"를 외쳤다. 톰포드의 재임기간 동안 구찌의 매출은 13배 상승했다. 구찌에서의 마지막 런웨이, 관객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쳤다. 눈물을 흘렸다. Long live the Fashion King! 톰포드 챕터 원의 종언이었다.
톰포드
그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의도적으로, 거대 자본의 투자를 받지 않았다.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찼다. 마크제이콥스의 뒤에는 LVMH가 있었고, 칼라거펠트는 샤넬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톰포드는 홀로 존재했다. 주변의 간섭에 시달리다 구찌와 작별했던 그였다.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세계여야 했다. 톰포드의, 톰포드에 의한, 톰포드를 위한 브랜드.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구찌에서 합을 맞춘 도미니코 디솔레가 경영을 맡았다. 마르콜린과 에스티로더 같은 기업은 각각 '톰포드 아이웨어'와 '톰포드 뷰티'의 생산을 도울 터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톰포드의 주인은 톰포드였다.
십 년하고도 몇 년이 흘렀다. 톰포드의 한해 매출은 20억 달러에 이른다. 한때 그와 함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대를 열었던 마크 제이콥스와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간다. 톰포드만 명징하게 남았다. 이제 그는 톰포드를 지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품 브랜드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모두가 그의 말을 믿는다.
세일즈맨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세일즈맨이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그의 저서 '파는 것이 인간이다'에서 말했다. 그가 정의하는 세일즈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비전'을 판다. 소설가는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를 세일즈한다. 나조차도 7살짜리 아들에게 야채주스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판다. 유치원에서 힘이 제일 세질 거라는 매혹적인 포장을 더해서. 톰포드는 초일류 세일즈맨이다. 그의 손이 닿으면 아무리 비싼 값이어도 미친 듯 팔려 나간다. 비결은 '톰포드다움'을 '경험'시키는데 있다.
톰포드다움
"차별화하지 못하면 죽는다(Differentiate or Die)."
마케팅 구루 잭트라우트의 일언이다. 포화의 시대, 차별화가 유일한 답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방법론이 남는다. 톰포드는 애써 '차별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창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과거’를 비튼다. 구찌에서는 브랜드의 유산을 재해석했다. 현재 그가 쥐고 흔드는 것은 '클래식'이다. 복식의 룰이다. 수트의 허리는 조인다. 어깨의 패드는 키운다. 그리고 저 광대한 라펠. 수트는 드라마가 된다. 그로 인해 키톤, 브리오니 같은 ‘장인’들의 옷은 고루해 보인다.
톰포드의 세일즈쇼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섹스’가 등장한다. 광고는 노골적인 '포르노그라피' 일색이다. 구찌에서부터 지금까지 '섹슈얼리즘'은 늘 톰포드의 일부였다. 그의 말대로 '섹스는 무조건 팔리니까'. 헐벗은 뱀의 유혹에 이 시대의 아담들은 정신이 혼미해진다.
결국, 톰포드가 파는 것은 옷이 아니다. '강력한 환상'이다. 이 옷을 입으면 ‘근본 있으면서도 섹시한 바람둥이’가 될 수 있단다. 브래드 피트, 데이비드 베컴, 지드래곤 같은 스타들이 이 환상을 취한다. 얼마전부터는 007 제임스본드 마저 '브리오니' 대신 '톰포드'를 입는다. 본드야말로 환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인물이니까.
과거를 재해석한 '제품'과 화끈한 '환상'이 만나 '톰포드다움'을 이룬다. '다움'을 지켜나가는데도 열심이다. 톰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yes' 혹은 'no'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톰포드다운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작업이다. 갈수록 브랜드는 또렷해진다. 차별화는 절로 이루어진다.
톰포드를 경험하는 것
그날 톰포드 매장 앞에는 흰색 리무진이 주차되어 있었다. 매장 안에서는 백발의 중년 부부가 수행원들을 대동한채 수트를 고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영화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톰포드를 입는구나.'
유니클로와 정반대의 포지션이다. 유니클로의 슬로건은 '모든 사람을 위한 옷(Made for All)'이다. 톰포드의 고객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Somebody who has everything)' 이다. 그들만의 리그이다. 매장에서 가격표를 확인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수트 한 벌이 5,000달러를 예사로 넘긴다. 톰포드는 애써 변명하지 않는다. "비쌀만하니까 비싼거에요" 그러면서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데 집중한다.
매장에서는 톰포드의 분신 같은 직원이 고객을 맞는다. 저녁 6시 이후에는 예약 손님 외에는 매장의 출입을 통제한다. 단골 고객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프라이빗 서비스에도 정성을 쏟는다.
여성복 라인을 런칭할 때는 패션쇼 대신 VVIP 고객 100명을 초대했다. 톰포드가 직접 나서서 자신이 만든 옷 하나하나를 프리젠테이션 했다. 톰포드의 뮤즈인 '줄리언 무어', '비욘세'가 모델로 등장했다. 이런식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준다. (돈 있는)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의지는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하다.
흥미로운 건, 톰포드의 '복음'은 보통의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전파된다. 톰포드 매출의 상당부분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향수’와 ‘아이웨어’에서 나온다. (톰포드가 가장 먼저 내놓은 제품도 의류가 아니라 이 두 아이템이었다. 마진은 상상을 초월한다.) 명품 회사들이 흔히 쓰는 전략이다. 초고가 제품과 만만한 아이템을 함께 구성한다. 톰포드의 경우 이 갭이 유독 크다.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T자 로고'가 박힌 안경을 쓴 이는 상당수다. 하지만 톰포드 수트를 입은 사람과 마주친 기억은 거의 없다. 자라를 입으면서 안경은 톰포드를 걸친다. 가성비 좋은 톰포드를 누린다. 톰포드 왕국은 날로 확장된다.
세일즈의 기술
"톰포드는 말하는 법까지 훈련받은 사람 같아"
지인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톰포드가 출연한 영상을 볼 때면 표정, 시선, 제스쳐, 그리고 입을 오므리는 모양까지 완벽하게 훈련받은 세일즈맨을 만난다. 이 남자가 클래식을 판다. 섹스를 판다. 경험을 판다. 그리고 톰포드를 판다 . 아주 잘 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