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블루보틀
“누가 요즘 매장을 잘 보이는데 내니? 촌스럽게”
어느 패션 잡지 편집장이 했다는 말에 무릎을 쳤다. 경험으로 아는바, 요새 ‘진짜배기'들은 모두 ‘숨겨져’ 있었다. 피렌체에서도, 뉴욕에서도, 도쿄에서도 그랬다. 번화한 상권이 아닌 구글맵을 찍고 ‘찾아가야’ 하는 곳, 도착하면 눈 밝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모노클샵, 슈프림, 마가렛 호웰, h beauty & youth 같은 스토어였다. 주변 일대를 힙한 무드로 두르는 매장이었다.
'블루보틀’ 아오야마 지점도 그랬다. '촌스러운' 대로변이 아닌, 골목 안쪽의 고즈넉한 장소였다. 소박한 간판을 내걸고 조용히 손님을 맞았다. 모두가 발품을 팔아 이곳까지 찾아왔다. 줄을 섰다. 고객 중에는 유난히 한국인들이 많았다.
제임스 프리먼
2001년부터 커피는 업이 되었다. 한때는 교향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에 미친 인간이었다. 비행기 기내에서도 커피를 내려 마시는 부류였다. 단원들 중 그에게서 커피 한잔 대접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스타벅스가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의 생각에 스타벅스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탁월함과도 거리가 있었다. ‘진짜’ 좋은 커피는 따로 있었다. 제대로 된 커피를 보여주겠어. 열정은 커리어를 바꾸고도 남았다. 제임스 프리먼 식의 “Good to Great” 였다.
시작은 미약했다. 주말마다 손수레를 끌고 벼룩시장에 나갔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로스팅 한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은 콩이었다. 60g의 커피를 저울에 달아 94도의 온도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다.
‘느린' 커피였다. 한잔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보상은 확실했다. 진짜 커피였다. 신세계였다. 입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임스에게는 훈장 같은 별명이 붙었다. '광적인 완벽주의자(Control Freak)'. 훗날 이 완벽주의자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담담히 밝혔다. “너무 단순한 대답이겠지만, 누구나 맛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전업은 성공적이었다.
타협하지 않아요
커피 맛은 70점이면 된다고 했다. 한때 국내에서 ‘커피왕’으로 불리던 사내였다. 그는 나머지 30점을 그 나름의 ‘트렌디한’ 인테리어와 유명모델 빨로 채우려 했다. 매장은 전국 각지에 바퀴벌레처럼 퍼져나갔다. 당시 이 나라의 카페문화 수준이 그 정도였다. 결국 마케팅으로 승승장구하던 브랜드가 몰락하는 데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커피왕의 말년은 더 비참했다.
블루보틀은 정반대다. 커피는 일종의 신앙이다. 알파요 오메가다.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이다. ‘커피’에 관해서는 타협이 없다. 행동으로 증명한다.
2017년 원두 도매 사업을 접었다. 블루보틀의 원두를 다른 커피숍에 공급하는 비지니스였다. 최종 결과물을 담보할 수 없었다. 허접한 커피를 내놓으면서 "블루보틀에서 만든 원두를 사용했습니다" 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중요한 수익원을 내려놓았다.
성장의 속도를 조절한다. 매장을 수백 개쯤 내는 건 일도 아닌 브랜드다. 그럼에도 최상의 커피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알아볼 고객이 있는 곳에만 블루보틀의 명패를 내건다. 아직까지 미국과 일본에서만 블루보틀을 만날 수 있다. 쉰두 개의 직영매장 뿐이다. 일본을 택한 이유는 명료하다. 커피를 대하는 문화가 남 다르기 때문이다. 무얼 하더라도 끝을 보는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이 블루보틀의 그것과 맞았다. 창업자가 바리스타 면접까지 챙기는 건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블루보틀의 디자인
“예뻐야되, 뭐든지 예쁜게 좋아”
블루보틀을 보면 금자씨의 말이 떠오른다. 좋은 커피도 예뻐야 '좋아 보인다.’ 예뻐야 ‘팔린다.' 블루보틀의 디자인도 일단 ‘예쁘다’. 터쿼즈(turquoise) 컬러의 병 로고가 열 일을 한다. 블루보틀이 출시하는 커피 원두, 머그잔, 핸드 드립 기구, 에코백에까지 예쁨이 박힌다. JP모건의 카미요 그레코 대표는 “블루보틀을 가는 건 단순히 카페에 가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도 이곳 스튜디오에서는 쉴새 없이 카메라 셔터가 터진다. 예쁨이 담긴다. 고급스런 '취향'이 되어 인스타그램에 올라간다.
블루보틀에게 '디자인'의 의미는 광의적이다. 예뻐야 하는 건 기본이다. 디자인은 ‘문제의 해결’이다. ‘메시지’다. ‘제안’이다. 블루보틀 매장을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매장은 ‘커피를 즐기는 장소’로 ‘디자인’ 된다. 의자와 테이블은 휑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여유롭게 배치된다. 인구밀도 높은 도쿄에서는 드문 공간이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다. 대신, 이곳에 충전용 콘센트는 없다.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다. 노트북을 켜놓고 내일 있을 중간고사를 준비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블루보틀에서는 커피에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무언의 메시지다. 디자인이다.
제안도 ‘디자인’한다. 블루보틀 메뉴의 수는 단출하다. 커피의 사이즈는 하나뿐이다. 전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우리가 잘하는 것만 제대로 만들어서 드릴게요.”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사이즈는 이거 하나에요.” 확신이 그득한 제안이다. 전문가의 자신감이다. 고객의 신뢰는 자연스럽다. 블루보틀은 인생커피가 된다. 디자인의 힘이다.
전환점
2017년 9월은 블루보틀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다국적 식품기업 네슬레가 블루보틀의 지분 68%를 4억2500만달러(약 4800억원)에 인수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마저도 네슬레가 적극적으로 매달려 얻어낸 결과였다. 그만큼 네슬레 쪽이 절박했다. 매년 급격히 성장중인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 네슬레의 자리는 없었다. 네슬레의 `네스프레소` `네스카페` 모두 인스턴트 커피 시장의 플레이어였다.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블루보틀과 함께면 뭐든 해볼 수 있겠다. 결국, 네슬레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스타벅스
이 순간 가장 긴장하는 건 스타벅스다. 지난 20년 간 전세계 커피시장을 독점해온 챔피언이다. 이렇다 할 적수가 없던 판에 네슬레를 등에 업은 신성이 출현했다. 프리미엄 시장을 잡는 쪽이 다음 시대의 챔피언이 된다.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나섰다. ‘고급 커피 바’ 형태의 리저브바 사업에 힘을 쏟는다. 앞으로 수백 개의 리저브 매장을 내고, 미국과 중국 등에 플래그십 로스터리 매장을 낸다는 계획이다. 전쟁의 서막이다.
언론이 이런 ‘꺼리’를 놓칠 리 없다. 뉴욕타임즈는 "스타벅스가 마이크로소프트라면 블루보틀은 커피업계 애플"이라고 했다. 자극적이다. 싸움을 붙이려 안달이다. 그러나 두 브랜드 간의 승부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게임이 아닐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될 공산이 크다. 경영학자 톰피터스의 말마따나 ‘훌륭한 경쟁자보다 더 큰 축복은 없으니까’. 업계의 두 고수는 서로를 의식하며 보고 배울 것이다. 업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시장은 커질 것이다. 다른 브랜드가 아닌 스타벅스와 블루보틀 간의 경쟁이어서 그렇다.
에티튜드
블루보틀을 향한 합당한 의심도 존재한다. 전세계로 확장하면서도 커피의 퀄리티를 지킬 수 있을까. 제임스 프리먼의 뜨거움은 신참 바리스타에까지 미칠까. 블루보틀은 계속 '러브 브랜드'로 남을 수 있을까. (네슬레의 인수 소식이 전해진 후 브랜드의 ‘영혼’을 팔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블루보틀의 미래를 낙관하는 건 지금까지 이 브랜드가 보여준 ‘에티튜드’ 때문이다. 커피에 관해서라면 블루보틀은 지금껏 타협을 몰랐으니까. 집착에 가까운 에티튜드가 지금의 블루보틀을 만들었으니까.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었으니까.
사람도 브랜드도 에티튜드가 전부인건 매한가지다. 이 부분이 굳건하다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이다. '고객의 인정'도 마찬가지이고. 결국, 에티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