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마지 않았다
<자기 앞의 생>. 학교도 다니지 않는 열몇 살 짜리 어린아이가 화자인 것치고 제법 어울리지 않는 제목 아닌가. 처음 책을 집었을 때는 한참 허리춤에 맞지 않는 바지를 끌어올리고 풋풋하게 고뇌하는 아이를 떠올렸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완벽히 잘못짚었음을 깨달았다. 그 아이가 생을 대하는 자세는 나의 그것보다 더욱 뚜렷하고 열렬했으며, 종래에 나는 한없이 부끄럼을 느꼈다.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
열 살짜리 어린아이 모모는 맡겨진 아이들을 돌보는 로자 아줌마 손에 자랐다. 그가 여섯 살 남짓 되었을 때는 종종 시장에 나가서 여자 주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의 과일 따위를 훔치곤 했다. 엄마와 비슷한 나잇대의 가게 주인으로부터 따귀를 흠씬 맞은 뒤, 길바닥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나면 저를 보는 시선 중 어딘가에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는 어느 가게에서 달걀 하나를 훔쳤는데, 그곳 여주인은 다른 주인들과 달리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모모는 도리어 경계하며 빨리 한 대 갈겨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가 도리어 달걀 하나를 더 쥐여주며 뺨에 뽀뽀를 해주는 순간, 아이는 오전 내내 가게 앞에 멍하니 서서 ‘내 생이 모두 거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녀가 모모의 엄마에 대한 비뚜름한 그리움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모에게 그 입맞춤은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섯 살 배기라면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겨우 맛본 아이가 논하는 생은, 그래서 더욱 절절했다.
사실 이 책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은 비단 모모뿐이 아니다. 애초에 모모가 사는 칠 층짜리 아파트는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사는 터전이었다. 모모를 키운 로자 아줌마는 한때 잘 나가는 창녀였지만, 잔뜩 늙고 살이 찌면서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갇혀 몸과 마음에 병을 얻은 피해자이기도 했다.
자식들을 합법적으로 키우기 여의치 않았던 창녀들은 이 아파트를 찾아왔고, 모모와 함께 사는 어린아이들은 죄다 부모를 모른 채 그녀의 손에서 오밀조밀 자랐다. 한참 아래층에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차별을 받는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고, 모모에게는 멋있지만 사회적 시선이 따가운 성전환자도 찾아왔다. 모두 프랑스 사회의 사각지대에 머무른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기꺼이 사랑하는 아이
이렇게 나열하면 마치 변두리에 밀려나 각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묘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이 책에서 이들은 서로 보듬고 기꺼이 사랑한다. 로자 아줌마는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과거 트라우마에 허덕이고 버거워하면서도 그들을 끔찍이 여겼다. 병든 그녀를 위해 이민자들은 되도 않는 불 뿜기 묘기를 하면서까지 정신을 차리도록 노력했고, 더는 계단을 내려갈 수 없을 때 모두가 합심해서 그녀를 업어 날랐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늙고 병든 가여운 여자를 모모만큼 절절하게 사랑할 순 없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에 대한 연민과 아낌없는 사랑은 후반부에 쓰인 모모의 독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사람들은 창녀들이 젊었을 때는 성가시게 쫓아다니지만 일단 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젊은 창녀에게는 포주가 있지만 늙은 창녀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만 맡고 싶다.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는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들을 보살피고 평등하게 대해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
어린애가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퍽 거친 사회의 반영에 입맛이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처럼 먹먹하게 잘 드러날 수도 없다는 것에 전율을 느낀다. 그녀의 못생김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할 때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아껴주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지 새삼 깨닫게 한다. 삶에서 누군가를 이처럼 치열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열네 살짜리 아이 앞에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노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웠다.
초반에 모모는 아래층 할아버지에게 사랑 없이 살 수 있느냐고 묻고, 할아버지는 슬프지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후의 모모는 ‘사랑해야 한다’는 한 마디로 이야기를 마친다. 그 아이는 앞으로 펼쳐질 생에서 어떤 결핍과 소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기꺼이 사랑하며 자라날 것이다. 삶이 그토록 팍팍하더라도, 노란빛 파스텔 톤으로 그려지는 삽화가 이야기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듯 말이다.
혹자는 낙관적인 시선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제 삶 살기 버거운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말랑한 단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겠느냐고. 그러나 이들의 생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이토록 헌신적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나와 당신은 이미 수많은 핑계를 대며 기꺼이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나. 우리는 누구든 서로의 구석을 아껴주며 위로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에, 각자 삶의 이유가 되고 이토록 치열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우리는 실로 사랑해야 한다.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