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에 꽃향기 가득 머물기를...
진료실에 80대의 여자 환자분과 50대쯤으로 보이는 따님이 함께 들어오셨다. 유난히 피부가 밝고 고운 80대의 환자분은 백발의 짧은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보호자로 오신 따님은 아담한 키에 경쾌한 눈빛을 소유한 분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지만, 호감이 가는 두 사람이었다.
환자분은 아픈 곳이 많았다. 대상포진 후 신경통이 심했고, 관절통도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신장의 기능도 떨어져서 약을 처방하는 데에 있어서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분이었다. 의사는 내과적인 질환을 다룰 때에 결국엔 약 처방을 해서 질환을 조절하거나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분이 어떤 약에 알레르기반응이 있는지, 혹시 복용하지 못하는 약은 없는지 꼭 확인을 한다. 이 어르신은 알약을 복용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알약 하나를 삼키는 일이 너무 힘든 일이라고 하셨다. 시럽이 가장 좋고, 가루약은 싫지만 그래도 알약보다는 낫다고 하셨다. 그래서 약을 갈아서 드실 수 있는 걸로 처방해 드려야 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는 눈을 꼭 감고 참고 삼키신다고는 하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셨다. 약 복용에 어려움이 있으신 분이라 대상포진 후 신경통에 대해서 패치를 좀 드리려고 했더니 패치를 부치면 피부에 말썽이 생겨 견뎌내질 못한다고 하신다. 패치도 거부.
처방할 수 있는 약물의 범위가 좁아지고, 효과가 덜한 약을 처방하게 되면 환자분의 증상 호전도 적어지니 의사로서는 난감한 마음이다. 최대한 맞춰서 처방하는 일이 최선이다. 약을 어떻게 처방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다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따님도 옆에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엄마는 나이 드는 게 아직도 짜증이 나는 것 같아요. 몸이 점점 힘들어지니 더 그러신 것 같아요."
이제 화두는 '나이 듦'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젊은 시절 생각하시다가 지금의 몸 상태와 상황을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 드시는 것 같다. '나이 듦'이라는 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르신의 그 나이의 삶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이라 다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짐작은 되었다. 내 몸이 내 맘처럼 움직여지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성치 않게 아픈 건 얼마나 힘들고 속상한 일일까. 어르신은 '짜증'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셨지만, 그건 아주 복합적인 감정들이 내포된 것임에 틀림없다.
좋아하는 게 있으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가며 어르신의 힘든 마음에 내 마음을 담갔다가 질문을 해보았다. 어떤 일을 하시면 기분이 좋은지, 혹시 생각하면 행복해지는 일이 있으신지 여쭈었다. 처음엔 그런 거 없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드시더니 얼마 후 어르신은 답을 하셨다. "꽃. 꽃을 좋아하지."
이후로도 몇 분간을 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따님도 적극 동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은 꽃을 가까이 두는 걸 무척 좋아하시지만, 꽃을 잘 가꾸지는 못하셔서 키우다 보면 쉬이 시들어버리곤 해서 더는 키우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따님들이 그동안 사다 드렸던 많은 화분들도 이젠 치우셨고 더는 화분을 들이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나는 오늘 따님과 함께 나오셨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산책도 좀 하시면서 큰 마트나 화원에 들러 작은 꽃 화분을 하나 꼭 사가지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다. 망설이듯 그러마 하고 대답하시는 어르신의 마음에 신선한 공기방울이 퐁 터진 것 같았다.
나는 종종 삶을 '정원을 가꾸는 일'에 비유해서 생각한다. 수시로 잡초가 올라오면 없애주고, 벌레가 생겨 병들진 않는지 돌아봐 주고, 때에 따라 물도 주고 빛이 잘 드는지도 살펴야 하는 일이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하루하루 조금씩 돌아보고 살피고 아껴주며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우리가 삶에 해주어야 할 일이다.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일은 나의 내면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다. 외적인 일이 아니니, 조금씩 좋아지는 것도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나빠지는 것도 모르고 지내기 쉽다. 하지만 매일 마음의 정원을 돌보지 않으면 어느샌가 커다란 분노와 짜증이 나를 사로잡게 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우울감이나 불안감에 눌릴 수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문득 지치고 힘들어진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음악을 들려주는 일,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눕는 나에게 '이만하면 오늘도 꽤 잘 살았어. 푹 쉬자.'라고 다독거리는 일이 마음의 정원을 돌보는 일이다. 화나고 속상한 나 자신에게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주고 '힘들었겠다'라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도 좋다. 가슴이 답답하고 훌쩍 떠나고 싶은 날에는 내가 좋아했던 곳으로 발걸음 옮기는 것도 좋다. 누가 물어봐 주지 않더라도, 나의 안녕을 물어봐 주는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몇 주 후 여름의 시작 즈음에 다시 내원하신 어르신과 보호자 따님은 알록달록 곱고 얇은 여름 옷을 입고 오셨다. 여전히 사뿐사뿐 걸으시는 따님의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소녀처럼 예쁘게 어울렸다. 내 첫 질문은 "예쁜 꽃 화분 하나 사가지고 가셨어요?"였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어르신의 눈매가 부드러웠다. 부디 어르신에게 전보다 더 생기 있고 즐거운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