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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신화는 계속된다

『한국이 싫어서』 속 개인의 신자유주의적 행복론을 중심으로

 『한국이 싫어서』는 ‘헬조선 담론’이 직접적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담보하고 있는 것은 ‘헬조선 담론’뿐만이 아니다. 그것과 대조되는 듯하면서도 비슷한 성격의 담론 역시 존재한다. “조금만 돈이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어.”(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2015, 140쪽. (이후 본문 인용시 쪽수만 표기)) 호주로 이주하려는 계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은, 한국에서 살기 좋다고 느끼는 ‘역치’를 돈으로 제시한다. 그러한 발언은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의 복잡성을 지극히 단순화한다. 그 말을 이해하기는, 그리고 수용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 말이 지명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되지만 사실은 이미 사회에 보편적인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두고 ‘유전(有錢)행복’ 담론이라고 이름 지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 바꿔 말하면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헬조선 담론과 대치하는 듯 보이는 이 담론이 사실은 헬조선 담론과 같은 궤도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헬조선’을 외치며 떠났던 이들이나, ‘유전행복’을 믿으며 한국에 남는 이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듯하지만 연속적인 위계의 일부에 해당하는 구도들이 등장한다. 첫째로 ‘명문대’ vs ‘인서울’, ‘인서울’ vs ‘지방대’와 같은 학벌주의. 계나는 본인이 명문대생이 아니라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명문대생과 자신을 비교하지만, 막상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호주에 왔다는 재인이 스스로를 지방대생이라고 밝히자 본인은 홍대생이라면서 선을 그어 버린다.(42) 둘째로 ‘백인’ vs ‘한국인’, ‘한국인’ vs ‘동남아인’으로 나타나는 국적 및 지역 차별을 꼽을 수 있다. 소설에는 호주 내 한국인의 위상을 한국 내 동남아인의 위상과 비교하는 대목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밖에도 남성과 여성, 한국과 호주, 교민과 워홀 등 상하 구분이 가능한 여러 위계가 등장하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은 꼬리에 꼬리 물기 형식을 띨 뿐 결국은 헬조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귀결된다. 한국이 싫어서 물리적으로 탈출했던 계나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탈출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가 한국의 현상을 주관적인 시각에서 탈피해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 것은 호주로의 이주 이후부터, 즉 한국 거주자로서의 당사자가 아니게 된 시점부터였다. 재인이 지방대 출신이라며 내심 자기 밑이라 여겼던 계나가 소설 마지막 무렵에는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도 안 해 주고, 인서울 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182) 이렇게 말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자신을 설득하려는 지명을 향해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58) 라고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국 사회를 떠나겠다는 마음이 더 쉽게 드는 사람은 있어도, 위계질서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없다는 진실을 깨우친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경쟁 구도에서 빠져나와 국외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이후에야 계나는 나름의 객관성을 갖추게 되었다.


 계나는 심지어 결말에 다다라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의 답변도 깨우친 듯하다. 그는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을 구분하며 자신에게는 자산성 행복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한데, 한국에서는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다며 한국이 싫었던 이유를 규명하기도 한다.(180) 그것은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지 않은가?’ 하는 회의적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으로 느껴질 정도다. 호주에서는 그래도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는 것이 보다 쉽게 가능하다는. 그러나 ‘자산성’, ‘현금흐름성’ 등 경제용어를 인용한 이 표현들에서는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행복’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실질적 경제 어휘가 달라붙은 데에서 오는 위화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이 표현해낼 수 있는 ‘행복’이라는 점에서 핍진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능력을 전제한 행복이라는 점에서 서글프다. 자산성 행복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결국은 능력을 가져야만 누릴 수 있다는 특권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나의 말에 따르면 자산성 행복이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180) 거다. 그러나 한국에서 ‘성취’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사회가 금리를 높게 쳐주는 ‘성취’란 그리 다양하지 못하고, 기본적으로 개인의 능력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종류의 성취만을 가리킨다.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은 사람의 예시로 지명이가 호명되지만 실제 지명이의 삶의 모습을 보라. 정말 행복 자산의 이자가 높아서 그는 기자 생활의 그 모든 불합리함을 감수하는가?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성취감이라는 자산의 금리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금리 변동조차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 느껴진다. 지명과 같은 사람들이 지쳐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만큼 노력해서’ 얻어냈는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둥 부러움과 질투, 염려가 섞인 시선이 그를 향할 것이다. 그러니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181) 이유는 체감 금리가 커서가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금리가 크기 때문이다.


 반면 현금흐름성 행복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180) 종류의 행복을 의미한다. 미래보다는 현재를 사는 데에서 오는 행복. 그러나 그조차도 막상 생각해보면, 현재를 누릴 만큼의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성립하지 않는다. 익스트림 스포츠든 뭐든 마음껏 즐기려면 비용이 필요하고, 그러한 비용을 벌어들일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현금흐름성 행복’이라는 개념에 숨겨진 맥락을 덧붙여 설명하자면, ‘그때그때 충분히 밥 벌어 먹을 능력이 있어서, 마음껏 ‘순간’을 소비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계나의 말처럼 한국에서는 ‘매일 한 끼만 먹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181)일 정도로 순간을 즐기는 데 필요한 능력의 정도가 과했다. 그러나 호주에서도 그 요구 수준이 낮았을 뿐, ‘능력’ 없이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에게 개인을 책임질 능력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나가 이야기하는 자산성, 현금흐름성 행복론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통해 도출된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이론이다.


 한국을 떠나 수년간의 자기계발을 거쳐 마침내 호주 시민권을 따는 데에 ‘성공’한 계나는 한국에 잔류하고자 하는 자매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나와 함께 호주 시민이 된 재인도 마찬가지다. 한국을 떠나도록 종용했던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국외자가 된 계나와 재인으로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을 받는 쪽은 잔류한 한국인들이다. 물론 이러한 시선이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식의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미 사회에는 변화의 여지가 없으니 개인이라도 변해야 한다는 발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한국은 바꿀 수 없으니 차라리 떠나기라도 해야 한다.’라는 걸 깨우친 무력한 개인이, 여전히 한국에서 골골대는 또 다른 한국인에게 내미는 차선책인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껏 들어봤으면, 떠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계나도 돌이켜보면 몇 년에 걸쳐 노동과 계발을 통해서야만 시민권을 겨우 따낼 수 있었다. 시험에 통과를 못해서 시민권을 따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던가. 잔류한 한국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한국을 떠나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경쟁에 맞닥뜨리기가 두려운 것이리라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현금흐름성 행복뿐만이 아니라 자산성 행복조차 누리기 힘든 혜나와 예나는가 호주로 떠난다고 해서 계나와 같은 만족감을 누릴 수 있을까. 그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어쩌면 계나가 그리 호기롭게 호주로 오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성취 경험이라는 자산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왜 행복을 좇지 않느냐’며 호주에서는 행복을 찾기가 더 쉽다고 자매들에게 설파했을 계나의 모습은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위계질서에 대한 객관적 판단력을 담보로 당사자성을 잃어버린 계나는, 위계질서를 ‘타파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대신에 위계질서로부터 ‘벗어날’ 능력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 정착한 것이 계나가 성취한 경험이고, 일종의 자산성 행복이다. 그러한 성취 경험을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모습은 한국사회의 기성세대와도 닮아있다.


 계나의 탈출은 보기에 따라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한국이 요구하는 규범으로부터 과감히 탈출하고, 자기 주체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계나가 자신을 비유하는 데 사용한 ‘파블로’ 역시 ‘펭귄은 추운 곳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규범에 저항해 자기 스스로 따뜻한 보금자리를 차지한 캐릭터다. 그렇게 급진적 성취를 이룬 자아가 여전히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며 남아 있는 다른 펭귄들을 향해 ‘너도 호주로 와,’ 하고 몇 번이고 호주로 오기를 권하는 장면에서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저항적이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는 모습(한우리,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 퀴어리버럴리즘과 한국 퀴어시민의 위치성」, 『말과 활』, 12호, 일곱번째숲, 2017, 72쪽)이 드러난다. 만약 집안 경제가 휘청거려 어쩔 수 없이 계나가 모아둔 2천만 원을 부모님께 드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계나는 탈출할 수 있었을까? 계나는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만을 고려할 뿐, 탈출할 수 없는 맥락은 배제한 채 이야기함으로써 신자유주의라는 규범에 귀속되었다.


 계나의 탈출은 분명 한국이 요구하는 잣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계나 자신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허용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한국이 싫어서』는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체계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개인이 행복에 관해 발화하는 이야기로 수렴한다. 이쯤에서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형식인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왜 장강명 작가는 철저히 계나의 입장에서 계나가 말하는 방식을 차용했을까? 아마도 “난 이제 진짜 행복해질 거야.”(184) 라고 다짐하는 말이 남기는, ‘정말 그렇게 될까?’ 라는 독자의 회의적 의문까지가 작가가 완성하고자 했던 소설의 일부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계나는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의 분신이 아니라, 장강명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한 유연한 시민권은 자기계발의 주체에게만 부여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이다.(한우리, 위의 글, 85쪽) 또한, 우리는 글로벌 공동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노력만 하면 다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계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민을 목표하게 했고, 실제로 달성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 싫어서’ 떠났겠지만 자기계발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이어나가야만 타국에서의 정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작동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이 꿈꾸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적 행복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쉬운 곳-정확히 쉽다고 믿어지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계발한다. 그렇게 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자기계발 신화를 생산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타자화한다. 따라서 계나가 보여준 것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자아 주체성의 실현의 과정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성공기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 안에 안착해낸 것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계나의 곁에 있다.


※이 글은 오혜진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1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현대소설의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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