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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잃어버린 킹메이커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다. 흔히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르는 그 친구를 만날 때면, 늘 아주 편하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일적으로 만난 사이가 아닌 데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격의 없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서로 오해하고 다투는 시기도 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고 보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 비록 하는 일은 다르지만 서로 이해할만한 범위 안에서 삶의 동반자로서 계속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 친구와 나는 사실 무척 다르다. 13살 즈음 만났던 친구는 활발했고 손재주가 있어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잘 다루었다. 반면 나는 수줍고 조용한 아이였고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우연히 짝이 된 그 친구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계속 친한 친구로 남을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성격은 완전히 달랐고, 서로 학교도 멀어지면서 끊어질 것만 같은 관계는 취업을 한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말다툼하고 서로 연락하기 싫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연락하게 되었다. 그런 순간들마다 우리 둘은 친구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A라고 말하면 그 이야기의 숨은 B를 이해하고 그것을 끄집어내는 친구가 참 놀라울 때가 있다.
영화 <킹메이커> 속의 김운범(설경구)과 서창대(이선균)는 사실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운범이 이기더라도 지켜야 할 선을 지키며 가야 하는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라면 창대는 이겨야만 그들이 가진 이상을 이룰 수 있고, 이기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기는 길을 가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참 다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에 서로에게 끌리는 어떤 힘이 보인다. 처음 창대를 본 운범은 앉아있다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다. 결국 창대와 같이 일하게 된 운범은 그의 말을 듣고 선거를 이긴다. 이 몇 번의 승리는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각자 발견한 덕일 것이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들은 상대방이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점을 끄집어냈다. 그들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건 둘의 관계를 아주 가깝게 만들었다.
이들이 정치라는 영역에서 관계가 맺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완전히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졌던 두 사람은 사석에서는 이러쿵저러쿵 싸웠어도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삶의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정치는 일반적인 커리어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각자의 관계도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아무리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여도 결국 정치적인 영향력이 고려되는, '차가운' 영역이다. 친구도, 가족도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영화의 말미,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이 한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는 장면은 서로에 대한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차있다. 특히나 운범이 환하게 웃으며 창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향한 반가움과 이제 볼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아쉬움이 묻어나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얼마 전에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 여전히 말이 많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였지만 한 편으론 나이 듦도 느껴졌다. 정치적인 성향조차 다른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떠올랐다. 내가 정치라는 영역에 있었다면 이 친구를 이대로 만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 친구가 하는 여러 가지 날카로운 말들은 비수가 되어 응어리로 남았을 것이다. 서로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르기에 할 수 없이 발길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의 만남 뒤에는 더 이상 친한 친구가 아니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정치란 관계조차 바꾸는 것이다.
영화 속 두 사람이 기쁨의 포옹을 할 때, 그들의 충만했던 우정이 그립다. 나와 친구는 여전히 서로의 삶에 조언을 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각자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해도 정치를 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한다고 하더라도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고 싶다. 모든 것은 상상 속의 일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것 같다. 영화 속 결국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각자가 가진 것을 잘 알았던 두 사람의 우정을 잃었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결국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운영했다. 다른 한 사람은 어디선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 번 정치인은 죽을 때까지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된 그에게도 끝까지 지킨 우정이 있었다고 믿고 싶다. 단지 정치적인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아마도 그의 아내가 그의 옆에 끝까지 남은 친구가 아니었을까. 그의 부인 역시 여러 가지 정치적 의견들을 간간히 이야기했지만 끝까지 그와 함께 했다. 운범은 친구로서의 창대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의 아내와는 끝까지 그 우정을 지켰다. 창대는 어디에선가 운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잠시나마 나눴던 진짜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 학교에서 믿을 건... 친구뿐
학교는 재미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수많은 또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다시 나오는 공간.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에 가서는 친구들과 수다 떨기보다는 조용히 자거나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딱딱하게 지어진 건물 안에서 닭장 안의 닭들처럼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던 학교. 학교는 가끔은 재미있었지만 때론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아주 지루한 공간이었다. 이건 한국의 학교에서 성장했던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각할 것 같다. '학교'하면 떠오르는 건,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지루함'이나 '무서움'의 공간이었다.
중학교 즈음에 '화이트 데이'라는 공포 게임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학교를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변화시킨 게임은 아무도 없는 학교라는 장소의 분위기를 매우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단지 악령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악령조차 등장하지 않을 때, 어두컴컴한 교실과 복도의 딱딱한 모습이 악령보다 더한 공포였다. 어쩌면 매번 그런 아주 딱딱한 학교라는 공간에 등교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는 공포스러운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는 왠지 따뜻한 공간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차갑고 두려운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학교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의 구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에 등장하는 학교의 모습에서도 그런 딱딱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외국 네티즌들의 반응 중 하나가 "학교의 구조가 뭔가 이상하다"였다. 이 말이 맞다. 그냥 봐도 구조가 이상하다. 마치 미로처럼. 처음 학교에 가면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다. 그래서 그 구조 안에 등장한 좀비를 피해 여기저기 다니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나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구조 자체에는 공감하게 된다.
드라마엔 다양한 친구들이 등장한다. 좀비 질병이 퍼지게 되면서 때론 친구를 죽여야 하고 변한 친구를 뒤로하고 가야 할 때가 생긴다. 시종일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장면들은 더 딱딱하고 무섭게 느껴진다. 학교의 구조 자체가 지옥이어서 이들이 피할 공간이 없다. 게다가 어른들 조차 구하러 오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이 상황을 타계해야 한다. 이 위기에서 그나마 기댈 곳은 바로 옆에 있는 친구들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이들은 스스로 무너져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을 준다. 그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생명줄과도 같다.
학창 시절에 나도 학교가 싫었다. 그 딱딱함이 싫었고 그 안에 벌어지는 많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농구하고 뛰노는 순간만큼은 좋아했다. 비록 딱딱한 건물 안에서 조용하게 학교를 다녔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수업을 들었던 순간도, 밥을 먹던 순간도 아니다. 친구와 함께 뛰어놀던 기억이 좋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한 반에 50명이 넘었던 그 당시는 어쩌면 대학을 가기 위해선 전쟁을 치워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뭘 배워도 기억에 남지 않았고, 그건 결국 학교 교육에 대한 혐오로 귀결되었다. 아직까지도 여전히 나는 학창 시절 받았던 모든 교육들이 과연 필요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내용이나 인물들의 관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여러 사회문제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면서 잔인함의 수위를 높였는데, 사실 이 드라마에서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건 친구들 간의 관계와 방향성인 것 같다. 이들이 느끼는 혼란과 감정은 바로 현실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회의 취업 전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때론 친구조차 밟고 가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사회. 나의 학창 시절 보다 더 어려워진 취업 시장은 그들에게 더 잔인하게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상은 좀비월드보다 더 잔인하게 느
그래도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해결책을 모색해 가는 과정이 좋았다. 가깝지 않지만 서로를 신뢰하고 어려움에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닐까. 몇몇 분위기를 흐리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 건 옆에 있는 친구뿐이다. 학교라는 딱딱한 공간, 그곳이 그나마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옆에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친구들 때문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내 옆에 남는 친구들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가장 친구의 숫자가 많았던 시기는 아마 대학교 때였던 것 같다.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던 터라 아주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처럼 조용히 있지 않고 부지런히 모임들에 참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조용하고 수줍게 앉아만 있던 나에게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또 들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마도 그때까지도 여전히 '아이'였던 나에게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모두가 친구가 되었을 때,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참았던 활동욕을 마음껏 펼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물론 내 생각에 부끄럽게 느껴지는 건 하지 못했다. 옆에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대범하게 무언가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더 대범해질 수 있었던 건, 내 주변에 있던 친구들 덕분이다. 그 친구들은 나를 변화시켰고 그들 덕분에 무사히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 친구들과 보낸 시간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잘 남아있다. 하지만 점점 그들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나는 고등학교 친구가 많이 없다. 가까운 한 명 정도를 제외하면 고등학교 친구들은 정말 별로 없다. 그래서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에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게 몰려다니며 놀았던 학창 시절 기억이 없기에 더욱 그런 이야기와는 거리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대학교 친구들이 좀 많은 편이었는데, 성별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느낌으로 치자면, 영화 <연애소설>에서의 친밀한 느낌이다. 물론 이 영화는 로맨스영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더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세 주인공들의 우정이었다.
지환(차태현), 경희(이은주), 수인(손예진)이 우연히 만나고 서로에게 끌려 가깝게 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우정이 보였다. 이들 중 누군가는 이성으로서 끌려서 행동하게 되지만 친구로서 세 명은 각자가 생각하는 우정을 지키면서 서로 약간의 거리감을 둔다. 사랑이라는 이성으로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덜어내더라도 세 명의 우정만큼은 지켜낸다. 결국 누군가가 아픈 상황을 직면하고, 누군가는 우정을 사랑으로 변환시키게 되지만 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웃고 떠드는 모습은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감정도 그와 다르진 않았다. 우정의 감정도, 사랑의 감정도 어느 정도는 섞여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계속 지속될 것만 같은 그 우정의 관계도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겠지만 연락 횟수도, 만남의 횟수도 줄어든다. 늘 명절 때면 먼저 안부를 묻고는 했지만 나 자신조차도 이제 안부를 먼저 묻지 않게 된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어쩌면 각자가 모두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되어 조금씩 먼 관계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연락이 뜸해져도 남는 친구들이 있다. 카톡을 남기면 2-3일 지나서야 답을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기는 친구들은 그래도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진다. 각자가 가진 의견들을 주고받지만, 직접 만나지 못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진다. 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짧은 말이 "코로나 끝나면 밥 한 번 먹자!"로 바뀐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남을 친구들은 여전히 곁에 남아있지만 거리 상으로 꽤 멀리 살고 있는 그들을 한 번 만나기가 쉽지는 않다.
영화 <연애소설>의 우정이 어떤 순간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우정도 계속되길 빈다. 단절의 시대, 몸이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계속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위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안도하게 만든다.
"그래. 괜찮아. 그래도 내 옆에 남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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