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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편

#5

by 레빗구미


비 오는 날 엄마를 기다리며


초등학교 2학년 때,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 창문 밖을 봤는데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점점 장대비로 변했다. 그렇게 비가 오는 모습을 보다 보니 어느덧 학교 마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교문에는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나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한 날이었다. 그래서 수업 중에 자꾸만 창문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혹시 어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을까. 아직 오지 않았지만 지금 오고 있는 길이 아닐까. 그렇게 자꾸만 창밖을 보던 2학년의 비 오는 날은 왠지 모르지만 아주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날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다른 일이 바쁘셨던 어머니는 미처 우산을 들고 학교로 오실 생각을 못하셨다. 아마 나에게는 그것이 꽤나 기대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부모의 마음이란 날씨하나가 바뀌어도 밖에 나가있는 자식 걱정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비 오는 날, 나는 비록 비를 쫄딱 맞고 집에 돌아갔지만 감기 걸릴까 걱정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지금은 이제 내가 밖에 나간 딸아이를 걱정하는 시기가 되었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고, 대부분 이야기되는 건 아이들의 문제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떠올랐던 건, 부모님의 이야기들이다. 청산이 엄마와 온조 아빠의 이야기다. 사실 큰 비중이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지만 중심인물이 걱정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한다. 단지 자신의 아들이 걱정돼서 학교로 향하는 청산이 엄마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뉴스를 보고서는 바로 학교로 향한다. 그곳이 위험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아들이 '안전하지 않다'라는 걱정이 온몸을 지배한다. 온조 아빠도 마찬가지다. 소방대원인 그는 자신의 역할대로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후 딸을 찾아 나선다. 그저 딸이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걱정이 온몸을 지배한다. 두 사람의 선택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그런 행동들이 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의 아이가 위험하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무조건 아이에게 먼저 향할 것이다. 그건 단지 감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이 가장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부모도 아이를 그냥 위험 속에 머무르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감정적인 판단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 드라마의 카메라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부분이다.


온조의 아빠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다시 딸을 보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으니까. 어떤 부모는 도저히 올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수 있다. 학교에서 아빠가 올 거라고 믿는 온조를 보면서 초등학교 때 창밖을 보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가 올 거라고, 당연히 올 거라고 믿었던 그때. 결국 아무도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아 온몸이 비로 흠뻑 젖었던 그때. 무척이나 서러웠고 아쉬웠다. 지금이야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 꽤나 아쉬웠던 기억이었다.


그때가 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아마 학교 앞은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부모님들로 인산인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뛰어오게 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니까. 온조의 아빠도 산을 구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며 결국 딸을 찾는다. 그렇게 딸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본인을 희생한다. 왠지 모르게 그 마지막 모습에서 안도감을 본다. 조금이라도 험한 세상을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마음. 이제 더 이상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작은 안도감.


사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그저 안타깝게 바라보다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서서 도움을 준다. 앞으로 수많은 걸림돌과 어려움을 만날 아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그 과정을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걱정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금도 아이가 아프거나,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으면 바쁜 일을 내려놓고 바로 아이에게 달려가는 나의 모습에서 온조 아빠의 모습을 본다. 온조를 찾아 포기하지 않고 학교로 가는 모습은 꽤나 멋있어 보였고, 그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투영해 보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엄마를 기다리던 나는, 이제는 아이가 기다리면 달려갈 부모가 되었다. 언젠가는 아이가 섭섭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라도 그곳으로 바로 달려가는 청산이 엄마나 온조 아빠처럼 그런 부모의 모습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 그렇게 나도 부모가 되어간다.






어색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의 관계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는 어려웠고, 어른이 된 지금도 가까워지기는 어렵다. 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고 간단한 안부를 묻는 정도다. 같은 세대의 부자 관계는 아마도 거의 비슷할 거라 생각되지만 나와 아버지는 조금 더 거리감이 있는 관계라고 느껴진다. 어찌 보면 가깝지만 침묵이 이어지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화가 5분 이상 계속 이어진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버지는 인터넷이나 컴퓨터가 잘 되지 않을 때, 나를 찾으신다. 따로 살고 있지만 내가 갈 때를 기다렸다가 나를 보고서야 이런 저럼 문의를 하신다. 그럼 아버지의 자리로 가 조용히 살펴보고 해결 방법을 알려드린다.


과거의 아버지는 권위가 있었다. 확실히 나에겐 무서운 존재였고, 함부로 말을 붙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한때,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아침마다 조깅하는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 아니 추천을 넘어 강제로 일어나자마자 동네를 뛰게 했다. 당연히 엄청나게 뛰는 것을 싫어했다. 때론 도망도 가고 반항도 했지만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침 조깅은 계속되었다. 아마 그때가 처음 아버지와 정면으로 의견이 달랐던 순간일 것 같다. 아버지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 꾸준한 관리 방법을 직접 지도한 것이고, 나는 다른 무엇보다 더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교육과 나의 욕구가 충돌한 것이다.


영화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의 주인공인 옥스퍼드(랄프 파인즈)와 콘래드(해리스 디킨슨)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들의 관계는 매우 좋지만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콘래드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길 원하지만 이미 전쟁을 경험해 본 옥스퍼드는 그 전쟁에 나가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할 아들을 걱정해 그 의견에 반대한다. 그래서 이들은 여러 번 논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논쟁을 지켜보다 보면 결국 누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밀어붙일지 눈에 보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나의 경우도 그 당시, 한 동안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할 수 없었지만 한 달, 두 달, 여러 해가 지나면서 결국에는 나의 생각대로 하게 되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조깅을 하지 않았고 그것을 하는 행위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조금은 남아있다. 콘래드도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야 만다. 그것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결국에는 아버지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이들의 관계가 가까웠기에 편지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가 항상 강조했던 '운동'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내가 무언가 운동을 하려 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잡아끈다.


지금도 그 반감은 여전하지만 아버지가 예전부터 강조했던 '운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머니의 암투병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시켰는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모습과 생각, 그대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시키던 그 '운동'을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가 요구했던 그것이 내가 좋아하고 즐기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운동'을 거부하더라도 이제는 다른, 나만의 '운동'을 제안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라면.


한편으론,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속 부자의 모습이 부러웠다.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서로 아끼는 마음이 느껴지는 관계. 서로 격려하고 지켜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작은 의견 대립 정도는 그저 넘기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같이 무언가 공감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아 보였다. 이제는 70대가 된 아버지와 아마도 더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밥을 먹으며 이번 주는 어땠는지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결국 내편인 사람들




어머니는 얼마 전에 내가 '영화 리뷰' 콘텐츠로 리뷰를 쓰고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무슨 말씀은 없다. 늘 그렇듯 별 관심 없으신 듯 보였다. 그냥 건너가는 말로 '잘 되면 좋겠다' 거나, '힘들지 않나' 정도를 건네실 뿐이다. 꽤 감성적이시지만, 어떤 부분에선 별로 티를 내지 않으셨다. 아니 어머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아주 티 나게 격려를 하거나 걱정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주 조용한 가족인 우리는 그저 상대방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일만 일어나길 기원할 뿐이다.


수능 결과를 기다리던 때였다. 좋은 성적이 아니었던 터라 결과가 나와도 지방대를 가거나 재수를 해야 했다. 난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높지 않은 점수가 나왔다. 지방대에 두 군데 정도 지원을 했고, 모두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인서울도 못했고, 그렇다고 재수를 선택하기도 싫었다. 결과가 나온 시점에 한 패스트푸드 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에게 문자가 왔다. "축하한다. 고생했다". 그 짧은 말에 눈물이 났다. 예상하지 못한 축하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어머니가 했던 말은 "재수는 절대 안 된다. 지방대도 안된다"였다. 그래서 더 그 축하가 의외였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에는 부크(톰 베이트먼)와 그의 엄마(아네트 베닝)가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부크와 여자친구 로잘리(레티티아 라이트)의 결혼을 반대한다. 그래서 부크는 어떤 방식으로든 로잘리의 좋은 점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여주려 노력한다. 부크의 어머나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따뜻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아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들의 결말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나오긴 하지만, 더 내 눈에 들어온 건 부크의 노력이다. 그는 어머니와 로잘리 사이에서 양쪽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무척 애썼다. 영화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그 노력이 느껴졌다.


어쩌면 부크의 어머니는 결국에는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예전 어머니가 나에게 축하 문자를 보냈던 것처럼.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쩌면 아쉬움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축하를 해준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동생에 비해 나는 늘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대학에 합격했고, 어머니의 축하 덕분에 내가 작지만 무언가 해낸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그 상황 자체는 반대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결국 아들이 가는 방향을 격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렇게 대학에 가고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더 이상 나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누가 되었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늘 하셨다. 영화 속 부크와 로잘리는 꽤나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결혼을 응원해 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는 부크의 어머니가 아주 심한 말을 하는 것까지만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막말을 내뱉는 부크의 어머니 유페이마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나쁜 말을 내뱉지만 머지않아 아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지지해 주게 될 거란 느낌을 그의 여러 가지 표정과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결국에는 내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두 존재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나의 그림자처럼 나를 앞으로 한 걸음 나갈 수 있게 한다. 비록 티 나지는 않아도 알게 모르게 격려를 하고 있다. 어머니도 내 유튜브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올라오고, 브런치에 영화 리뷰가 업데이트되면 좋아요를 누르고 영상을 본다. 영상에 붙은 광고도 꼭 챙겨보신다. 아버지도 내 영상을 틀어놓고 본 적이 있다.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만, 속으로 잘 되길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조금씩 나를 밀어주고 있다.


참 이상하다. 영화에서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 그 이면에 결국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긍정의 모습이 같이 떠오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모는 결국 자식 편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식이 못났든 잘났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결국에는 모두 내편이 되는 사람들.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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