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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어떤 순간

#3

by 레빗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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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질감, 그 느낌 그대로


비디오테이프는 독특한 질감이 있다. 선명하지 못한 화질과 테이프의 씹힘으로 인한 화면의 끊김 등 그 당시에는 꽤나 불편했던 그 요소들이 이제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영화를 한참 고르고, 집에 와서 재생 기계에 테이프를 넣고 화면이 나오길 기다릴 때,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텔레비전에서 시작되는 영화사 로고와 자막들은 소파에 앉아 끝까지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했다. 때론 테이프가 씹혀서 고장이 나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애를 먹을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고충마저도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컴퓨터나 인터넷 TV로 영화를 보는 시대다. 예전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과거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참 동안 영화를 고르던 것처럼 이제는 화면 앞에 앉아서 OTT에 있는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들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장소와 시간만 달랐을 뿐 그 행위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을 선택해서 골라보는 사람들의 프로세스는 동일하다. 넷플릭스가 과거 비디오 대여점의 프랜차이즈 브랜드였던 것을 떠올리면, 콘텐츠 대여라는 서비스 자체에는 어느 정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도 그런 과거와 현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 환경만 바뀌었을 뿐이다. 만약 지금 우리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갈 수 있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 수많은 비디오 대여점이 있던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본 상상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바꾼다는 상상은 이상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미래의 모습을 알 수 없고, 현재의 변화가 단번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본다. 그건 다르게 말하면 과거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다. 특정한 시점에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는 그 당시의 감정과 풍경을 담는다. 그건 그저 하나의 노래일 수 있겠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 당시에 경험했던 풍경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슬픈 기억. 모두 하나의 노래에 담겨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된다. 그렇게 머릿속의 추억은 어떤 아릿한 동경을 담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아카이브 81>의 주인공인 댄은 과거 저장장치였던 테이프를 복원하는 전문가다. 그는 세심하게 망가진 테이프를 풀어놓고 하나씩 영상을 복원시킨다. 그가 하나씩 망가진 테이프를 다시 재생하는 과정은 1994년에 벌어졌던 과거를 복원시킨다. 그는 영상을 녹화하고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 멜로디라는 인물과 그가 겪는 일들에 완전히 몰입된다. 그 자신의 추억은 아니지만 멜로디의 추억들을 복원하며 자신이 잊고 있던 그 당시의 추억들도 자연스럽게 복원하게 된다.


댄이 테이프를 복원하는 걸 보고 있으니, 마치 없어진 과거를 복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신중하게 테이프의 오염된 것을 닦아내고 다시 테이프의 형태로 만들어 화면으로 재생하기까지 무척 세심한 과정이 보인다. 그건 우리가 평소에 어떤 기억을 복원하는 것과도 맞닿아있다. 내 기억 속 과거 어느 순간을 떠올리려면 가만히 그 기억을 꺼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꺼내어진 기억은 머릿속에서 이미 재생되고 있다. 머릿속에 영사기가 있는 것처럼 내가 저장한 기억은 짧은 복원의 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재생된다.


드라마 속 멜로디는 영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영상을 찍지만 그렇게 남겨진 영상은 미래에 있는 댄과 연결하게 만든다, 비디오테이프를 재생시킬 때 느껴지는 특유의 질감은 보는 나를 90년대 어딘가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느껴지는 그 질감은 드라마 속에서는 과거의 인물이나 악마로 표현되지만 그런 느낌마저도 그리움의 마음으로 느껴졌다.


아날로그의 질감은 아마도 그리움일 것이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 비록 90년대는 테이프 같은 아날로그 제품으로 대표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나온 2000년대도 마찬가지고, 지금 2022년도 10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이때를 떠올릴만한 '지금은 알 수 없을' 질감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엄청나게 화질이 좋은 시절을 살고 있지만 우리가 아주 쉽게 스마트폰으로 남긴 짧은 일상의 영상들이 한참이 지나고 나면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 미래의 어떤 순간엔, 과거의 일상을 화면으로 보며 과거를 추억하게 될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 멜로디같이 일상을 기록하고, 또 한참이 지난 후 누군가 댄처럼 그 일상들을 복원하여 어딘가 저장해 둘 것이다. 그렇게 추억은 어디에든 남는다.


어떤 마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현재와 과거는 늘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영화를 보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그때의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그 행위 자체가 타임머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과거로 돌아갔다 다시 현재로 온다. 드라마 <아카이브 81>을 보며 내가 마치 90년대 다녀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디오테이프 화면의 질감과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 커다란 레코딩 기계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돕는다. 그렇게 아주 먼 과거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시간 속으로 가기 위해 다시 OTT서비스를 뒤적거려 본다. 마치 비디오 대여점에서 테이프를 고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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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펄린에서 나만의 일탈을


트램펄린을 싣고 우리 동네에 도착한 트럭이 짐을 내리기 시작하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나갔다. 90년대 초반까지도 트램펄린을 타려면 동네에 한 번씩 들르는 트램펄린 트럭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는 또 다를 수도 있다. 그만큼 여러 동네의 놀이와 방법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수많은 놀이 가운데 트램펄린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층간 소음 없이 마음껏 뛸 수 있었고, 혼자서 묘기를 부리듯 다양한 자세로 달릴 수도 있었다. 특히나 남동생과 웃고 떠들며 뛰었던 그때의 그 유쾌함과 땀냄새가 여전히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다.




영화 <벌새> 속 주인공인 은희와 친구가 트램펄린에서 뛰면서 노는 장면이 있다. 실내가 아닌 실외에 설치되어 있는 트램펄린을 '방방이'라고 부르면서 찾아가고, 맑은 하늘 아래서 하늘 높이 뛰어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다른 어디에서보다 자유롭게 보인다. 특별히 일탈이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없었던 그때엔 나 역시 친구들과 그렇게 트램펄린 안에서 마음껏 뛰면서 머릿속의 고민들을 잠시 잊었다. 지금도 여러 키즈카페를 가면 다양한 형태의 트램펄린이 있지만 그저 놀이의 공간일 뿐, 예전과 같은 감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가족이란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도 있지만 안 좋을 때는 한 없이 안 좋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부모님의 싸움과 잔소리, 형제자매와의 다툼 등 시끄러운 순간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아주 조용한 적막만이 감싸고 있을 때도 있다. <벌새> 속 은희의 가족들이 딱 그런 모습이다. 누군가 말할 때는 혼자 떠들고, 그마저도 없으면 조용한 적막만이 감돈다. 특히 밥 먹을 때는 서로 주고받는 말없이 숟가락과 젓가락 소리만 크게 들린다. 조금은 조용한 지옥 같아 보이는 집을 나서는 건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가족들과는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대화할 공통적인 주제를 찾지가 쉽지 않다. 영화 속 은희의 언니가 "우리 가족은 다 따로 살아야 돼"라고 조용히 내뱉는 것처럼, 결국에는 모두 각자 살아가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떨어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 누군가가 아프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가족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의 모습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지옥의 모습도 보인다. 어쩌면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족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크고 작은 일탈을 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시절 나에게 일탈이라는 것은 트램펄린에서 뛰고, 또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하는 것 정도였다. 담배를 피우거나 학교 땡땡이를 칠만큼 대범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범생이라고 할 만큼 공부를 잘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가족들과의 시간도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말없이 밥을 먹는 모습은 영화 속 은희네 가족과 비슷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던 그때는 정말 방에서 혼자 지내거나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것이 간절했다. 어쩌면 그래서 트램펄린에서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다툼이나 분란은 생긴다. 은희도 자신의 가족이 엉망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지만, 왠지 모르게 사춘기 때는 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고 좀 더 행복하게 사는 다른 가족이 있을 것 같은 아쉬움. 그 아쉬움은 사춘기에 더 말을 없게 만들었고 조용한 반항을 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런 문제들은 다른 가족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었고, 어떤 건 좀 더 커 보였고, 어떤 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부모님과 독립하고 난 이후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옆으로 찾아왔다.


조용히 고민을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예전처럼 트램펄린에서 뛰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 그런 자유로움과 일탈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어딘가, 그곳은 활동하는 영역이 아닌 무언가를 보는 공간이다. 어른이 되었으니 좀 더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의 트램펄린에서 뛰던 것 같은 자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어디로 갔을까. 힘들 땐 그저 조용히 길을 걷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어쩌면 그 트램펄린에서의 시간은 나에겐 조용히 걷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벌새>를 보면서 90년대 초반의 여러 느낌들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나 가족과 같이 있는 집에서 느끼는 그 특유의 건조함과 딱딱함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런 건조함과 딱딱한 집이라는 공간을 나와 따뜻하고 청명한 하늘 밑에서 뛰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무언가 자유로움을 느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물도, 간판도, 길도 낡고 촌스러워 보였지만 자유롭게 뛰는 은희의 모습만큼은 낡지 않았다. 자유롭게 힘껏 하늘로 뛰어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지금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현재의 은희도 그렇게 자유롭게 뛰어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트램펄린을 찾았던 것처럼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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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의 음악을 기다리며


1994년, 중3시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약간의 편안함을 느끼면서 다른 것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공부할 때도 그렇게 음악을 들어야 좀 오래 앉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음악이 빠질 수는 없었다. 주로 가요를 들었고, 그때는 이상우라는 가수의 음악 테이프를 꽤 많이 들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으면서 3집 앨범의 노래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라디오를 켰다. 무수히 많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중에서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들었다. 원하는 모든 음악을 개별로 구입하기 어려웠던 시절,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빈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꽤 오랜 기간 동안 몇 개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는 나만의 믹스 테이프가 되었다. 표지에 또박또박 노래의 이름과 가수의 이름을 적고는 가방에 넣고 다니며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의 주인공인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는 유열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유열의 음악앨범'이 시작되던 시기에 처음 만난다. 모든 것이 바로바로 연결되지 않던 아날로그 시기였던 1994년 속에서 주인공들이 서로의 감정과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 아날로그 감성처럼 두 주인공의 감정도 흐려졌다 또렸해졌다를 반복한다. 마치 아날로그 버튼을 돌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려고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잡음 없는 정확한 부분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있다. 라디오 DJ의 입으로 자신의 사연이 읽어질 때, 그 느낌은 꽤 특별하다. 과거에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사연을 보낸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DJ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고 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내도 내 사연은 선택되지 않았다. 한동안 사연을 보내다 고등학교 후반기가 되면서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 자취방에 가만히 누워서 라디오를 듣던 나는 그 당시 느린 인터넷 창을 켜고 사연을 보냈다. 가수 이소라가 진행했던 프로그램에 무언가를 적어 보냈던 내 사연은 DJ의 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나의 신청곡까지 들을 수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내 주변 사람들은 그때 나의 사연을 듣지 못했고, 들었더라도 금방 잊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별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라디오를 통해 퍼질 때, 그것이 주는 강렬한 느낌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사연도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는 특별해 보인다. 영화가 그 둘의 감정과 순간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들을 때 DJ의 소리와 음악에 집중하는 것처럼 두 주인공도 상대방의 감정과 표정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랑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다면 가만히 버튼을 돌려 주파수를 잡으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의 과정이 이들의 엇갈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라디오라는 매체는 그런 평범함의 힘이 숨어있는 매체인 것 같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어디에서든 뚜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과거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많이 사라졌다. 가만히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원하는 노래가 나오는지 기다리지 않는다. 바로바로 원하는 노래를 찾아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라디오를 듣고 사연을 보낸다. 특히 여전히 청소년들도 밤에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DJ와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그들이 라디오를 들으며 여러 사연을 보내는 건,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탈이고, 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작은 위로 다른 평범함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 그 힘은 약해졌지만, 1994년의 라디오도, 2022년의 라디오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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