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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Mar 09. 2024

호떡은 겨울, 사람은 사랑

"엄마, 진정크림이 떨어졌어요." 중학생 딸아이가 등교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래? 오늘 사다 놓을게."     

"아이, 진짜. 애들은 여드름 안 나는데 나만 왜 이러는 거야."     

아이의 투정에 내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자식에 대해 엄마가 지닌 부채감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여드름난 애가 어떻게 너뿐이겠니. 지금은 여드름이 크게 보여서 그렇지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야. 10대에 여드름 나는 건 흔 한 일 아니겠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말은 사람한테 하는 게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낫다. 감정이 들쭉날쭉할 땐 말보다 침묵이 상책이다.    

      

백화점 가는 길에 생각 하나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그 근처에 호떡집이 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길 옆의 포장마차나 금방 없어져도 모를 작은 가게에서 구워 파는 겨울호떡을 먹어야만 겨울의 할일을 했다 싶어 봄이 와도 미련이 남지 않는다. 많이도 못 먹고 겨울 동안 한 장이나 한 장 반이다. 지금 사는 동네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이 없었다. 얼마 전 붕어빵과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생겨 들뜬 마음으로 세 장이나 샀었다. 차에 타자 마자 한 입 깨물었는데 아! 실패다. 그 순간 떠 올랐다. 미리 구워 둔 호떡을 데우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 이성이 의욕을 못 이겨 생긴 불상사였다. 새로 구워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뻣뻣해서 먹을 수 없어 다 버리고 말았다. 돈보다도 깨져버린 내 설렘이 아까웠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백화점 근처의 그 호떡집은 그런 뒤통수 맞을 일은 없다.          

"사장님 저 한 장만 먹고 갈 건데요." 미안한 듯 말하니 눈치 빠른 주인장이 밝게 웃으며     

"괜찮아요." 하면서 반죽을 떼었다.     

호떡 한 장 가격은 1500원이다. 연례행사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치고는 은혜로운 가격이다. 주인장은 반죽을 팬에 올리고 누르개로 꾹 눌렸다. 반죽을 둘러싼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구워져 가는 호떡모양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아~ 기름이 춤을 춘다, 춤을 춰. 다 구워진 호떡을 건네받는데 내가 춤을 출 판이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요." 호떡을 맞이하는 내 두 손이 어찌나 공손한지 웃음이 났다. 호~~ 불어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먹고는 와! 이거지, 이거야.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과 달달한 맛뒤에 스치는 계피향까지. 딱 내가 아는 호떡맛이다. 얼마 전 겨우 한 입 먹고 버렸던 호떡 이야기를 일러바치듯 말했다. 주인장은 구워놓았다 데워서 파는 사람도 꽤 있다고 했다. 이 집 주인장이 구워 놓지 않는 건 손님에게 맛있는 호떡을 대접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손님 없을 때 구워 놓으면 편한 걸 누가 모르겠냐만 그러지는 못하겠더란다. 어떤 할머니가 빨리 못 굽느냐고 꾸중하듯 말하다 자기가 뒤집겠다며 맨 손을 기름판에 넣으려 해 식겁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기다려도 돼요. 그래야 맛있는 호떡을 먹을 수 있으니까." 뜨거운 호떡은 천천히 먹으며 이야기 나누기에 좋다.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한 남자가 허공에 삿대질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호떡집 주인장이     

"술만 먹으면 저래요. 남의 가게 앞에서 행패를 부리면 손님이 무서워 오겠냐며 호통을 쳤더니 다음 날 찾아와서는 누님 죄송해요 사과를 하는데 말하는 걸 보니 머리에 든 게 많은 것 같더라고. 못 배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술만 먹으면 정신 못 차리고 저러네."     

그는 제 몸을 못 가누고 허우적거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여러 개로 쪼개서 몸과 마음으로 머물다 보낸다. 자신의 하루를 몽땅 술에 기대는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호떡집 주인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리 말해도 별 수 없더라고 했다.        

  

호떡주인장이 말하길 자기는 술만 먹으면 그렇게 웃었다고 했다. 웃는 게 뭐 나쁘냐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한 밤중에 대성통곡 하는 소리가 나 큰 일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놀래서 나가 보니 동창생 한 명이 술에 취해 계단에 앉아 머리를 쥐어 뜯으며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술에 취해 우는 것처럼 큰 소리로 끊임없이 웃어 재끼면 주위 사람들이 참 난처하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주인장은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지난밤을 떠 올리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졌는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다부지게 마음먹었고, 그 후로는 취했다 싶으면 곧바로 집에 간다고 했다. 술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라지면 취해서 집에 간 거니 오해 말고 찾지도 말라고 했단다. 여태까지 잘 지키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표정이 탄력 있어 보기 좋았다. 주인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코트 앞깃과 외쪽 소매 머리카락까지 녹은 설탕이 흘러 있었다. 흔하게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며 주인장이 건네준 물티슈로 박박 닦아냈다.          


소란스럽던 밖이 조용해 내다 보니 편의점 주인장이 술 취한 그 남자와 말동무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 주인장이 그의 말을 들어줘서 진정이 됐나 보다. 편의점 주인장의 미소는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데다 그의 눈빛에서 아이를 사랑스러워하는 듯한 어른이 보였다. 어쩌면 술취한 그는 자기의 말을 허공이 아닌 사람에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분고분 순해진 그는 언뜻 보면 좀 전에 난리 치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보았던 영상이 떠 올랐다. 술에 취해 바람에 흔들리듯 휘청거리며 소리 지르는 한 남자를 어떤 청년이 안아주니 몸을 기대며 비로소 진정되어 조용해졌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견딜만하다고 느낀다. 술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하는 말은 잠꼬대 같기도 해 듣는 사람의 귀가 닫혀 마음이 잘 안 보이니 안타깝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아채는 건 다행이다. 호떡집 주인장처럼 고쳐보겠다고 마음먹어진다면 더 다행이다. 목에 핏줄 세우고 침 튀기며 강조한다고 열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다고 남의 열정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것이 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거니까. 저 사람은 저리도 뜨거운데 난 왜 뜨거워지지 않냐며 자기 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만의 열정과 그 열정이 가진 온도가 있는 거니까. 은근하게 끓고 있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나만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발견하면 아마 다시 온도를 높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해보겠다고 스스로 우러나는 좋은 마음만큼 고마운 것도 드물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짜릿한 그린 라이트다. 한 번 해보겠다고 시작하는 것은 변화된 나를 미리 보기 하는 거라 희망차다. 나 스스로도 호떡집 주인장처럼 부단히 고쳐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지만 나 자신이라면 말은 달라지는 거니까. 호떡 한 장으로 만난 길 위의 사람들을 통해 마음매무새를 살핀다.  

        

맛있게 잘 먹고 가요 인사하니 주인장이 따라 나오며 배웅을 했다. 호떡 한 장 먹고 신나서 발걸음이 가볍다. 백화점은 정기 휴점이라 화장품은 사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봄이 마저 오기 전에 겨울 숙제를 해치웠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내려다보니 소매에 녹은 설탕 자국이 남아있고 엉킨 머리칼에서 달큼한 냄새가 났다. 호떡 주인장의 반짝이는 눈빛이 떠 올랐고 술 취한 사람을 다독이던 배가 불뚝 솟은 편의점 주인장 그리고 자기 몸 가누지 못하던 그도 같이 떠 올랐다. 그를 탓할까. 내 몸 가누고 사는 일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별 일 아닌 듯 사랑 한 움큼씩 건네는 사람이 있어서다. 달달한 호떡은 겨울에 잘 어울리고 사랑은 사람에게 참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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