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고 산책을 나갔다. 더 이상 좋을 수 없겠다 싶게 좋은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늘 좋은 계절이라며 감동한다. 그리고 그 감동은 해가 거듭되면서 새로우면서도 깊은 맛이 나게 익어간다. 감사하는 마음은 또 어떻고. 이 계절은 공손히 고개 숙여 범사에 감사하게 하고 온순해지게 한다. 산책로 초입에 있는 빌라 화단에 큼지막한 모란꽃이 활짝 피어 있어 반가운 사람 만난 듯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더 사랑스러워 신생아 얼굴 만지듯 조심스레 두 손으로 감싸 정성 들여 향기를 맡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기를 여러 번, 그래도 질리지가 않았다. 향기로운 꽃을 길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아 그 순간이 귀해서 그렇다. 남편이 곁에 없고 혼자였으면 아마도 한참을 더 있었을 것이다. 냇가의 버드나무 잎새가 잔바람에 살랑이는 모양은 마치 슬로모션으로 보는 영상 같다. 여유롭고 평화롭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이 되기를 기다릴 때 구급차가 큰 소릴 내며 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비키라고 빨리 비켜. 다 비키란 말이야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구급차가 막 내 앞을 지나갈 때
'아이고, 무슨 일일까. 저 안에 탄 사람 부디 치료 잘 받고 꼭 집으로 돌아가시길...‘ 기도 같은 바람을 담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구급차가 급하게 지나가면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구급차 안에 누운 누군가가 남 같지 않아서다. 구급차 안의 어떤 사람이 회복되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은 어쩌면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막연하던 삶에 대한 나의 애착을 코앞에서 보는 듯했다.
그때였다. 네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구급차를 보기 위해 달려왔다. 내 옆으로 온 아이는 "구급차다!! 우~와!! 와~~!!" 발을 구르고 손가락으로 구급차를 가리키며 탄성을 터뜨렸다.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반짝이는 눈빛이 안 보여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들뜬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을 보는 어른들은 너 참 사랑스럽구나 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이 든 사람이 해맑은 아이를 볼 때면 약간의 슬픔이 양념된 감정을 맛보게 되는데 그건 아마도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나와 아이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구급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고 염려가 가시지 않은 난 말없이 잠잠했다. 난 환자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고, 아이의 호기심은 벚꽃처럼 터진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어 여러 사람이 뒤섞여 걸어갔다. 제엄마 보다 앞 선 아이는 신나서 폴짝폴짝 뛰어가고 난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아이야, 구급차를 보면 네 심장이 벌렁거리냐? 내 심장도 벌렁거린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