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창일 때는 입맛이 없더니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서는 매콤하고 칼칼한 것들이 당겼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방문한 양양장에서는 지누아리를 사다 초장을 넣어 새콤달콤 무쳐 먹기도 하고, 도라지에 오이를 넣어 초무침을 해먹기도 했고, 야채를 듬뿍 넣은 비빔국수도 매콤하게 무쳐 먹었다.
매콤한 것들을 여러 날 먹고 나니 자극적인 것 대신 슴슴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여름내 먹었던 메밀국수가 똑 떨어져 오늘은 한살림에 들른 김에 메밀국수를 사 왔다.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국수를 즐기지 않았다. 국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마흔 후반 즈음부터였으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국수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주말이면 먹었던 칼국수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밥 대신 칼국수를 먹었다기보다 부모님이 칼국수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동생들이랑 놀고 있으면 아빠가 밥상 다리를 접어 방바닥에 펼쳐놓고 밀가루 반죽을 소주병으로 얇게 펴놓으면 엄마가 그것을 돌돌 말아 칼로 "똑, 똑" 썰어내던 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주방에서 펄펄 끓던 커다란 육수 냄비도 그려진다.
오늘은 칼국수가 아니라 간장국수를 먹으려고 한다. 양념은 간장과 들기름만 넣을 것이다. 먼저 계란을 두어 개 냄비에 올려 15분 정도 삶는다. 계란을 삶아내면 냄비를 헹구어 다시 물을 붓고 국수를 삶는다. 국수 삶을 때는 갓난아이 돌보듯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한다. 언제 거품을 토해낼지 모르니 컵에 물을 담아놓고 끓어오르면 바로바로 부어주어야 한다.
메밀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국수가 익었는지 몇 가닥을 건져내어 맛을 본다. 사실 어릴 적에 엄마가 국수를 삶으면 옆에서 놀고 있다 눈처럼 하얀 국수 몇 가닥씩 받아먹는 것이 낙이었다. 엄마처럼 나도 아이에게 국수 몇 가닥을 건져 입에 넣어준다. 생각해 보니 딱딱한 생국수도 좋아했다. 지금도 국수를 삶으려고 국수를 소분해 놓으면 한두 가닥씩 입에 넣고 똑똑 씹어먹게 된다. 먹다보면 국수가 짜서 인상를 찌푸리게 되지만 소소한 맛을 포기할 수는 없다. 국수를 맛본 아이는 다 익었다고 알려주어 국수를 얼른 찬물에 헹군다.
언젠가부터 삶아진 국수를 헹구는 행위를 참 좋아하게 됐다. 국수를 여러 차례 헹궈내고 손으로 돌돌 말며 물기를 짜준다. 그리고 얌전히 그릇에 담아내면 그 모습이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다. 요리하는 사람으로 완성된 요리보다 어떨 때는 가지런히 썰어낸 야채가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고 다듬어 놓은 고구마 순이 아기처럼 귀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어여쁜 국수를 담은 그릇에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잘라 올려준다.
양념은 단출하다. 간장, 들기름, 깨가루, 끝. 김가루가 있다면 함께 넣어주면 좋다. 어제 담가놓은 생채를 곁들여 같이 먹는다. 맛은 간장계란밥과 비슷하달까. 간장국수의 맛을 책으로 비유하자면 비빔냉면은 소설책이라고 한다면 간장국수는 순수한 동화책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지 않지만 본연의 맛을 선사해 준다. 국수 한 젓가락을 입에 호로록하고 넣으면 옅은 간장향과 고소한 기름맛이 느껴진다. 야채도 없으니 온전히 국수가 주인공이다. 오늘은 더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